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목 차
Ⅰ. 서론
1. 연구 목적
2. 선행 연구 검토
2.1. 목간의 정의
2.2. 목간의 출토 현황
2.3. 목간의 국어학적 가치
3. 연구 방법 및 범위
Ⅱ. 경주 월성해자 149호에 나타난 문법체계
1. 판독과 해석
2. 어미의 쓰임
2.1. 선어말 어미의 쓰임
2.2. 종결어미 ‘之’의 쓰임
3. 조사의 쓰임
4.1 주격조사 ‘-께서’
4.2 보조사 ‘-(으)ㄴ/는’
Ⅲ. 함안 성산산성 목간 속의 문법체계
1. 판독과 해석
2. 고유명사 표기를 통한 접미사의 쓰임
2.1. 지명․인명 접미사
2.2. 파생접미사 ‘-엉/앙’, ‘-억/악’
Ⅳ. 부여에서 출토된 목간에 나타난 문법체계
1. 판독과 해석
2. 처격조사 ‘中’의 쓰임
Ⅴ. 결론
<참고문헌>
Ⅰ. 서론
1. 연구 목적
2. 선행 연구 검토
2.1. 목간의 정의
2.2. 목간의 출토 현황
2.3. 목간의 국어학적 가치
3. 연구 방법 및 범위
Ⅱ. 경주 월성해자 149호에 나타난 문법체계
1. 판독과 해석
2. 어미의 쓰임
2.1. 선어말 어미의 쓰임
2.2. 종결어미 ‘之’의 쓰임
3. 조사의 쓰임
4.1 주격조사 ‘-께서’
4.2 보조사 ‘-(으)ㄴ/는’
Ⅲ. 함안 성산산성 목간 속의 문법체계
1. 판독과 해석
2. 고유명사 표기를 통한 접미사의 쓰임
2.1. 지명․인명 접미사
2.2. 파생접미사 ‘-엉/앙’, ‘-억/악’
Ⅳ. 부여에서 출토된 목간에 나타난 문법체계
1. 판독과 해석
2. 처격조사 ‘中’의 쓰임
Ⅴ.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파(巴)’(단양 적성비)> ‘~지(知), ~차(次), ~지(之), 리(利)(남한신성비)’> ‘~지(智), ~지(支), ~리(利)(영일 냉수리비)’≒‘~리(利), 지(支), ~혜(兮)’(명활산성비)의 순이므로 이 목간들에 쓰인 인명 접미사의 종류가 가장 다양함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함안 성산산성 목간의 성격상 신라 각지에서 보내어진 목간들이 수하된 결과라는 점에서 어쩌면 당연한 현상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종전에 비하여 훨씬 많은 수의 접미사 용례들을 확보 권인한, 『동아시아 자료학의 가능성』,「함안(咸安) 성산산성(城山山城) 목간(木簡) 속의 고유명사 표기에 대하여」,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9, p. 258
함으로써 신라어 나아가 고대국어의 문법체계를 풍부하게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다음은 상위지명에 나타난 후부 접미사의 분류이다.
㉠ ~城
甘文城<2_앞>, 及代城<8, 42, 74, 80>, 陳城<13, 41>, …巴珍兮城<60_앞>,
…乃節七家城<61+75+90_앞>
㉡ ~伐
仇利伐_앞, 3, 4, 5, 33, 34, 36>, 仇伐, 52>, …伐
㉢ ~無表示
古<20_앞, 28_앞, 29_앞, 31_앞>, 鄒文<39, 54>
위에서 무표시의 예로 제시된 ‘고타(古)’와 ‘추문(鄒文)’의 경우는 그 뒤에 ‘~촌(村)’이라는 하위 지명이 이어진다는 점에서 상위 지명임은 분명하나 그들의 후부 요소가 ‘城’인지, ‘伐’인지 아니면 제3의 요소인지 분명히 하기는 어렵다. ‘추문’의 예는 단양 적성비(550?)에 ‘추문촌(鄒文村)’으로 나와 있음이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거니와, 6세기 중 후반으로 추정되는 이 목간의 제작 연대와 비교하여 불과 몇 십 년 사이에 ‘村’이 ‘城’이나 ‘伐’로의 승격이 가능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사학계의 의견이 중요하다.
‘고타’의 경우는 『삼국사기』에 ‘고타(야)군(古(耶)郡’으로 나옴으로써 상위지명임은 분명한 듯하나, 그 후부 요소가 ‘城’이나, ‘伐’인지, 아니면 ‘郡’인지에 대해서는 권인한, 『동아시아 자료학의 가능성』,「함안(咸安) 성산산성(城山山城) 목간(木簡) 속의 고유명사 표기에 대하여」,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9, p. 246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다.
다음은 하위지명에 나타난 접미사의 분류이다.
㉣ ~村
上者村<1_앞, 3, 34>, □□村<2_뒤>, 干好□村<7>, 居□旦利村<10>,
烏欣彌村<11>, 上谷乃村<12, 44>, 大村<14>, …□家村<15>, …前谷村<17>, 屈仇□□村<21_앞>, …村□<24>, 伊骨利村<28_앞>, 新村<29_앞>,
□村<29_앞>, 一古利村<31_앞>, 上弗刀珍村<32_앞>, 谷村<33>,
比尸河村<39>, 河卜智村<40>, 陽村<43>, □□村<54>, …巴珍兮村<60_뒤>,
…小□谷支村<66+62_앞>, …□村<78>, …伊失兮村<85>
㉤ ~本波
甘文本波<2_앞, 10>, 須伐本波<77>
㉥ 無表示
伊骨利<20_앞>
지명 후부요소들이 생략되어 쓰일 만큼 그 쓰임이 일반화됨으로써 매우 높은 정착성을 보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에 제시된 ‘이골리촌(伊骨利村)’의 ‘-村’이 생략된 표기로 볼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근거의 하나가 된다. 위의 책, p.257
제한된 공간에 서사에 임해야 하는 목간의 특성상 생략 표기는 일반적인 현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村’의 생략은 성산산성 공물을 납입하는 촌이 법적으로 규정된 공지의 사실이었기에 생략한 것이라는 근거도 있어서 충분히 생략가능하다고 본다.
2.2. 파생접미사 ‘-엉/앙’,‘-억/악’
다음은 함안 성산산성 06-w40호에 나와 있는 목간의 내용이다.
1면: ▣二▣丁十一 村
4면: 卄二益丁四 村
4면의 첫글자는 ‘’로 판독하고 부식(副食)이나 약재(藥材)로 이용되는 ‘마(薯), 山藥)’에 대응시킨다. 이 ‘’의 전통적인 음은 ‘마’이고, 서여(薯)나, 산약(山藥)을 지칭하는 15세기 어형은 ‘맣’이다. 이 둘의 음상에 큰 차이가 없다는 점과 삼국시대에 서동설화(薯童說話)가 널리 유행한 적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이 대응을 가정할 수 있다. 15세기의 ‘맣’는 ‘*막’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후내입성자(喉內入聲字)가 후대(後代)에 ‘ㅎ’으로 약화되는 일이 적지 않은데 이것을 거꾸로 적용하면 ‘*막’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독법에 따르면 뒤에 오는 ‘益丁’도 곡명(穀名)이나 식물명(植物名)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益丁’이 15세기의 ‘더덕(蔘)에 대응한다는 가정이 성립한다.
‘益’은 ‘더으->더하-’의 ‘더’로 훈독(訓讀)하고 ‘정(丁)’은 ‘뎡’으로 음독(音讀)하면 ‘益丁’은 ‘*더뎡’으로 재구된다. 이 ‘*더뎡’과 ‘더덕’의 음상 차이가 너무 크다고 지적할 수 있으나, ‘구멍(穴)’의 방언형에 ‘구먹’이 있다는 점과 15세기의 ‘바당(低)’의 방언형에 ‘구먹’이 있다는 점과 15세기의 ‘바당(低)’이 현대어에서 ‘바닥’으로 변화하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음상 차이는 결코 큰 것이 아니다. 또한 파생접미사 ‘-엉/앙’과 ‘-억/악’은 언어학적으로 의미 차이가 거의 없다. 따라서 이 명사의 어기(語基)를 ‘*더디’라 하고 여기에 파생접미사 ‘*-엉/앙’이 통합된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기본형 ‘*더디+엉’에서 /i/ 모음삭제규칙이 적용되면 ‘*더덩’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더뎡’이 된다. 이러한 음운론적 기술이 아주 자연스러우므로 고대의 어기 ‘*더디’와 파생접미사 ‘*-엉/앙’을 재구할 수 있다.
3면 : 器尺一石《함안 성산산성 목간 06-w11호》
이것의 ‘器尺’은 뒤에 오는 ‘一石’으로 보아 곡 곡명(穀名)의 일종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 ‘器尺’에 15세기의 ‘기장(黍)’이 대응한다고 가정할 수 있다. ‘기장’은 기자(箕子)가 도래하여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세울 때에 가져온 곡물이라는 설화가 전해질 만큼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다. 이 설화의 진실 여부는 밝히기 어렵지만 ‘기장’과 ‘箕子’의 음상이 유사하여 이 설화가 널리 퍼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尺’의 한자음은 원래 후내입성자(喉內入聲字)였으나 한국에서 독자적으로 ‘ㄱ>ㅎ’의 변화를 겪어 15세기에 ‘
함으로써 신라어 나아가 고대국어의 문법체계를 풍부하게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다음은 상위지명에 나타난 후부 접미사의 분류이다.
㉠ ~城
甘文城<2_앞>, 及代城<8, 42, 74, 80>, 陳城<13, 41>, …巴珍兮城<60_앞>,
…乃節七家城<61+75+90_앞>
㉡ ~伐
仇利伐_앞, 3, 4, 5, 33, 34, 36>, 仇伐, 52>, …伐
㉢ ~無表示
古<20_앞, 28_앞, 29_앞, 31_앞>, 鄒文<39, 54>
위에서 무표시의 예로 제시된 ‘고타(古)’와 ‘추문(鄒文)’의 경우는 그 뒤에 ‘~촌(村)’이라는 하위 지명이 이어진다는 점에서 상위 지명임은 분명하나 그들의 후부 요소가 ‘城’인지, ‘伐’인지 아니면 제3의 요소인지 분명히 하기는 어렵다. ‘추문’의 예는 단양 적성비(550?)에 ‘추문촌(鄒文村)’으로 나와 있음이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거니와, 6세기 중 후반으로 추정되는 이 목간의 제작 연대와 비교하여 불과 몇 십 년 사이에 ‘村’이 ‘城’이나 ‘伐’로의 승격이 가능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사학계의 의견이 중요하다.
‘고타’의 경우는 『삼국사기』에 ‘고타(야)군(古(耶)郡’으로 나옴으로써 상위지명임은 분명한 듯하나, 그 후부 요소가 ‘城’이나, ‘伐’인지, 아니면 ‘郡’인지에 대해서는 권인한, 『동아시아 자료학의 가능성』,「함안(咸安) 성산산성(城山山城) 목간(木簡) 속의 고유명사 표기에 대하여」,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9, p. 246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다.
다음은 하위지명에 나타난 접미사의 분류이다.
㉣ ~村
上者村<1_앞, 3, 34>, □□村<2_뒤>, 干好□村<7>, 居□旦利村<10>,
烏欣彌村<11>, 上谷乃村<12, 44>, 大村<14>, …□家村<15>, …前谷村<17>, 屈仇□□村<21_앞>, …村□<24>, 伊骨利村<28_앞>, 新村<29_앞>,
□村<29_앞>, 一古利村<31_앞>, 上弗刀珍村<32_앞>, 谷村<33>,
比尸河村<39>, 河卜智村<40>, 陽村<43>, □□村<54>, …巴珍兮村<60_뒤>,
…小□谷支村<66+62_앞>, …□村<78>, …伊失兮村<85>
㉤ ~本波
甘文本波<2_앞, 10>, 須伐本波<77>
㉥ 無表示
伊骨利<20_앞>
지명 후부요소들이 생략되어 쓰일 만큼 그 쓰임이 일반화됨으로써 매우 높은 정착성을 보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에 제시된 ‘이골리촌(伊骨利村)’의 ‘-村’이 생략된 표기로 볼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근거의 하나가 된다. 위의 책, p.257
제한된 공간에 서사에 임해야 하는 목간의 특성상 생략 표기는 일반적인 현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村’의 생략은 성산산성 공물을 납입하는 촌이 법적으로 규정된 공지의 사실이었기에 생략한 것이라는 근거도 있어서 충분히 생략가능하다고 본다.
2.2. 파생접미사 ‘-엉/앙’,‘-억/악’
다음은 함안 성산산성 06-w40호에 나와 있는 목간의 내용이다.
1면: ▣二▣丁十一 村
4면: 卄二益丁四 村
4면의 첫글자는 ‘’로 판독하고 부식(副食)이나 약재(藥材)로 이용되는 ‘마(薯), 山藥)’에 대응시킨다. 이 ‘’의 전통적인 음은 ‘마’이고, 서여(薯)나, 산약(山藥)을 지칭하는 15세기 어형은 ‘맣’이다. 이 둘의 음상에 큰 차이가 없다는 점과 삼국시대에 서동설화(薯童說話)가 널리 유행한 적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이 대응을 가정할 수 있다. 15세기의 ‘맣’는 ‘*막’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후내입성자(喉內入聲字)가 후대(後代)에 ‘ㅎ’으로 약화되는 일이 적지 않은데 이것을 거꾸로 적용하면 ‘*막’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독법에 따르면 뒤에 오는 ‘益丁’도 곡명(穀名)이나 식물명(植物名)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益丁’이 15세기의 ‘더덕(蔘)에 대응한다는 가정이 성립한다.
‘益’은 ‘더으->더하-’의 ‘더’로 훈독(訓讀)하고 ‘정(丁)’은 ‘뎡’으로 음독(音讀)하면 ‘益丁’은 ‘*더뎡’으로 재구된다. 이 ‘*더뎡’과 ‘더덕’의 음상 차이가 너무 크다고 지적할 수 있으나, ‘구멍(穴)’의 방언형에 ‘구먹’이 있다는 점과 15세기의 ‘바당(低)’의 방언형에 ‘구먹’이 있다는 점과 15세기의 ‘바당(低)’이 현대어에서 ‘바닥’으로 변화하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음상 차이는 결코 큰 것이 아니다. 또한 파생접미사 ‘-엉/앙’과 ‘-억/악’은 언어학적으로 의미 차이가 거의 없다. 따라서 이 명사의 어기(語基)를 ‘*더디’라 하고 여기에 파생접미사 ‘*-엉/앙’이 통합된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기본형 ‘*더디+엉’에서 /i/ 모음삭제규칙이 적용되면 ‘*더덩’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더뎡’이 된다. 이러한 음운론적 기술이 아주 자연스러우므로 고대의 어기 ‘*더디’와 파생접미사 ‘*-엉/앙’을 재구할 수 있다.
3면 : 器尺一石《함안 성산산성 목간 06-w11호》
이것의 ‘器尺’은 뒤에 오는 ‘一石’으로 보아 곡 곡명(穀名)의 일종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 ‘器尺’에 15세기의 ‘기장(黍)’이 대응한다고 가정할 수 있다. ‘기장’은 기자(箕子)가 도래하여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세울 때에 가져온 곡물이라는 설화가 전해질 만큼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다. 이 설화의 진실 여부는 밝히기 어렵지만 ‘기장’과 ‘箕子’의 음상이 유사하여 이 설화가 널리 퍼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尺’의 한자음은 원래 후내입성자(喉內入聲字)였으나 한국에서 독자적으로 ‘ㄱ>ㅎ’의 변화를 겪어 15세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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