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임나일본부설
2. 칠지도
-참고문헌-
2. 칠지도
-참고문헌-
본문내용
(東晋)하사설
이 주장은 구리하라에 의해 제시되었는데, 이것은 명문은 틀림없이 하행형식이지마는, 당시의 백제왕은 왜국왕에게 하행할 수 있지 않았으므로, 왜국왕이 상위에 있었다는 전제 하에,「奇生聖晋(←音)」으로 판독하여 ‘생을 어지신 동진으로부터 받아’로 해석하고, 동진(A.D.317~419)이 백제의 궁한 처지를 구한 왜국왕에게(근초고왕24년 A.D.369), 동26년‘A.D.371\'에 백제가 고구려를 쳐서 평양성을 뺏고 고국원왕을 전사케 한 대에 왜국이 백제를 도운 공적을 칭송한 것이라고 하나 그 무렵엔 이런 사실이 없다. 한일은 물론이고 중국에 있어서도 왜국이 백제를 도운 역사적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3) 결론
칠지도는 그동안 <<일본서기>> 신공황후기 49년조의 기사화 그를 바탕으로 한 임나일본부설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금석문 자료로 널리 이용되어왔으나 그에 걸맞은 다른 고고학적 사료가 발견되지 않는 한, 칠지도는 그에 적합하지 않은 사료라고 하겠다. 백제와 일본, 두 나라는 정보를 교환하면서 교류하고 협력하는 관계였다. 당시 철기문화가 앞섰던 백제는 우수한 생산품이나 무기 재료, 그리고 문화와 식량을 일본에게 전해주었고 일본은 정복전쟁에 필요한 군사적 지원을 해주었다. 칠지도는 이러한 두 나라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보여주는 사료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1. 고대한일관계사, 혜안출판사, 연민수저, 1998
2. 한일고대관계사의 쟁점, 한국문화사, 강길운저 ,2002
3. 한국사 이야기, 한길사, 이이화저, 1998
4. 고대로부터의 통신, 푸른역사,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 분과 지음, 2004
이 주장은 구리하라에 의해 제시되었는데, 이것은 명문은 틀림없이 하행형식이지마는, 당시의 백제왕은 왜국왕에게 하행할 수 있지 않았으므로, 왜국왕이 상위에 있었다는 전제 하에,「奇生聖晋(←音)」으로 판독하여 ‘생을 어지신 동진으로부터 받아’로 해석하고, 동진(A.D.317~419)이 백제의 궁한 처지를 구한 왜국왕에게(근초고왕24년 A.D.369), 동26년‘A.D.371\'에 백제가 고구려를 쳐서 평양성을 뺏고 고국원왕을 전사케 한 대에 왜국이 백제를 도운 공적을 칭송한 것이라고 하나 그 무렵엔 이런 사실이 없다. 한일은 물론이고 중국에 있어서도 왜국이 백제를 도운 역사적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3) 결론
칠지도는 그동안 <<일본서기>> 신공황후기 49년조의 기사화 그를 바탕으로 한 임나일본부설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금석문 자료로 널리 이용되어왔으나 그에 걸맞은 다른 고고학적 사료가 발견되지 않는 한, 칠지도는 그에 적합하지 않은 사료라고 하겠다. 백제와 일본, 두 나라는 정보를 교환하면서 교류하고 협력하는 관계였다. 당시 철기문화가 앞섰던 백제는 우수한 생산품이나 무기 재료, 그리고 문화와 식량을 일본에게 전해주었고 일본은 정복전쟁에 필요한 군사적 지원을 해주었다. 칠지도는 이러한 두 나라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보여주는 사료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1. 고대한일관계사, 혜안출판사, 연민수저, 1998
2. 한일고대관계사의 쟁점, 한국문화사, 강길운저 ,2002
3. 한국사 이야기, 한길사, 이이화저, 1998
4. 고대로부터의 통신, 푸른역사,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 분과 지음, 2004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