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문과독서] 일본군 위안부의 역사적 책임과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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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작문과독서] 일본군 위안부의 역사적 책임과 사실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서론

Ⅱ.위안부의 개념과 모집

Ⅲ.실태
(1)생존자
(2)그 후 생활
(3)신고 후 생활
(4)증언에 의한 실태
(5)수송방법
(6)배치
(7)위안소 관리
(8)위안부의 생활여건
(9)전쟁말기의 상황

Ⅳ.대응
(1)한국정부의 대응
(2)일본정부의 입장
(3)국제사회의 반응
(4)국민기금에의 대응

Ⅴ.결론

본문내용

치할 때에는 주변의 용달사 혹은 매춘업자에게 위탁해 일본 오사카 등지에서 주로 직업 매춘여성에게 상당액의 전도금을 지급하고 모집했다. 그러나 1937년 난징대학살사건 이후 군이 본격적으로 군대위안부 정책을 채택하자, 과거 매춘 경험이 있는 여자들은 성병을 전염시킬 우려가 있는 등 군대위안부로서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이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1938년 이후 대량의 위안부 수요와 일본에서의 위안부 대량 모집에 따른 사회문제 야기의 우려 때문에 군부와 업자는 위안부를 당시 일본의 식민통치 아래에 있던 한국으로부터 충원하려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체로 38년까지는 주로 도시지역에서 여공 모집, 식당종업원 모집 등의 전형적인 인신매매 수법으로 모집한 것으로 보인다.
38년 이후 40년까지는 업자가 군의 허가 아래 헌병·경찰·면장 등의 도움을 얻어 주로 빈곤한 농촌의 농부 딸 등을, 특히 간호부·군 간호보조원 모집 등의 명목으로 꾀어 모집한 것으로 보이며, 이 때 경관이나 면장이 업자와 동행함으로써 위압적인 분위기를 만들거나 후생자들이 업자의 말을 쉽게 믿도록 만든 것으로 보인다.
Ⅲ.실태
(1)피해자의 현황
국내외에 살아있는 조선인 군위안부 피해자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
그동안, 국내에는 199명의 군위안부 피해자가 정부에 신고하여, 147명이 생존해 있고
52명이 사망하였다. 그리고 해외에 잔류한 피해자의 경우는, 본 연구소의 발굴조사에
의하면, 20여 명이 생존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2000년 5월 현재)
또한 북한의 경우, 북한의 군위안부 관련 조직인 \'종군위안부 및 태평양전쟁피해자
보상대책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218여명의 피해자가 군위안부로 신고하였다고 밝히
고 있다. (이 숫자는 2000년 3월 30일~4월1일에 중국 상해에서 열린 [중국\'위안부\'문제
국제심포지엄]발표자료를 근거로 한 것임)
(2)그 후 생활
종전 후 힘들게 살아남은 피해여성들은 그 후 삶도 말할 수 없이 고단하였다. 찢겨질 대로 찢겨진 당시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줄 여건은 그 어느 곳에 조금도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1950년 한국 전쟁을 치르며 받은 상처도 심각하였다. 어쨌든 이들은 가족 앞에도 떳떳이 나서기 어려웠고, 이웃에서도 누군가 아는 사람을 만날까봐 늘 쉬쉬하며 숨어 지내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그런 와중에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농사를 짓거나 품팔이를 하고, 행상 등 보잘 것 없는 장사에도 손을 대고 벌어야 했다. 그러다 어찌 어찌 나선 혼처는 주로 재취자리로 전처 자식을 맡아 키우는 일이 돌아 왔다. 그리고 나이 차이가 많은 영감이 먼저 별세하고 나면 전처 자식들은 키워준 은공을 갚기보다는 모른 척 하기 일쑤로 버림받기도 하였다. 드문 경우에 자식을 낳기도 하지만 잘 키우기는 쉽지 않았다. 결국 그들로부터도 부모로서의 대접을 받아 편히 산다는 경우는 거의 드물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더 많은 경우는 평생 독신으로 생활한 사람이 더 많았다.
피해 여성들이 가장 잘 하는 말씀이 있다. 한숨을 내쉬며, “나는 다른 보통 여성들처럼 혼인하고 아이 낳고 그저 그렇게 살아봤으면!” 결코 특별한 욕심을 내어 잘 산다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게 아이 낳고 가족이 모여 살아볼 수 있었다면 하는 소박한 꿈, 그것이 그들에겐 그렇게 어려웠던 것이다.
(3)신고 후 생활
이제 1990년대 들어 정부에서 생활지원금이 나오고 임대 아파트도 우선적으로 입주할 수 있게 사회적인 후원과 관심을 받게 되었다. 이후 그들의 삶은 얼마나 변화하였는가?
첫째는 경제적으로 항상 어렵기만 하던 생활이 조금 피었다. 힘든 가족 관계도 이로 인해 조금은 정리, 개선될 수 있었다.
둘째, 괴로웠던, 자신을 짓누르고 왜 혼자 그렇게 힘들기만 하였던 고통을 증언을 통해 드러냄으로써 트라우마로부터 조금씩, 조금씩 자연스러운 치유를 경험하게 된다. 자신의 잘못이 결코 아닌, 자신이 못나서였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스스로 위로 받고 또 사회적 관심 속에 자신을 회복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 피해 여성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해 가며, 사회의식, 여성의식을 키워 나갔다. 수요시위에 적극 참가하여, 일본의 우경화 조짐도 규탄하고, 한국 정부의 미진한 과거 청산도 항의하며, 보다 적극적인 역사 교육도 주문할 만큼 성숙하였다. 뿐만 아니라 진실에 대한 당당한 증언도 하고, 이웃의 불행에 대한 도움도 나눌 줄 아는 배려심도 생겨났다. 이들은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지키는 일에 누구보다 앞장서게 되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변화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4)증언에 의한 실태
ㄱ.요시다 세이지의 증언
한국 미혼여성을 위안부로 동원한 것은 신문·라디오에 보도되지 않도록 하고 사실상 대규모로 관이 적극 개입했으나, 은밀히 시행했다.
그러나 모집·동원된 미혼여성들이 위안부 생활을 한다는 사실이 곧 국내에 알려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전선에는 위안부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면 유언비어 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결국, 43년 때부터는 위안부 동원에 위와 같은 수법이 통하지 않게 되자, 19세기 아프리카에서의 흑인 노예사냥과 비슷한 수법의 사람 사냥으로 위안부를 충원하기도 했다.
ㄴ.김태선 \"버마의 밀림에서 사선을 헤매며\"
1926년 건잠 강진 출생. 아편을 복용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혼하여 큰아버지댁에서 자랐다. 그후 아버지는 행방불명되었고 어머니는 몇해 후 돌아가셨다. 1944년 18세되던 어느 날 일본인 한 명과 조선인 한 명이 큰아버지댁에 와서 일본공장에 취직시켜 주겠다고 꾀어 그 말을 믿고 집을 떠났다가 부산수용소, 오사카, 사이공을 거쳐 버마 랑군의 군위안소에 끌려가게 되었다.
ㄷ.강덕경 \"산넘고 바다건너 멀리 천리길을 정신대로\"
1929년 경남 진주 출생.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재혼하여 외가에서 자랐다. 외가는 넉넉한 편이라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고등과에 입학하였다. 1944년 16세 고등과 1학년 때 여자근로정신대 1기생으로 일본으로 떠나 도야마(富山)현 후지코시(不二越) 비행기공장에 가게 되었다. 그곳 생활이 너무 고달프고 배고프고 고향생각이 나서 친구와 한밤중에 도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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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8.03.21
  • 저작시기20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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