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개요
2. 서론
3. 이분법의 폭력성
4. 내면화된 오리엔탈리즘의 문제
4.1 우리는 우리자신을 어떤 시각으로 보고 있는가?
4.2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 만들어진 동양과 서양
5. 동양철학과 서양철학 그리고 대안
6. 후기
2. 서론
3. 이분법의 폭력성
4. 내면화된 오리엔탈리즘의 문제
4.1 우리는 우리자신을 어떤 시각으로 보고 있는가?
4.2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 만들어진 동양과 서양
5. 동양철학과 서양철학 그리고 대안
6. 후기
본문내용
알고 있다. 근대에 서양에서 받아들인 개인의 자유와 권리, 민주주의, 사회복지제도에 대한 개념등은 버릴수 없는 것들이다. 대부분의 동양철학은 춘추 전국시대의 전근대적인 사회를 토대로 한 사유들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유는 그 당시의 사회가 가졌던 한계를 그대로 반영할 수밖에 없다. 또한 동양철학이 가진 사유체계를 특히 유학에서 예절과 도리, 인, 충효를 보편성과 절대적인 가치로 생각하여 현대의 사회에 무작정 적용하려는 것은 옳지 않다. 박정희시대에 충과 효는 이순신이나 연개소문 같은 유명한 무장의 재발견과 함께 이루어지면서 군부정권의 미화수단으로 쓰였었고 한나라 때부터 유학이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조선시대까지 권위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게 된다. 민주주의시대에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려는 현대의 사회에 군주와 왕에 의해 지배되고, 왕과 대부, 사농공상의 신분제를 바탕으로 한 사유체계가 그대로 반영된다면 더더욱 말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동양철학을 공부하여 과거로 돌아가자는 복고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기준이 필요하며 각각의 철학에 대해서 그 철학이 태어난 시대상황이나 맥락을 고려하여 한계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한다. 가령 이어령 씨가 한국인의 우수함을 들면서 비빔밥이야기를 하곤 한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뒤집어 생각 보면 기준없이 무비판적으로 서구의 사상을 받아들이다 보면 비빔밥이 아니라 짬밥통이 될 수 도 있는 것이다. 밥을 우리의 삶 혹은 우리의 전통적인 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외부에서 들어온 문화와 사상들이 섞을 것들이라고 생각하면 비빔밥에 밥보다 섞을 것이 더 많은 중심이 잡히지 않은, 어이없는 먹지도 못할 비빔밥이 만들어지는 상황이 될 지도 모르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와 자기 자신에 대한 기준과 비판이 꼭 필요한 것이다. 친일파 청산의 문제, 남북한 통일의 문제 또한 모두다 우리의 역사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비판이 있어야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동양철학이 서양철학의 대체로서 나타날지 대안으로 나타날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보완 혹은 조화로 나타나야지 하나의 사상이 그것을 흡수하거나 먹어버리는 상황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어느 것도 완벽한 사상이나, 사회체제란 있을 수 없다. 동양철학이 서양철학의 대안이 되거나 먹어버리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되며 서양철학이 동양철학을 밀어냈다고 먹어버렸다고만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은 똑같은 위치에서 새로운 사상을 위한 기반이 되어야한다. 또한 동양과 서양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야한다. 이제 동양과 서양이라는 허구적인 네트워크가 해체되어야 한다. 과거, 지리적인 한계에 의해 불가피하게 나누어져 동양과 서양이라는 허위적인 개념을 만들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제 정보통신과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점점 이러한 지리적인 한계는 사라지고 있다. 동양과 서양을 나눌만한 경계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동양이나 서양이라는 네트워크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네트워크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그러한 네트워크에는 세계화란 이름이 붙을 수도 있고, 지구촌이라는 이름이 붙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네트워크에는 각각 개인의 자율성과 특성이 보장되어야 하고, 똑같이 국가에 대해서도 힘이나 권력의 논리에 의해 하나의 나라의 주도적인 통합보다는 개개의 나라가 다양성을 보장받을 수 있어야한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정확한 이해와 기준이다. 서구에 대한 막연한 숭배도 동양에 대한 막연한 향수도 두 가지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어둠속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알지 못하면 두 가지의 감정을 갖는다. 그것은 바로 공포와 숭배이다. 공포는 서양의 제국주의와도 같이 나타났고, 숭배는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한 기대와 서양의 기독교 종교문제 일 것이다. 우리는 좀 더 넓은 관점에서 서양과 동양 두가지를 같이 살펴봐야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한 관점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두 관점을 돌아가면서 보기도하고 또한 두 관점에서 떨어져서 보기도 해야 한다. 이런 넓은 관점을 갖기 위해서는 정확한 이해가 먼저 필요하다. 또한 기준에 대해서도 기준이 편리성이나 효율성, 이익, 경제적효과를 기준으로 해서는 안 된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서양사람들에 비해서 좀 더 유리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서양인들의 경우 자신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서양철학은 익숙하나 동양의 철학은 아직 잘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동양적인 사고에도 익숙하면서 압축성장을 거치면서 서양적인 생활방식이 많이 들어왔다. 우리는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대전 전후 GDP 100달러도 안되고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보다 가난했던 나라가 100년 만에 성공적으로 세계수출 10위권안의 개인당 GDP가 2만달러를 바라보는 개도국으로 성장하였다. 경제적인 변화만이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인 부분에서도 우리나라처럼 이렇게 급속도로 변했던 나라도 세계적으로 드물 것이다. 새로운 부대에는 새 술을 담아야한다. 새로운 삶의 방식에는 새로운 사상이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동양과 서양의 접경지대이면서 동양과 서양 넓은 시점으로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6. 후기
쓰다보니까 한편의 글을 논리적으로 일관되게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는 공자님이 자신의 도는 관(貫)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하나의 체계를 갖추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며칠에 걸려 쓰다 보니 처음에는 서양과 동양의 차이점을 두고 쓰다가 생각해보니 그런 이분법 또한 반성해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에 많은 부분이 바뀌게 되고 앞뒤가 안 맞는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혹여 라도 이것이 그냥 다른 사람의 사상이나 생각을 그냥 주워서 마치 내 생각라고 착각하고 쓴 것은 아닐까 걱정도 됩니다. 글을 쓰고 보니 근거나 논리가 부족한 부분이 많이 있고, 문제만 제기하고 정확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쉽습니다. 우선 내면화된 오리엔탈리즘에 집중해서 글을 썼습니다. 처음에는 개화파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인물분석을 통해서 내면화된 오리엔탈리즘의 예를 찾으려고 했으나 자료를 많이 찾지 못해 조금 아쉽습니다.
7. 참고자료
동양철학이 서양철학의 대체로서 나타날지 대안으로 나타날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보완 혹은 조화로 나타나야지 하나의 사상이 그것을 흡수하거나 먹어버리는 상황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어느 것도 완벽한 사상이나, 사회체제란 있을 수 없다. 동양철학이 서양철학의 대안이 되거나 먹어버리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되며 서양철학이 동양철학을 밀어냈다고 먹어버렸다고만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은 똑같은 위치에서 새로운 사상을 위한 기반이 되어야한다. 또한 동양과 서양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야한다. 이제 동양과 서양이라는 허구적인 네트워크가 해체되어야 한다. 과거, 지리적인 한계에 의해 불가피하게 나누어져 동양과 서양이라는 허위적인 개념을 만들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제 정보통신과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점점 이러한 지리적인 한계는 사라지고 있다. 동양과 서양을 나눌만한 경계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동양이나 서양이라는 네트워크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네트워크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그러한 네트워크에는 세계화란 이름이 붙을 수도 있고, 지구촌이라는 이름이 붙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네트워크에는 각각 개인의 자율성과 특성이 보장되어야 하고, 똑같이 국가에 대해서도 힘이나 권력의 논리에 의해 하나의 나라의 주도적인 통합보다는 개개의 나라가 다양성을 보장받을 수 있어야한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정확한 이해와 기준이다. 서구에 대한 막연한 숭배도 동양에 대한 막연한 향수도 두 가지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어둠속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알지 못하면 두 가지의 감정을 갖는다. 그것은 바로 공포와 숭배이다. 공포는 서양의 제국주의와도 같이 나타났고, 숭배는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한 기대와 서양의 기독교 종교문제 일 것이다. 우리는 좀 더 넓은 관점에서 서양과 동양 두가지를 같이 살펴봐야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한 관점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두 관점을 돌아가면서 보기도하고 또한 두 관점에서 떨어져서 보기도 해야 한다. 이런 넓은 관점을 갖기 위해서는 정확한 이해가 먼저 필요하다. 또한 기준에 대해서도 기준이 편리성이나 효율성, 이익, 경제적효과를 기준으로 해서는 안 된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서양사람들에 비해서 좀 더 유리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서양인들의 경우 자신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서양철학은 익숙하나 동양의 철학은 아직 잘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동양적인 사고에도 익숙하면서 압축성장을 거치면서 서양적인 생활방식이 많이 들어왔다. 우리는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대전 전후 GDP 100달러도 안되고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보다 가난했던 나라가 100년 만에 성공적으로 세계수출 10위권안의 개인당 GDP가 2만달러를 바라보는 개도국으로 성장하였다. 경제적인 변화만이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인 부분에서도 우리나라처럼 이렇게 급속도로 변했던 나라도 세계적으로 드물 것이다. 새로운 부대에는 새 술을 담아야한다. 새로운 삶의 방식에는 새로운 사상이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동양과 서양의 접경지대이면서 동양과 서양 넓은 시점으로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6. 후기
쓰다보니까 한편의 글을 논리적으로 일관되게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는 공자님이 자신의 도는 관(貫)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하나의 체계를 갖추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며칠에 걸려 쓰다 보니 처음에는 서양과 동양의 차이점을 두고 쓰다가 생각해보니 그런 이분법 또한 반성해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에 많은 부분이 바뀌게 되고 앞뒤가 안 맞는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혹여 라도 이것이 그냥 다른 사람의 사상이나 생각을 그냥 주워서 마치 내 생각라고 착각하고 쓴 것은 아닐까 걱정도 됩니다. 글을 쓰고 보니 근거나 논리가 부족한 부분이 많이 있고, 문제만 제기하고 정확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쉽습니다. 우선 내면화된 오리엔탈리즘에 집중해서 글을 썼습니다. 처음에는 개화파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인물분석을 통해서 내면화된 오리엔탈리즘의 예를 찾으려고 했으나 자료를 많이 찾지 못해 조금 아쉽습니다.
7. 참고자료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