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사회사(사회변동과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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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교회의 사회사(사회변동과 기독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0. 사회변동과 기독교
1.1 3.1원동 이후의 사회 및 사조의 변화
사상의 격동
사회의 격동
1.2 농민생활의 궁핍화
농민궁핍의 실상
한국 기독교의 계시록
2 사회,공산주의가 침투
2-1. 그 침투경로
기독교의 공산주의 인식도
기독교안의 일부 동요
2-2 반기독교운동
공산주의의 기독교 박해
공산주의 기독교 박해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반응
2-3 국외에서의 기독교 박해
2-4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대결구도

본문내용

에 던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들은 교회당을 정치선전장으로 이용하자는데 불응한 교직자들을 살상하고 있었다. 1931년 동만 지방에서는 교회당 13처가 방화로 파괴되고 4인의 교인이 피살되었다. 1931년 찌린 에서는 최태봉 외 7인 순교, 1932년 9월 15일에는 남만 마련둔에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헨더슨(L. P. Henderson)이 일본군의 총에 맞아 순교하였다. 1932년 10월 14일에는 간도 화첨자 종성도에서 장로 김영국과 목사 김영진 형제가 반동분자라는 누명을 쓰고 “탈피(脫皮)참살”을 당하였다. 공산당들은 두 형제를 포박하고 “너희들 예수교인은 아편흡연자와 같이 인류에게 해독을 끼치는 종교에 중독”되었다고 하면서 그렇게 참살하였는데, 그들은 김영국의 “고환까지 빼어갔다.” 30여 무장 공당에게 김목사 형제 피살, <기독신보>, 1932. 11. 9일자.
고 한다 민경배, op. cit., pp. 295 - 296. 인용구 참조.
1933년 1월에 시베리아 감리교의 김영학 김영학 [金永鶴, 1877~1933] 한국의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소련 감옥에서 복역 중 옥사하였다
목사는 순교의 면류관을 썼고, 1935년 1월 1일 만주 오소리 다목동 호림에서 장로교 목사 한경희가 비족 공산당 40여 명에게 붙잡혀 얼어붙은 오소리 강 구멍에 던져져서 순교하였다. 한경희 목사의 참변을 슬퍼함, <기독신보>, 1935. 2. 20일자.
1936년 조선예수교 장로회총회는 북만교회가 겪은 공산당으로부터의 피해를 조사하도록 송창근 송창근 [宋昌根, 1894.10.5~1950.8] 한국의 장로교회 목사로 부산에서 성빈학사(聖貧學舍)를 설립, 가난한 학생들을 뒷바라지하는 사회·장학 사업을 하였다. 그는 형식주의적 신학을 비판하며 직접 부산항의 윤락가에 뛰어들어 성 프란체스코의 청빈을 실천하였다.
을 한 달 동안 파견한 일이 있었다. 민경배, op. cit., pp. 297 - 298. 인용구 참조.
1933년 공산당 활동이 뜸해진 것으로 대개 말하지만 시베리아와 간도에서의 교회 피해는 계속 늘어갔고, 그런 만행이 점차 시들어간 것은 다만 1937년 이후의 일로 보였다. Ibid., p. 298.
2.4.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대결구도
교회는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별개의 것이라는 논리를 체계화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세 가지로 요약하면,
첫째, 기독교는 절대로 인류의 자유와 자조력을 저하하지 않는다는 것.
둘째, 기독교는 자본가 옹호가 아니란 것, 기독교의 공형(共亨)은 공산주의의 공산(共産)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
셋째, 기독교가 비과학적이라고 하나, 과학이 전능은 아니란 것,
무엇보다 앞서 정신적 혁신과 영적 갱생이 이루어지고 나서야, 그 다음 무엇이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민족의 영고성쇠(榮枯盛衰)가 실로 이제 기독교에 달렸다는 확신이 확고하게 서게 된 것이다.
기독교의 교세 분포와 공산주의운동의 분포 및 소작쟁의 지주(地主)와 소작인(小作人) 사이에 소작료(小作料)와 경작권(耕作權), 그 밖의 소작권(小作權) 관계(關係)에 관(關)하여 일어나는 이해(利害) 상(上)의 다툼질
의 지역적 분포를 견주어 기독교회의 사회적 기능을 가늠해 보고자 한다.
도 별
발생건수
관계지주수
관계소작인수
관계면적
해결건수
경 기
3
12
332
불명
3
전 남
24
224
1.620
71
21
경 남
105
241
3.107
695
97
황 해
7
17
650
불명
6
평 남
12
26
278
52
10
공산주의의 지도급 인사들의 지역별 분포는 1926년 제 2차 공산당사건 때에 검거된 숫자로 보면, 남한에 300명, 북한에 45명, 국외가 130명의 분포비례였다. 북한이 간도나 시베리아 접경지역이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 6.7:1의 비율은 곧 기독교 교세의 분포구도와 절대 무관하지 않으며, 곧 복음의 씨앗이 파종된 곳에서 공산주의는 그 기를 펼 수 없었다는 것이 입증된 것이다.
공산주의가 영남 호남지방에 특히 다수 퍼져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소작인이 아닌 대지주의 자녀들이 그 부유 때문에 특권층으로, 일본에 다수 유학을 할 수 있었고, 일본 지식인 사회, 특히 대학사회에 광풍처럼 유행하던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어져, 이를 도입한 것으로 분석된다. 한국 공산주의는 최소한도 국내 남한에서는 대지주들과 부호(富豪) 부르주아 2세대의 공산주의였다. 곧 지식 부르주아의 시대사상이었다. 민경배, 한국교회의 사회사(1885-1945), op. cit., pp. 298 - 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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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09.11.15
  • 저작시기20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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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61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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