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군자의 상징성과 그 역사적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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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사군자의 상징성과 그 역사적 전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사군자의 상징성과 그 역사적 전개
1. 사군자의 의미와 상징성

2. 중국의 사군자 기원과 발달
1. 북송이전.
2. 송대(960~1279년)의 사군자화.
3. 원대의 사군자화.(1279~1368년)
4. 명, 청대의 사군자화.(약 1368~1912년)

3. 한국의 사군자 기원과 발달
1. 고려시대.(918~1392년)
2. 조선시대 초기.(1392~1544년)
3.조선 중기의 사군자화.(약 1550~1700년)
4. 조선후기의 사군자화.(약 1700~1850년)
5. 조선 말기의 사군자화.(약 1850~1910년)

4. 결론

본문내용

은은한 맛이 덜하나 힘차고 새로운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강세황은 사군자뿐만 아니라 인물, 산수 등 여러 분야에 세련된 기법을 보이는 사대부이다. 위에 두 사람이 18세기를 대표한다면 18세기 말과 19세기 전반기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신위, 김정희, 조희룡을 들 수 있다.
신위의 묵죽은 먹의 농담 변화가 여러 층이며 대나무 잎을 그린 필치가 좀 더 부드럽고 바위나 토파 역시 오진 양식에 기초를 둔 부드러운 필치로 되어 있어 남종화의 영향을 보여준다. 이때의 문인 화단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한 김정희는 묵란, 묵죽에 서예의 기법을 적용시킬 것을 한번더 강조하여 필의 획과 묵란 획을 동일시하였고 또한 문인정신의 표현인 석권기를 강조하였다. 그가 남긴 많은 묵란, 묵죽, 특히 힘차게 뻗어나간 난엽은 추사체 글씨와 더불어 기괴한 일면을 보인다. 김정희의 영향을 많이 받은 조자룡은 난초나 대나무에서는 스승에 미치지 못하나 묵매에는 단연 후기의 제일로 꼽을 만 하다. 그의 묵매는 중기의 묵매화 구도에서 탈피하여 좁고 긴 화폭에 두세 번 크게 굴곡지며 힘차게 올라가는 굵은 둥치를 중심으로 하여 많은 잔가지에 꽃이 달린 화려한 구도를 이루었다. 매화꽃은 윤곽선을 그린 것, 몰골법 묵매, 홍매 등 다양하며 수간도 비백법과 윤묵 획이 조화를 이룬다.
묵국도 <개자도원화전>의 본을 따라 많이 그려졌을 것으로 추측되나 죽, 매, 난에 비해 유작의 수가 훨씬 적다. 그 중 문인화가 이인상의 <병국도>는 강한 표현력을 가진 섬세한 필치로 작가 자신의 생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문인 묵국의 대표로 꼽을 수 있다.
5. 조선 말기의 사군자화.(약 1850~1910년)
김정희의 영향으로 19세기 중기에는 이미 토대를 굳힌 남종화풍은 말기에도 계속 강세를 보이며 20세기 초까지 계속된다. 이 때는 사군자 중 난초가 가장 유행하였다는 인상을 주나 실제로는 매, 난, 국, 죽 모두 상당히 보편화되어 왕공사대부, 화원 등의 많은 화가들이 즐겨 그렸다. 따라서 그림 양식도 필연적으로 다양성을 띠게 되었다. 대표적인 사대부 화가들은 묵매, 묵란을 많이 그린 허유, 난초로 유명한 흥선 대원군 이하응, 그의 양식을 답습한 이응원, 이들과는 좀 색다른 묵란을 그린 민영익, 묵죽으로 뛰어났던 김규진 등이 특기할 만 하다. 화원으로는 장승업 등을 들 수 있다. 허유과 이하응의 난초 중 많은 작품이 길고 좁은 배치이고 이에 따라 특수한 구도가 성립된다. 즉 난초 두 세포기를 화폭의 아래위로 대각선에 위치해 배치하고 이들이 절벽이나 바위로부터 옆으로 늘어진 모습을 많이 그렸다. 이와 같은 구도는 그 이전의 것에 비해 훨씬 동적이며 활달하게 뻗어 내려간 난엽과 더불어 전체에 활기를 부여한다. 민영익의 난초는 篆書의 획을 상기시키며 난엽이 거의 직각으로 한번 꺾이는 특수한 모습을 보인다. 이는 명말, 청초의 화가 도제의 난초와 비슷하다. 민영익이 중국으로 망명하여 중국 문인 화가들과 직접 교류한 일이 있기는 한데 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말기 묵죽의 대표자라고 할 만한 김규진은 여러 종류의 대나무를 골고루 그렸다. 가장 특징 있는 것은 무성한 잎이 많이 달린 굵은 왕죽인데 죽간을 처음부터 끝까지 윤묵으로 곧게 뻗어 올리고 마디 사이에 간격을 최소로 남겨 대나무에 곧은 인상을 강조한 듯 하다. 그 밖에도 달밤의 죽림을 자연주의적 경향이 짙게 변화 많은 먹의 농담으로 표현한 그림도 있다. 그는 또한 자신의 호를 따라 지은 <매강묵죽보>도 남겼다.
묵매는 화원들 사이에 많이 그려진 듯하며 양기훈, 장승업 등의 유작이 많이 있다. 양기훈의 그림은 전대의 그림에 비하여 좀 더 기교를 부려 지나치게 인위적이라는 느낌을 주는 복잡한 가지의 배치를 보이다. 사대부 묵매 화가로는 허유, 김규진 등을 들 수 있으며 이들은 소품으로 꽃의 크기가 강조된 특징 있는 그림을 남겼다. 그러나 말기에 묵매는 대체로 중국 화본의 영향에 많이 의존한 탓인지 복잡한 꽃술, 점의 지나친 사용 등으로 간결한 맛을 잃고 있다. 묵국도 화본의 영향을 많이 나타내고 있으나 화원 유숙의 그림에서는 화본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난 신선한 국화를 보게 된다.
6.결론.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군자화는 그 주제의 상징성과 화법과 직접 연관되는 기법의 특성으로 인하여 일찍이 오대와 북송 시대부터 시작하여 현대에 이르기까지 문인들이 즐겨 그린 화목이었다. 매, 난, 국, 죽이 각각 묵화로 발달하는 시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몽고족의 치하인 원대에 와서는 한대 문인들이 무언의 저항 수단으로 사군자를 많이 그리게 되어 이때부터는 더욱 그 의미가 깊어졌다. 명말, 청초에는 양주나 남경의 여러 화가들이 사군자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꽃 그림을 통하여 자신들의 감정을 표현하기에 이르러 전대와는 좀 색다른 사군자화 들이 많이 그려졌다. 그러나 근세에 올수록 사군자는 산수화를 제쳐놓고 문인 화가들의 최상의 표현 수단이 되고 있음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중국의 사군자화의 영향으로 발달한 한국사의 사군자화는 조선 시대 중기부터 독자적 양상을 보이게 된다. 즉 중기의 사대부화가 이정, 오달제, 어몽룡 등은 조선 시대 묵매, 묵죽화의 양식적 전통을 수립하게 되었다. 후기에 들어오면서 조선시대 사군자화는 질과 양의 모든 면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긴다. 이때가 바로 회화사 전반에 걸쳐 진경산수, 풍속화 등 한국적인 회화의 발전을 보게 된 시기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김정희, 조희룡을 정점으로 하여 말기의 사군자화는 약간 수그러진 듯 하나, 김규진, 민영익의 묵죽, 강세황의 묵매, 허유, 민영익, 대원군 등의 묵란에서 새로운 구도와 필치에 의한 시대적 감각의 표현이 나타난다.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묵국화는 매, 죽, 난에 비하여 훨씬 덜 그려졌으나 중기 이후의 사대부 화가들의 작품 또는 말기 화원들의 작품이 다수 전한다.
현대 화단에서는 사군자화가 마치 동양화를 그리는 여기화가들이 손쉽게 기법을 습득해서 그릴 수 있는 화목으로 착각되고 있는 느낌이지만 역시 그 불변의 상징성과 더불어 동양 문인화의 정신을 대표하는 화목으로 간주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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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9.25
  • 저작시기20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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