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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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로마제국이 유럽형성에 미친 영향에 대해 서술하시오

2. 유럽의 사회보장제도를 설명하시오

3. 유럽의 교육제도와 대학교육에 대해 설명하시오

4. 유럽석탄철강공동체의 설명과 내용에 대해 설명하시오

본문내용

표하면서 시작되었다. 슈망은 '서유럽의 석탄과 철강자원을 모든 관련국가들과 새로운 초국가적(超國家的) 정부(政府)가 공동행동을 취함으로써 공동으로 출자되고 관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중공업분야에서 모든 관세를 점진적으로 철폐하려는 목적을 포함하고 있었고, 궁극적으로 정치공동체(政治共同體)로 향하는 첫 단계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슈망플랜은 석탄과 철강생산의 단순한 협력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할 것이다. 슈망의 이 제안에 유럽통합에 적극적이었던 서독,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가 동조하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초국가적 정부의 창출에는 열성적으로 지지하면서도 그 초국가적 기구가 얼마나 많은 권력을 가질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불안해하고 있었다. 결국 새로운 초국가적인 조직내에서 참가국들의 이익을 대표할 어떤 권위있는 기구가 있어야 한다는 초국가주의(超國家主義)와는 대리되는 제안이 나오기에 이르렀다.
그런 제안이 나오기는 했지만, 영국은 여전히 무관심했다. 영국은 초국가적 정부의 원칙 자체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었다. 영국은 노동당이나 보수당 모두 유럽대륙국가들의 초국가적 공동체 구성에 참여할 의사가 없었다. 적극적인 방해시도를 벌이지는 않았지만 그냥 무관심했다. 덴마크 등 북유럽국가들도 영국을 따랐다. 프랑스, 벨기에, 서독, 이탈리아,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6개국은 오랜 토론과 협상과정을 거쳐 경제적으로는 공동시장(共同市場, Single Market)을 형성하고 정치적으로는 초국가적 기구의 틀을 창출하자는데 의견일치를 보았고 1951년 4월 18일 조약은 서명되었다. 이 조약을 우리는 '파리조약(Treaty of Paris)' 또는 'ECSC 조약'으로 부른다. 파리조약은 각국에서 반대에 부딪혔지만, 비준에 성공하였고 ECSC는 1952년 7월부터 본격적인 가동에 들어갔다.
지금으로부터 49년 전인 1950년 5월 9일은 로베르 슈망 당시 프랑스 외무장관의 '슈망선언' 발표를 기념하는 날이다. 슈망선언은 독일과 프랑스의 석탄과 철강분야를 공동시장화(共同市場化) 하자는 제안으로 당시로서는 충격적이었다. 그로부터 35년 후인 1985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개최된 EU 정상회담에서 유럽 각국 지도자들은 5월 9일을 '유럽의 날'로 정한다고 선포했다. 슈망선언이 없었다면 오늘날 통합된 모습으로서의 유럽은 불가능했거나 지금보다 훨씬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실제로 슈망선언이 있은 다음해인 1951년 독일,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 6개국은 파리에서 앞으로 운명을 같이 할 제도적 기초를 마련한 ECSC 조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ECSC는 유럽연합(EU)내로 흡수된 3개 EC 기구중 첫번째 공식 기구로 탄생하게 되었다. 이 같은 작은 출발은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유럽통합의 대성공을 이끌어내는 밑거름이 되었다. EU의 경제적 통합은 사실상 완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유럽연합(EU)의 토대를 마련한 두 공동체인 '유럽경제공동체(European Economic Community, EEC)'와 '유럽원자력공동체(European Atomic Energy Community, EAEC 또는 Euratom)'의 탄생도 ECSC의 근간에 기초한 것이다.
ECSC 조약의 일반적인 목표는 석탄과 철강의 공동시장 형성을 통해 회원국들의 경제성장, 고용증대, 그리고 생활수준 향상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ECSC는 우선 관세와 다른 무역제한 조치를 제거해야 했고, 그래야만 자유로운 공동시장을 설립하려는 계획이 추진될 수 있었다. 이러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ECSC는 몇 개의 기구를 설치하였다. 최고관리청, 공동의회, 전문각료이사회, 유럽재판소 등이다. 조약의 입안자들은 최종적으로 ECSC의 구조를 법의 지배 안에 뿌리내리게 함으로써 유럽통합을 위해 전체적으로 하나의 중요한 개념을 도입하였다.
초기 ECSC는 여론을 도외시함으로써 유럽인들의 이상이 확대될 수 있는 기반이 약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행동했고, 각국 정부들이 인기없는 결정사항들을 ECSC에 떠넘겼기 때문에 이러한 관행은 더욱 심해졌다. 이러한 태도는 조약의 모호성과 더불어 ECSC의 발전을 더디게 하였다.
6 개국 상호 무역이 ECSC 설립 이후 많은 성장을 한 것은 사실이나, 이것이 서유럽의 경제발전에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ECSC 덕분인지 명확하지 않다. ECSC의 어려움은 근본적으로 정치적인 것이었다. 비록 6개국이 초국가적 기구의 설립에 열성적이었지만, 여전히 주권(主權)―전체가 아닌 일부라도―을 이양한다는 것에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ECSC는 새로운 경제질서를 수립하는 일에 용감하게 전념할 수 없었다. 각국의 반대와 비타협적인 태도와 싸워야 했으며, 각 국가간에 상이한 국내정책들과 차이점들과도 싸워야 했다. 실례로 1955년까지 벨기에의 석탄과 이탈리아의 철강은 국가의 보호를 받았으며, 차별적인 석탄수입을 내용으로 하는 프랑스의 수입 허가제에 ECSC가 승리를 거둔 것은 1961년이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ECSC는 다소간 성공을 거두었다. 전체적으로 ECSC의 시도들은 과도기간이 끝날 때까지 많은 제한적인 관행들을 제거함으로써 경제적인 경쟁력의 토대를 강화했다. 또, ECSC는 노후한 석탄·철강 공장에 대한 경제적 쇠퇴의 부담을 완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공동의 목적을 위해 각국의 이익을 무시함으로써 회원국들의 불만이 가중되었고, 초국가기구(超國家機構)의 한계성이 1959년에 명확히 드러났다. 그 직접적인 원인은 따뜻한 겨울과 완만한 경제성장으로 인해 초래한 막대한 잉여 석탄에 ECSC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원국들은 ECSC 회원국들을 포함하여 석탄 수입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고, 이 때문에 공동시장이라는 ECSC의 목표가 흔들리게 되었다. 그러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설립된 초국가기구가 해결하지 못함으로써 ECSC는 권위에 손상을 입게 되었고, 유럽통합이라는 이상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단일 경제부문에서조차 행동을 조화시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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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6페이지
  • 등록일2006.07.02
  • 저작시기2006.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54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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