목차
Ⅰ. 18세기 초 (『청구영언』)와 19세기 후반 (『가곡원류』) 가집의 변화
1. 『청구영언』
1) 『청구영언』 소개
2) 『청구영언』과 18세기 시조문학
(1) 시조의 작가층
(2) 사설시조
2. 『가곡원류』
1) 『가곡원류』 소개
2) 『가곡원류』와 19세기 시조문학
(1) 가집의 전문화(專門化)
3. 『청구영언』과 『가곡원류』의 차이점
1) 표면적 차이
2) 시대상의 차이
Ⅱ.『청구영언』의 연군(戀君), 견적(譴謫), 보효(報效) 주제의 차이
1. 연군(戀君), 견적(譴謫), 보효(報效)의 작품해석
1) 연군(戀君) (294-297)
2) 견적(譴謫) (298-300)
3) 보효(報效) (301-302)
2) 연군(戀君), 견적(譴謫), 보효(報效)와 18세기 초 중세적 사유방식
<참고문헌>
1. 『청구영언』
1) 『청구영언』 소개
2) 『청구영언』과 18세기 시조문학
(1) 시조의 작가층
(2) 사설시조
2. 『가곡원류』
1) 『가곡원류』 소개
2) 『가곡원류』와 19세기 시조문학
(1) 가집의 전문화(專門化)
3. 『청구영언』과 『가곡원류』의 차이점
1) 표면적 차이
2) 시대상의 차이
Ⅱ.『청구영언』의 연군(戀君), 견적(譴謫), 보효(報效) 주제의 차이
1. 연군(戀君), 견적(譴謫), 보효(報效)의 작품해석
1) 연군(戀君) (294-297)
2) 견적(譴謫) (298-300)
3) 보효(報效) (301-302)
2) 연군(戀君), 견적(譴謫), 보효(報效)와 18세기 초 중세적 사유방식
<참고문헌>
본문내용
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중대엽이나 후정화 같은 곡조가 이 시기에는 더 이상 불리지 않았고, 삭대엽이 발달하여 빠른 속도의 시조창이 유행하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가곡원류』는 이러한 19세기 시조사의 국면을 보여준다.
(1) 가집의 전문화(專門化)
『가곡원류』는 작품들이 대부분 가곡창에 맞춘 5음절로 이루어져 있고, 음부기입, 매화점장단, 장고장단 등 음악적 사항이 세밀하게 첨가되어 있다. 또한 곡조 분류를 30항목으로 세분화하였으며, 창법은 남창과 여창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러한 구분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유연하게 소통이 가능한 것임을 박효관의 편찬 동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상식적인 발언 같지만 실제로는 그의 말대로 ‘그 이치에 신통한 이가 아니면 가히 해득할 수 없는’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사항이다. 이처럼 『가곡원류』는 18세기 가집의 논리들을 수용한 것도 있으나 대부분 전혀 다른 ‘전문적 이론’들을 내세운다.
이러한 전문성은 저자인 박효관의 편찬의도에 따른 것이다. 박효관은 당시 시속의 가집들이 음악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를 갖추지 못 한 것을 지적하였고, 체계적 틀을 지닌 새로운 가집을 편찬하여 음악의 전문성 확보를 최우선적으로 표방하였다. 이것은 『가곡원류』계열 가집이 단순히 시조음악을 여흥으로 즐기는 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음의 고도의 경지를 추구하는 ‘예인’들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예인을 위한 가집이 필요했다는 점에서 19세기 후반 시조문학의 담당층에는 고급음악을 지향하던 전문 가객들이 있었고, 가악계에 많은 예인들이 모여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3. 『청구영언』과 『가곡원류』의 차이점
1) 표면적 차이
18세기의 『청구영언』이 가창자들이 악보에 맞추어 노래할 수 있는 시조 작품들을 총체적으로 모아 묶은 것이라면, 19세기의 『가곡원류』는 노래를 부르기 위해 필요한 음보, 창법까지 제시한 전문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즉 『청구영언』이나 『해동가요』가 시조문학의 중간보고서라면, 『가곡원류』는 그 총결산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두 가집의 표면적인 차이에서 시대상에 따른 시조문학 담당층의 차이를 유추해볼 수 있다. 『청구영언』이 편찬된 18세기는 사대부 외 계층의 작가들이 시조문학의 담당층에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이고 『가곡원류』가 편찬된 19세기는 고급예술을 추구하는 전문 가객들이 시조문학의 담당층으로 자리 잡은 시기로 볼 수 있다.
2) 시대상의 차이
『청구영언』의 목록을 보면 김천택이 가사집을 편찬할 때 작가적 신분의 상황을 강하게 의식한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김천택이 시조문학에서 사대부문학의 권위에 벗어나, 어떻게 자신들의 예술 행위를 나타낼 것인가를 염두에 두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18세기에는 시조양식의 전통이 지니는 힘에 아직 압도되어 있었고, 따라서 가집 편찬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조선 전기 사대부들의 작품은 반드시 전체적으로 수록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가곡원류』는 작품 수록에서 작가의 신분차이나 연대순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또한 19세기 초반까지 지속적으로 전승되던 맹사성의 「강호사시가」, 이현보의「어부가」, 이이의 「고산구곡가」등 명망 높은 사대부 작가들의 작품을 대거 탈락시키거나 부분적 채택하였다. 이것은 19세기 시조문학이 중세 봉건시대의 성리학적 이념에서 벗어나 사회적으로 충분히 가치를 부여받게 된 당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19세기에는 시조가 전통적으로 굳게 지지하고 있던 사대부적 미의식이 옅어지고 다양한 정서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장르로 인식되게 된 것이다.
Ⅱ.『청구영언』의 연군(戀君), 견적(譴謫), 보효(報效) 주제의 차이
1. 연군(戀君), 견적(譴謫), 보효(報效)의 작품해석
『청구영언』이 가진 큰 특징은 이수대엽(二數大葉)에 무명씨(無名氏) 작품들을 주제별로 나누어 배열한 것이다. 이러한 배열을 통해 당시 어떤 주제의 작품들이 쓰였으며, 김천택이 어떤 기준으로 작품을 나누었는지를 알 수 있다. 연군(戀君), 견적(譴謫), 보효(報效)는 이수대엽의 무명씨 항목에서 가장 먼저 시작하는 주제들로 연군에서는 4수, 견적에서는 3수, 보효에서는 2수의 작품을 수록하고 있다.
1) 연군(戀君) (294-297)
연군(戀君): 사모할 연(戀), 임금 군(君) - 임금을 그리워함
294.
나의 님 향(向)한 뜻이 주근 후(後)면 엇더할지
상전(桑田)이 변(變)하여 벽해(碧海)는 되려니와
님 향(向)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이야 가
(1) 가집의 전문화(專門化)
『가곡원류』는 작품들이 대부분 가곡창에 맞춘 5음절로 이루어져 있고, 음부기입, 매화점장단, 장고장단 등 음악적 사항이 세밀하게 첨가되어 있다. 또한 곡조 분류를 30항목으로 세분화하였으며, 창법은 남창과 여창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러한 구분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유연하게 소통이 가능한 것임을 박효관의 편찬 동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상식적인 발언 같지만 실제로는 그의 말대로 ‘그 이치에 신통한 이가 아니면 가히 해득할 수 없는’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사항이다. 이처럼 『가곡원류』는 18세기 가집의 논리들을 수용한 것도 있으나 대부분 전혀 다른 ‘전문적 이론’들을 내세운다.
이러한 전문성은 저자인 박효관의 편찬의도에 따른 것이다. 박효관은 당시 시속의 가집들이 음악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를 갖추지 못 한 것을 지적하였고, 체계적 틀을 지닌 새로운 가집을 편찬하여 음악의 전문성 확보를 최우선적으로 표방하였다. 이것은 『가곡원류』계열 가집이 단순히 시조음악을 여흥으로 즐기는 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음의 고도의 경지를 추구하는 ‘예인’들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예인을 위한 가집이 필요했다는 점에서 19세기 후반 시조문학의 담당층에는 고급음악을 지향하던 전문 가객들이 있었고, 가악계에 많은 예인들이 모여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3. 『청구영언』과 『가곡원류』의 차이점
1) 표면적 차이
18세기의 『청구영언』이 가창자들이 악보에 맞추어 노래할 수 있는 시조 작품들을 총체적으로 모아 묶은 것이라면, 19세기의 『가곡원류』는 노래를 부르기 위해 필요한 음보, 창법까지 제시한 전문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즉 『청구영언』이나 『해동가요』가 시조문학의 중간보고서라면, 『가곡원류』는 그 총결산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두 가집의 표면적인 차이에서 시대상에 따른 시조문학 담당층의 차이를 유추해볼 수 있다. 『청구영언』이 편찬된 18세기는 사대부 외 계층의 작가들이 시조문학의 담당층에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이고 『가곡원류』가 편찬된 19세기는 고급예술을 추구하는 전문 가객들이 시조문학의 담당층으로 자리 잡은 시기로 볼 수 있다.
2) 시대상의 차이
『청구영언』의 목록을 보면 김천택이 가사집을 편찬할 때 작가적 신분의 상황을 강하게 의식한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김천택이 시조문학에서 사대부문학의 권위에 벗어나, 어떻게 자신들의 예술 행위를 나타낼 것인가를 염두에 두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18세기에는 시조양식의 전통이 지니는 힘에 아직 압도되어 있었고, 따라서 가집 편찬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조선 전기 사대부들의 작품은 반드시 전체적으로 수록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가곡원류』는 작품 수록에서 작가의 신분차이나 연대순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또한 19세기 초반까지 지속적으로 전승되던 맹사성의 「강호사시가」, 이현보의「어부가」, 이이의 「고산구곡가」등 명망 높은 사대부 작가들의 작품을 대거 탈락시키거나 부분적 채택하였다. 이것은 19세기 시조문학이 중세 봉건시대의 성리학적 이념에서 벗어나 사회적으로 충분히 가치를 부여받게 된 당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19세기에는 시조가 전통적으로 굳게 지지하고 있던 사대부적 미의식이 옅어지고 다양한 정서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장르로 인식되게 된 것이다.
Ⅱ.『청구영언』의 연군(戀君), 견적(譴謫), 보효(報效) 주제의 차이
1. 연군(戀君), 견적(譴謫), 보효(報效)의 작품해석
『청구영언』이 가진 큰 특징은 이수대엽(二數大葉)에 무명씨(無名氏) 작품들을 주제별로 나누어 배열한 것이다. 이러한 배열을 통해 당시 어떤 주제의 작품들이 쓰였으며, 김천택이 어떤 기준으로 작품을 나누었는지를 알 수 있다. 연군(戀君), 견적(譴謫), 보효(報效)는 이수대엽의 무명씨 항목에서 가장 먼저 시작하는 주제들로 연군에서는 4수, 견적에서는 3수, 보효에서는 2수의 작품을 수록하고 있다.
1) 연군(戀君) (294-297)
연군(戀君): 사모할 연(戀), 임금 군(君) - 임금을 그리워함
294.
나의 님 향(向)한 뜻이 주근 후(後)면 엇더할지
상전(桑田)이 변(變)하여 벽해(碧海)는 되려니와
님 향(向)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이야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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