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정선과 조선후기 산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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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겸재정선과 조선후기 산수화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조선후기의 회화의 커다란 변화

1. 진경산수화와 실경산수화

2. 정선의 생애와 관련인물

3. 정선이 그려낸 여행지도


Ⅲ. 정선의 작품세계와 조선후기 화가들

1. <인왕제색도>

2. <금강전도>

3. <박연폭도>

4. 정선의 영향을 받은 조선 후기 화가들


Ⅳ. 맺는말

본문내용

진이와 유학자 서경덕, 그리고 화려한 절경을 자랑하는 박연폭포를 가리켜 ‘송도삼절’이라고 한다.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그려 낸 <금강전도>역시 정선의 대표작으로 빼놓을 수 없다. 이러한 <금강전도>, <인왕제색도>, <박연폭포>는 정선의 3대 명작으로 손꼽힌다. 이준구·강호성 편저, 앞의 책, p.36.
1. <인왕제색도>
정선의 작품 중에 으뜸으로 꼽는 것은 바로 <인왕제색도>이다. 이는 정선의 평생 친구이자 시 분야의 으뜸인 이병연을 위해 그린 그림으로 이병연이 죽음에 가까운 것을 알게 된 정선이 그와의 추억을 그린 그림으로 유명하다. <인왕제색도>는 정선이 76세에 그린 작품이라는 점에서 더욱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비 온 뒤 인왕산을 담은 모습으로 아직 물기가 가시지 않은 나무와 숲, 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순간을 잘 포착하여 그려내었다. 비 온 후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힘찬 붓질로 미끄러운 질감을 표현하고 있으며 산자락의 바위와 소나무가 웅장함과 박진감을 그대로 살려주고 있다. 이준구·강호성 편저, 앞의 책, p.36~37.
<인왕제색도>는 정선이 그린 그림 가운데 실경에 가까운 그림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인왕산 계곡 근처에 살았던 정선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기억 속에 인왕산 주변의 모습이 비교적 잘 기억났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인왕산의 전체 모습은 북악 기슭에서 멀리 본 모습이다. 그런데 주봉(主峯)은 시점을 이동시켜 인왕산의 중턱 옥류동(玉流洞)이 있던 옥인동, 곧 그림 속의 근경 저택에서 올려본 형태이다. 주봉의 오른편 성곽 너머 바위가 달린 봉우리는 창의문(彰義門)밖에서 보이는 형태를 끌어온 것이다. 왼편의 사직단 쪽 봉우리는 주봉과 떨어져 있는데도 거리를 좁혀 그렸다. 생략과 끌어당김, 멀리서 본 평시(平視)와 가까이에서 올려다본 앙시(仰視)의 다시점이 한 화면에 어우러진 셈이다. 이태호, 『조선후기 그림의 기와 세』 ,앞의 책, p.75
<인왕제색도>를 입수한 18세기 후반의 문인 심환지(沈煥之)가 그림 뒤에 붙인 글이 전하고 있다.
…만 그루 소나무의 푸른빛이
그윽한 집을 두르고 있네.
주인옹은 바로 깊은 장막 아래 앉아
홀로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를 완성하리라.
- 심환지, 「만포제발」중에서.
위 글에서의 ‘하도’와 ‘낙서’란 우주의 이치를 그린 그림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왕제색도>의 숨은 주제는 인왕산 정기 속에 자리한 이 저택의 주인이 된다. 정선과 주변의 문사들이 인왕산 자락에 살았으니 주인옹은 그들 중 하나일 것이다. 고연희, 앞의 책, p.212.
2. <금강전도>
‘봉래산’이라고도 불리는 금강산의 명칭은 불교에서 유래하였다. 또한 금강산의 수많은 지명 역시 불교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금강산은 불교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산이다. 또한 유교사회인 조선시대에 금강산은 사대부들에게 인격의 도야를 위한 곳이자, 은거의 공간이었다. 수많은 문인들이 금강산에 대한 시와 가사를 지었고, 대표적으로 정철의 관동별곡이 유명하다. 관동별곡의 본사에는 정철의 금강산 기행이 여정에 따라 잘 표현되어 있다. ‘은같은 무지개 옥같은 용의 꼬리같은 만폭동’, ‘학의 우아미를 닮은 금강대’ , ‘산봉우리 진헐대’. ‘우국지정을 생각하게 했던 개심대’, ‘공자의 경지를 생각해 본 비로봉’ ‘ 선정에의 포부를 다짐한 화룡소’ ‘십이폭포를 예찬했던 불정대’까지 금강산의 아름다움과 정철 자신의 주관적 인상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이 외에도 조선시대에 창작된 수많은 문학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금강산은 다른 어느 산보다 민족의 영산으로서 갖는 그 위치를 세삼 느끼게 해 준다. 금강산도를 그렸던 화공들의 처지에서 금강산을 실제로 유람하는 일은 경제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금강산을 동경했던 이유는 금강산은 보통의 산이 아니라 당대 사람들의 이상세계였고 일종의 신앙행위와도 같은 것이었다. 불로장생을 누릴 수 있다는 도교적인 이상세게이면서 불교의 불국정토이자 민간신앙 속에서도 깊이 자리매김한 산이었다. 금강산을 그리는 것은 단순히 경치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이상 세계로서의 상징을 담아내야 한다.
결국 <금강전도>는 금강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객관적으로 묘사한 사실화가 아니라 금강산이 지니고 있는 종교적 의미와 상징성을 나름대로 소화하여 그린 그림이라고 볼 수 있다.
정선의 금강산 그림 가운데 초기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신묘년풍악도첩》의 발문에는 1711년에 백석공이라는 인물이 금강산을 두 번째로 유람하였을 때 정선을 동행시켜 금강산도를 제작하도록 하였고 친구들과 함께 시를 읊고 창을 하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 화첩에 그려진 금강산 그림 열세 점은 <단발령망금강산도><내금강산도>에서 <옹천도>에 이르기까지 내금강과 외금강, 해금강의 주요 명승고적을 담은 것이다. 회면에 잡은 경치들은 차후에 제작된 금강산도들과 유사하고 그림에는 모두 특정지명을 적어넣었다. 안정된 묘사력을 갖추고 있으나, 화면의 짜임새나 필세가 전체적으로 약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정선이 오십대에 이르러 가장 왕성하게 활동할 때 그린 것으로 알려진 <금강전도>는 앞서 언급한 <내금강산도>와 흡사해 보이지만, 전경을 집약한 화면구성의 응집력이나 힘찬 필세는 혁신적인 탈바꿈으로 정선 화풍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태호, 앞의 책, p.124.
특히 <금강전도>는 주역(周易)의 원리가 잘 반영된 작품이다. 정선은 음양의 조화와 변화의 원리를 담고 있는 주역의 원리를 자주 표현하였는데 <금강전도>에서도 강함과 부드러움, 수직과 수평, 점과 선, 흰색과 검은색이 대비를 이루면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준구·강호성 편저, 앞의 책, p. 29.
<금강전도>는 부감시(俯瞰視)로 실경을 잡은 심원법(深遠法)을 활용하였다. 원형 구도로 근경의 장안사(長安寺), 비홍교(飛虹橋)에서 원경의 비로봉(毘盧峯)까지 내금강 전경을 포괄했다. 화면 왼편에 장안사 · 표훈사 · 정양사가 있는 숲이 우거진 토산(土山)은 미점(米點)으로, 오른편의 맨살을 드러낸 개골암산은 수직준으로, 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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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5.10
  • 저작시기2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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