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의 문화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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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팔공산의 문화유적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목차


1. 서론



2. 본론

● 팔공산의 유래

● 팔공산 문화유적

( 국보, 보물, 유형문화재, 문화재자료, 사적, 사찰)

● 팔공산의 전설이나 설화

● 팔공산의 명소



3. 결론

본문내용

불상이다. 전체높이 4m인 좌불로, 정식 이름은 관봉 석조여래좌상이다. 머리 위에 두께 15cm 정도의 평평한 돌 하나를 갓처럼 쓰고 갓바위라 불리우며, 둥근 얼굴에 굳게 다문 입,당당하고 건장한 몸체에는 위엄과 자비가 깃들어져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 걸작으로, 보물 제 431호로 지정되어 있다. 갓바위는 기도하는 사람의 한가지 소원을 꼭 들어준다는 소문이 돌아 이른 새벽부터 치성객들이줄을 잇고있다. 매월 1일이나 입시철에는 전국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며, 매년 1월1일은 해돋이를 보려는 사람들로 더욱붐빈다.
치산관광지
수려한 산세와 맑은 계곡이 어우러져 있으며 팔공산의 주맥인 동쪽 사면으로 길게 드리운 비로봉이 자리잡고 있다. 치산저수지에서 약1km올라가면 신라 진덕여왕때 자장율사가 창건하고 원효대사가 수도한 천년고찰 수도사가 있고 상류에는 신녕재와 고려 문종때 혼수대사가 창건한 진불암을 만날 수 있다. 수도사에서 계곡을 따라 약 1.6km 올라가면 치산(공산)폭포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 폭포는 팔공산에 산재해 있는 폭포 가운데 가장 낙차가 크고 낙수가 풍부한 3단 폭포로 온갖 형상의 기암괴석과 울창한 숲으로 풍치미와 경관이 수려하며
여름의녹음 ,가을의 단풍과 겨울의 설경 또한 뛰어나다.
가산산성(架山山城)
칠곡군 가산면 가산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산성. 신라시대 오악신앙(五岳信仰)의 중심인 명산 팔공산 정상에서 서쪽으로 약10㎞ 떨어진 해발 901.6m의 가산은 『경상도지리지』팔거현조에 명산 가사산(架士山) 재현북(在縣北)이라 하였는데 가산은 가사(갓의 음차, 변.말 - 팔공산 연봉 서북쪽 끝)
산 → 갓산 → 가산으로 이름된 명산으로서 일명 칠봉산이라고도 불리우며 郡內 최고봉으로 가산면 가산리에 있다. 7개의 峰이 7개의 골짜기를 이루어 七谷이라 한 것이 오늘의 漆谷이 되었다. 6.25때는 이곳에서 격전이 있었다. 선조들의 호국의지가 깃들어 있는 가산산성과 가산바위 등 명소가 많으며 울창한 수림, 계곡의 석간수는 한여름에도 서늘함을 느낄만큼 시원하다. 용의 모습을 닮은 용바위, 신선이 노닐었다는 유선대는 가산 정상에 우뚝 솟아 있다. 남포루는 산성포대가 있었던 남쪽의 기암이며, 가산 정상 부근의 내성안에 있는 우물인 장군정은 장군들이 마셨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이성축조를 주도한 관찰사 이세재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당시 주민들이 세운 비석인 불망비는 인근 해원정사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남원리 주민들에 의해 신성시되고 있다.
한티순교 성지
경북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 팔공산에 소재.
원래 \"큰 재\"를 말하며 대구, 칠곡, 군위 경계의 오지로, 카톨릭 신자들의 최종 피난처였다.
카톨릭 신자들은, 신해사옥(1791, 정조15), 신유사옥(1801, 순조원년)을 비롯하여 을해박해(1815, 순조 115), 정해 박해(1827, 순조 27), 기해사옥(1839, 헌종 5) 등으로 끊임없이 탄압 받았다. 을해박해 때는 경상도에서, 정해박해 때는 전라도에서 수백명의 신도가 수난을 당하였다. 신도들은 대구 인근의 산 간벽지로 피해, 화전을 일구고 옹기와 숯을 구우며 한데 모여 살았는데, 이때 정착한 곳이 바로 한티였다. 그러나 이곳에 정착한 후에도, 수차례나 포졸들의 습격을 받고 많은 신도들이 순교하게 되어, 오늘날 한티성지로 일 컫게 된 것이다. 한티성지는 신나무골과 더불어 순교사를 되살리고 피정(고요한 곳으로 물러남) 연수를 위한 순례지로서 새롭게 각광 받고 있다.
거조암
거조암은 당초 거조사라하여 은해사 창건보다 앞서는데 신라 효성왕 2년(738)원참조사가 창건했다고도 하고 경덕왕(742~764)때 창건했다고도 한다. 은해사와 거조사와의 관계는 언제부터 맺어졌는지 확실히 알수 없으나 근래에 와서 은해사를 본사 (本寺) 로하고 거조사는 그 말사(末寺)로 편입되어 거조암이라 불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영산전은 해체 보수시에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건립되었으며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고 한다. 소박하고 간결한 주심포계(柱心包係)형식을 취하고 있는 전,후퇴칸 5량 구조의 맞배집으로 공포, 보의 단면, 솟을 합장, 포대공 등에서 일부 고식을 볼 수 있으나 일반적인 조각수법으로 보아 조선초기에 중수하면서 많은 부분이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내부에는 526분의 석조나한상을 모시고 있으며,영산전 앞에 있는 통일신라말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이 있다. 영산전에는 526분의 나한상이 극락도 (極樂圖) 에 의하여 배열이 되어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법화스님께서 신통력을발휘하여 나한상을 모실때에 각 불상들이 스스로 제자리를 잡아 앉았다고 전해오고 있다.
결론
대구사람이라면 팔공산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만큼 팔공산은 우리에게 친근하고 포근한 이미지이다. 어릴때 한두번씩 오르락 내리락 했던 곳이며 가족들과 함께 담소를 나누고 친목도 도모했던 곳이다. 그러나 팔공산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사람은 잘 없다. 이번시간을 통해서 팔공산의 문화재란 주제를 가지고 많은 것을 알수 있었다. 예부터 팔공산은 경북에 우뚝 자리잡고 있었다. 오랜시간동안 우두커니 지켜온 그곳에서 많은 일들이 일어났으며 다양한 문화재도 남아있다. 석탑을 비롯해서 보물, 사적, 사찰 등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양한 문화재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부족과 도청의 홍보부족으로 인해 아름다운 문화재들이 그 가치를 뽐내지 못하는 듯 하다. 우리의 터전이자 전기인 팔공산의 문화재를 위해서라도 아낌없는 관심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번시간을 계기로 팔공산의 문화유적에 대한 관심이 조금더 커질수 있었으면 한다.
참고문헌
공산농요 홈페이지(koreartnet.com/gongsan)
공산농요 음반 <우리네 기원, 우리네 삶, 우리네 죽음>, 코리아트넷, 2002
네이버 백과사전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98&aid
=0000148622&
문화재청홈페이지
팔공산도립공원홈페이지
http://palgongpark.daegu.go.kr/info/info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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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7.04.05
  • 저작시기2017.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023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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