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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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사회적인 통제로 말미암은 죄인이란 의미가 없는 것이다. 또한 병의 상처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것이나, 사회적으로 소외되는 행위란 결코 인간에게 정상적이고 자연스런 것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의 샬롬에 동참하게 함으로, 상처난 자리를 싸매고 병치유의 자리에 들게 하는 것, 사회적으로 함께 나눔의 자리에 드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누려야 할 정상적이고 인간적인 아름다움인 것이다. 예수는 친히 이것을 몸으로써 보여주었다.
예수가 죄인의 자리에 들므로, 죄인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았으며, 상처난 자리에 스스로 상처를 체현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므로 소외되고 상처난 민중들의 고난과 소외를 자신의 인격과 역사 속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그것을 자유와 생명의 사건으로 바꾸고 있다. 이것은 그 자신이 가난해 짐으로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만들고, 그 자신이 배고픔으로 다른 사람들을 배불리는 능력(고후 8,9)인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행위를 통해서 주어진 것이 구원의 현존이다. 죄용서와 병치유, 인간의 억압성이 타파되는 자유케 되는 자리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선포는 이러한 예수의 자유케 하는 치유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곧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자유케 하는 치유(눅 11,20; 마 12,28: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귀신들을 쫓아내고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께 왔다)란 종말론적인 성령의 새 창조의 결과이다. 즉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치유이적(사 35,5-6)은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자연스런 복이다. 예수는 이것을 "소경들이 보고/절름발이가 걸으며/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들이 일으켜지고/가난한 사람들이 복음을 듣는다"(눅 7,22; 마 11,5)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의 새 공동체가 하나님의 주권을 파괴하고 도전하는 세력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행해야 할 바는 자기자신이 고난받는 길을 가야하는 섬김의 길이었다. 이로써 하나님 나라의 주권이란 아들을 보내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게하는 사랑의 주권인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는 지배구조하에 놓여 있는 세상의 틀속에 와서 그것을 오히려 섬김의 구조로 전환시키려 한 것이다. 곧 예수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의 다스림이란 인간의 군림과 지배의 통치가 끝나는 자리에서 비로서 시작됨을 말해준다. 이런 점에서 세례자 요한은 헤롯에게, 예수는 빌라도라는 정치적 집권자에 의해 죽음의 자리에 들었다는 것은 예수의 길이 보여주는 특생인 것이다.
예수가 보여준 섬김의 목표는 아주 분명하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하여 대속물로 주려 한"(막 10,45) 것이다.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주신 구원과 자유와 생명을 누리도록 한 것이다. 예수의 섬김의 정신이란 바로 사람을 살리는 생명운동으로써,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죄로 고통당하는 자에게 죄 용서를,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에게는 치유를 선언하는 자유와 해방과 생명의 운동인 것이다.
맺는 말
유대의 변두리지역인 갈릴리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면서 등장한 예수가 유대의 정치 종교중심지인 예루살렘을 향해 가면서 선언한 자기 자신의 길은 고난받는 십자가의 길이었다(막 10,35-45).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한 마디로 다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치적 혁명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영적이었고, 단순히 영적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위대한 정치, 사회, 종교적 혁명가였으며, 또한 단순한 종교적 인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큰 역사변혁을 초래한 신적인 대행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가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하나님만이 이 세상의 참 주권자이심을 선포하고 이를 실천하는 운동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당시의 종파운동이 지녔던 역사지평적 갱신운동이나, 묵시적 집단운동의 성격만으로는 다 규명할 수 없는 우주적인 통전성과 역사적인 구체성을 지닌 독특한 운동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예수의 길을 뒤따른 제자들도 예수가 십자가의 죽음을 넘어 부활의 아침을 맞기 까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실체를 다 파악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부활의 자리에서 조명되기 까지 하나님의 주권은 다만 감추어진 채로 예수의 삶속에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상적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원초적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첫째는 예수를 통해 새롭게 피조된 하나님 나라란 모든 기존적인 가치체계를 역전시키는 하나님의 자유와 해방을 향한 나라라는 것이다. 둘째로는 이렇게 세상이 지닌 가치관을 역전시키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운동이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주권적 아버지가 되시고 모든 자는 그분의 가족에로 초청받는 하나님 가족운동이라는 것이다. 셋째로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 나라는 예수가 보여준 십자가를 통한 수난받는 섬김의 길을 통해서 비로소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한국의 신학과 교회가 깊이 자성할 것이 있다면, 예수가 그의 삶으로 보여준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신학적으로나 목회적으로 바르게 제시하지 못하는 점이라 할 것이다. 예수는 잃어버린 자를 위해서 스스로 잃어버리고, 가난한 자를 위해서 스스로 가난해졌으며, 소외받은 자를 위해서 스스로 소외되고, 병든 자를 위해서 스스로 상처냄으로 진정한 하나님의 자유와 생명과 해방을 역사적 삶의 자리에서 체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학이 계시와 역사, 개인과 공동체, 시간의 차안과 피안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로 신학적 가치관을 너무 빨리 제한하거나, 그 반대로 일치시켜도 아니될 것이며, 또한 풍요한 목회적 자리에 안주함으로 감추어진 하나님의 주권을 간과한 채, 고난받는 섬김의 길에 들어서야 할 신학도의 길을 가로 막아서도 아니될 것이다. 교회가 교권적 지배의 힘에 의하여 세워진다면 그것은 교회의 비극이며 복음의 손상이며, 예수 정신의 이탈이라고 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세상의 모든 권세와 능력을 예수의 발아래 무릅꿇게 할 때까지(고전 15,24.25) 하나님의 주권은 감추어진 주권이기에 고난받는 섬김의 길을 통해서 종말론적으로 드러날 하나님의 감추어진 주권을 이땅위에 세워나가는 예수의 제자들에 의해 지금도 세워지며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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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7페이지
  • 등록일2002.11.06
  • 저작시기2002.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1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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