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사] 신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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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독립운동사] 신간회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序 言

Ⅱ. 신간회 창립 과정
1. 신간회 창립의 배경
1) 민족주의 세력의 형성
2) 사회주의 세력의 재편
3) 민족주의 세력의 분화
4) 사회주의 세력의 변천
2. 신간회의 창립과 변모
1) 민족주의 좌파의 신간회 운동론
2) 정우회선언
3) 민족주의 좌파의 신간회 운동론
4) 민족주의 좌파와 신간회, 신간당
5) 사회주의 세력의 변동
6) 코민테른의 방침 변화

Ⅲ. 신간회의 활동
1. 신간회의 활동
⑴ 일제의 정기대회 불허가
⑵ 모호한 강령
⑶ 신간회 본부의 간부진성격
2. 복대표대회
3. 신간회 지회의 활동
4. 신간회 지회의 특징

Ⅳ. 小 結

참 고 문 헌

본문내용

따른 임금인하는 당시 노동자들의 삶을 크게 위협하는 요소가 되었다. 당시 조선의 전체 노동자 인구가 약 14만여 명에 머물고 있는 것에 비하여 볼 때 1930~1931 년의 노동쟁의 참가인원수는 전체 노동자의 10%를 넘는 심각한 수준이었으며, 이같은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신간회 같은 단체가 자신들의 투쟁에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신간회는 그럴 수 있는 능력도, 합법상의 단체라는 점에서 오는 투쟁적 역량이나 의지도 없었으며, 이는 위로부터가 아닌, 아래, 즉 지회로부터 먼저 신간회 해소논쟁을 불러오는 주요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여기서 신간회는 노동문제에 누구보다도 민감한 사회주의자들이 본부나 지회 양쪽에 대거 간부진으로 위치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대의 현안문제이던 노동문제에 대한 대처 및 방침이 미흡함으로써 신간회의 해소론이 제기되기 시작한다. 이는 노동파업이 그 어느 곳보다도 많았던 부산지회에서 1930년 12월 6일 신간회 해소를 최초로 주장하고, 이같은 의견에 동조하여 이후 해소론이 광범위하게 퍼져나간 것으로 충분히 증명될 수 있는 사항이다. 실제로 신간회는 식민지 조선민중의 정치적, 사회적 교육 및 계몽활동과 아울러 일제 통치세력에 일정한 압력수단이 될 수 있는 단계의 민족협동전선으로서 그 의의와 한계를 동시에 드러내고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신간회 내부에서의 정책 및 방침을 당시 민중들이 가장 열망하던 정치적 투쟁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신간회관계자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 해결방안을 모색했고, 그 일환이자 가장 설득력 있는 방법으로 해소론을 제기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다가 1930년 들어 개량주의적 민족주의성향을 띄고 있는 김병로 등의 신간회 본부 장악, 그리고 그에 잇따른 개량주의자들의 신간회 가입은 신간회를 더 이상 처음의 설립취지와는 맞지 않는 단체로 만들게 되었고, 신간회는 복대표대회이후 또 하나의 중대한 전환점을 맞지 않으면 안되는 시기에 이르렀다.
Ⅳ. 小 結
신간회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 즉 ‘신간회는 무엇이었나’를 설명하기 위한 많은 연구성과들은 신간회의 창립에서부터 해체에 이르는 기간을 추적하고 밝혀내어 하나의 모습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그 결과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신간회의 외적 형태인데, 이를테면 신간회는 일제의 ‘문화통치’ 시기에서 창립되어 1931년 ‘민족말살정책’이 시작될 무렵까지 4만여 명의 회원수와 4년 3개월 동안 지속된 기간을 통틀어 당대 최장기간 지속된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단체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많은 연구결과 속에서 발견되는 하나의 공통적인 전제가 있다. 그것은 ‘신간회는 (안타깝게도) 해체되고 말았다’는 아쉬움이다. 신용하(2002)나 강만길(1985)같은 연구자들은 그 아쉬움을 승화시켜 ‘신간회가 가지는 민족협동전선(혹은 통일전선)으로서의 위치’에 높은 평가를 내리며, 동시에 신간회의 ‘해소’를 ‘코민테른의 지령을 받은 사회주의자들의 분열 책동’이 원인이었던 것으로 본다. 이것이 민족주의에 취합하는 연구결과라면 미즈노 나오키(1988), 이균영(1993), 그리고 근래의 사회주의 연구자들은 ‘코민테른의 지령이 신간회를 해체시켜야 한다고 명시한 것이 아니었고, 조선의 사회주의ㆍ공산주의 세력이 그 지령을 맹목적으로 수용한 것도 아니었다’고 반박하는 입장을 보인다.
신간회를 구성하였다고 알려진 민족주의 좌파에 대하여 상충되는 두 연구자의 관점을 비교함으로써 이 글에서는 그 개념의 허구성에 보다 접근해갈 수 있었다. 민족주의 세력은 그 분화에 있어서 뚜렷한 근원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다만 하나의 정치적 선택으로서 對自的으로 형성되었던 것이며 그렇기에 그들을 몇 개의 그룹으로, 혹은 몇 개의 공통된 범주로서 구분지어 민족주의 좌파라 칭하는 것은 철저하지 못한 견해라는 것이 그 결론이 될 것이다.
또한 신간회의 창립에서 드러나는, 민족협동전선에 대한 여러 세력들의 각기 다른 이해는 신간회 자체가 하나의 정립된 정체성을 가질 수 없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신간회를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민족운동단체’로서 인식하고자 한다면 그 정체성을 명확히 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제시되어온 여러 연구들은 오히려 신간회가 하나의 단체로서 정체성을 확립시키지 못하였다는 결론으로 우리를 이끈다.
이 글에서는 신간회가 정체성을 갖지 못한 단체였다는 것이 어떻게 ‘해소’로 이어지는가에 대하여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그러나 창립 이전에는 물론 그 이후에도 참여한 여러 세력들이 가진, 신간회에 대한 불분명한 이해와 복대표대회 이후 구체적인 활동과 연계되지 못한 신간회의 강령으로부터 우리는 하나의 유추를 건질 수 있다. 이를 말하자면 신간회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이해와 관심을 함께 갖고 있는 조직은 스스로 목적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 결론을 얻기 위하여 연구하여야 할 목표가 ‘신간회는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 아니라 ‘신간회는 왜 무엇도 되지 못했는가’에 대한 답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참 고 문 헌
강만길 外, 『통일지향 우리민족해방운동사』 역사비평사, 2000
강재순 「신간회 부산지회와 지역사회운동」 지역과 사회 제 1호, 1996
김경일 「일제하 노동운동의 전개와 발전」 『한국사 15 민족해방운동의 전개』 한길사, 1994
김종식 「근대 일본 보통선거논의의 전개와 그 귀결」 수선사학회, 성대사림, 2002
박종린 「1920년대 통일 조선공산당의 결성과정」 한국사연구회, 한국사연구, 1998
이윤갑 「일제하 경상북도 지역의 신간회 지회운동」,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04
이현주 「신간회운동 연구의 성과와 과제」 한국근현대사학회, 한국근현대사연구 제2집, 1995)----- 「신간회의 창립과 조직」한국현대사연구회 근현대사강좌 제 4호
이현희 「신간회의 조직과 항쟁」 사총 15, 16 합집, 1971
최규진 「1920년대 말 30년대 초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신간회 정책」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대동문화연구, 1997
미즈노 나오키(水野直樹) 「코민테른의 민족통일전선론과 신간회운동」, 역사문제연구소, 역사비평 2집,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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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11.26
  • 저작시기20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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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77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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