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수필 – 과거에서 현재
수필 – 나의 모든 것, 축구
수필 – 디오션을 다녀와서
수필 – 말다툼
수필 – 문화·예술인의 고향, 통영을 다녀와서
수필 – 새옹지마
수필 – 소중한 재산
수필 – 동화속의 의문
수필 – 운수 좋은날
수필 – 자연을 보다
수필 – 작심삼일은 이제 그만
수필 – 잡초에 대한 나의 생각
수필 – 중독된 우리
수필 – 한계에 도전하다
수필 – 후회
수필 – 나의 모든 것, 축구
수필 – 디오션을 다녀와서
수필 – 말다툼
수필 – 문화·예술인의 고향, 통영을 다녀와서
수필 – 새옹지마
수필 – 소중한 재산
수필 – 동화속의 의문
수필 – 운수 좋은날
수필 – 자연을 보다
수필 – 작심삼일은 이제 그만
수필 – 잡초에 대한 나의 생각
수필 – 중독된 우리
수필 – 한계에 도전하다
수필 – 후회
본문내용
를 직접 쌓지 않고 sns상에서 친구를 맺는 것이 자신의 인간관계를 더욱 더 풍족하게 만드는 것일까?
나는 솔직히 가족들과 여행을 가도 핸드폰을 보느라 그 곳을 잘 보지 못하고 ‘아 나 거기 가봤어’ 이정도로만 생각하고 거기에 가서 느낀 것을 말하라고 해보면 숨이 콱 막히고 ‘음...’ 이런다. 나 같은 사람은 로드뷰로 그 곳을 봐도 여행일 것이다. 이것을 통해 내 삶에 스마트폰이 즐거움을 주지만 풍족하게 해주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늘부터라도 스마트폰을 자신의 삶을 풍족하게 쓸 용도를 가지고 사용하고 그렇지 않으면 멀리하고 자신의 옆에 있는 친구와 가족과 더 많은 얘기를 하는 내가 아니 우리 사회 전반적인 모습이 되면 이 사회에서 살맛날 것 같다.
수필 한계에 도전하다
2011년 중2 여름방학때 나는 ymca 자전거 동아리에서 주최하는 자전거여행에 참가했다. 교통수단은 오직 자전거 하나로만 여수시청에서 출발해 경기도 파주 임진각까지 가는 것이다. 거리는 약 600km로 6박 7일동안 가는 것이다. 예전에도 자전거로 제주도를 2바퀴 완주한 적이 있어서 무리는 없었지만 제주도와는 달리 오르막이 많고 차가 다니는 도로를 달려야 해서 긴장이 많이 되었다. 드디어 출발하는 날. 여수시청에서 출발해 3시간쯤 달리자 순천 광양을 지나 한적한 들판을 달렸다. 확실히 차가 씽씽 다니는 차도보다는 바람을 맞으며 경치도 보면서 타는 자전거는 느낌이 좋았다. 그리고 운전자분들이 가끔 창밖으로 파이팅을 외쳐주시면 힘이 나고 사기가 올라갔다. 이래서 ‘응원하는 것이 큰 힘이 되는 구나’하는 생각했다.
하지만 고비도 있었다. 몇 km나 되는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를때는 ‘이제 시작인데 벌써 힘들어서 완주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그럴 때마다 1m만 더 하는 생각으로 묵묵히 페달을 밟아나가다 보니 어느새 정상에 올라와 있었다. 그때의 느낌은 정말 기분이 좋았다. 인생도 그런 것 같다. 살다보면 고비가 한번씩 있기 마련인데 그 고비를 잘 넘기면 어느새 자기가 이루고 싶은 목표가 다 이뤄져 있지 않을까? 생각해봤다.
그렇게 하루에 100km를 채우고 곡성에 있는 숙소에서 잤다. 그렇게 다음날 또 다음날, 그리고 다음날에도... 하루에 100km씩 타서 550km를 타고 마지막 목적지인 파주까지 50km남겨 두었다. 솔직히 여기까지 오면서 이미 나의 몸은 한계에 다다랐지만 사람들의 응원과 포기하지 않는 마음가짐 덕분에 이겨낼 수 있었지 않나 생각했다. 드디어 마지막 날인 그날은 비가 많이 왔고 컨디션이 좋지 않았지만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천근만근인 몸을 이끌고 자전거를 9시간을 탄 후. 고된 여정의 마침표를 찍을 종착역인 파주 임진각에 도착했다. 여기까지 온 내 스스로가 대견했고, 살면서 몇 번 해보지 못할 경험을 한 것 같아 어느 때보다 뿌듯했고 보람이 큰 여행이었다는 생각이다. 이제는 힘든 일이 닥쳐도 이겨낼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고, 또한 친구들, 동생들과 함께 하면서 리더십, 협동심과 함께 남을 배려하는 습관도 배웠다. 다음에도 이런 기회가 온다면 한 번 더 참가해보고 싶다.
수필 후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한번쯤은 후회를 한다. 나 역시도 후회를 해본 적이 많이 있었고 지금도 후회를 하고 있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두 달 전에 갑자기 쓰러지셔서 성심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하셨는데 2012년 4월 3일 새벽 5시경 우리 곁을 떠나셨다. 나는 그날 아침에 학교를 가려고 일어났는데 엄마가 담임선생님께 먼저 연락하라고 나에게 말했다. 그러고는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고 아빠가 말해주셨다. 가슴이 철렁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바로 눈물이 흘러나왔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댁 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나를 많이 아껴주셨다. 그런데 나는 조금 컸다고 명절날이 아니고는 할머니댁에 잘 가지도 않았고, 전화도 잘 드리지 않았다. 그리고 할머니가 애정표현을 하려고 하면 가까이 가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할머니께서 쓰러지셔서 중환자실에 입원을 했다고, 그날 학교가 끝나고 가족끼리 병원을 갔는데 담당 의사선생님은 상태가 호전될지는 기다려 봐야 알겠다는 말만 되풀이 했고, 얼핏 지나가다가 어른들끼리 하시는 말을 들었는데 이제 보내드려야 될 때가 된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 나는 정말 후회했다. 그토록 건강하시던 할머니께서 아프셔서 이제 가족 곁을 떠난 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 할머니가 아프지 않으셨을 때 내가 더 잘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면서 머릿속이 하얘졌다. 각 가족의 어른들끼리 날짜를 정해서 새벽에 할머니 병간호를 하자고 했었는데, 그때는 방학중이여서 선뜻 나도 하겠다고 말을 했다. 아빠도 처음에는 그냥 집에 들어가라고 했는데, 끝까지 나도 하겠다고 말을 하니 아빠도 허락해주셨다. 아빠와 내가 병간호를 하는 날에는 내가 12시부터 3시까지 아빠가 3시부터 7시까지 시간을 나누어서 했다. 그때 할머니와 단둘이 중환자실에 있었다. 나는 할머니 옆에 앉아서 할머니 손을 잡았다. 매우 따뜻했다. 아마도 그때가 내가 할머니 손을 가장 오래잡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 지나갔고 두 달 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가족들 사이에서는 이제 더 이상의 치료를 포기하고 할머니를 편하게 보내주자는 말도 있었다. 나를 비롯해서 가족들은 그 의견에 대해서 무조건 반대했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다 결국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4월 3일 화요일 그 날은 나와 아빠가 병간호를 하는 날이 이었는데 나는 학교에 가기 때문에 3월 달부터는 아빠혼자서 할머니 병간호를 했고 모든 가족 중에 아빠혼자만 할머니의 임종을 지키셨다. 나는 그날 장례식장에서 아빠가 창밖을 보고 있었는데 나도 말없이 옆에서 아빠와 가만히 서있었다. 나는 지금도 할머니께 죄송하고, 솔직히 말하자면 할머니가 보고 싶고 다시 우리 곁으로 와주셨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나도 몇 년 후에는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이 된다. 그리고 직장도 가지게 될 것이며 결혼도해서 가정도 꾸릴 것이다. 또다시 이런 후회하는 일이 안 생기도록 지금부터 부모님께 잘해야겠다.
나는 솔직히 가족들과 여행을 가도 핸드폰을 보느라 그 곳을 잘 보지 못하고 ‘아 나 거기 가봤어’ 이정도로만 생각하고 거기에 가서 느낀 것을 말하라고 해보면 숨이 콱 막히고 ‘음...’ 이런다. 나 같은 사람은 로드뷰로 그 곳을 봐도 여행일 것이다. 이것을 통해 내 삶에 스마트폰이 즐거움을 주지만 풍족하게 해주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늘부터라도 스마트폰을 자신의 삶을 풍족하게 쓸 용도를 가지고 사용하고 그렇지 않으면 멀리하고 자신의 옆에 있는 친구와 가족과 더 많은 얘기를 하는 내가 아니 우리 사회 전반적인 모습이 되면 이 사회에서 살맛날 것 같다.
수필 한계에 도전하다
2011년 중2 여름방학때 나는 ymca 자전거 동아리에서 주최하는 자전거여행에 참가했다. 교통수단은 오직 자전거 하나로만 여수시청에서 출발해 경기도 파주 임진각까지 가는 것이다. 거리는 약 600km로 6박 7일동안 가는 것이다. 예전에도 자전거로 제주도를 2바퀴 완주한 적이 있어서 무리는 없었지만 제주도와는 달리 오르막이 많고 차가 다니는 도로를 달려야 해서 긴장이 많이 되었다. 드디어 출발하는 날. 여수시청에서 출발해 3시간쯤 달리자 순천 광양을 지나 한적한 들판을 달렸다. 확실히 차가 씽씽 다니는 차도보다는 바람을 맞으며 경치도 보면서 타는 자전거는 느낌이 좋았다. 그리고 운전자분들이 가끔 창밖으로 파이팅을 외쳐주시면 힘이 나고 사기가 올라갔다. 이래서 ‘응원하는 것이 큰 힘이 되는 구나’하는 생각했다.
하지만 고비도 있었다. 몇 km나 되는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를때는 ‘이제 시작인데 벌써 힘들어서 완주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그럴 때마다 1m만 더 하는 생각으로 묵묵히 페달을 밟아나가다 보니 어느새 정상에 올라와 있었다. 그때의 느낌은 정말 기분이 좋았다. 인생도 그런 것 같다. 살다보면 고비가 한번씩 있기 마련인데 그 고비를 잘 넘기면 어느새 자기가 이루고 싶은 목표가 다 이뤄져 있지 않을까? 생각해봤다.
그렇게 하루에 100km를 채우고 곡성에 있는 숙소에서 잤다. 그렇게 다음날 또 다음날, 그리고 다음날에도... 하루에 100km씩 타서 550km를 타고 마지막 목적지인 파주까지 50km남겨 두었다. 솔직히 여기까지 오면서 이미 나의 몸은 한계에 다다랐지만 사람들의 응원과 포기하지 않는 마음가짐 덕분에 이겨낼 수 있었지 않나 생각했다. 드디어 마지막 날인 그날은 비가 많이 왔고 컨디션이 좋지 않았지만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천근만근인 몸을 이끌고 자전거를 9시간을 탄 후. 고된 여정의 마침표를 찍을 종착역인 파주 임진각에 도착했다. 여기까지 온 내 스스로가 대견했고, 살면서 몇 번 해보지 못할 경험을 한 것 같아 어느 때보다 뿌듯했고 보람이 큰 여행이었다는 생각이다. 이제는 힘든 일이 닥쳐도 이겨낼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고, 또한 친구들, 동생들과 함께 하면서 리더십, 협동심과 함께 남을 배려하는 습관도 배웠다. 다음에도 이런 기회가 온다면 한 번 더 참가해보고 싶다.
수필 후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한번쯤은 후회를 한다. 나 역시도 후회를 해본 적이 많이 있었고 지금도 후회를 하고 있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두 달 전에 갑자기 쓰러지셔서 성심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하셨는데 2012년 4월 3일 새벽 5시경 우리 곁을 떠나셨다. 나는 그날 아침에 학교를 가려고 일어났는데 엄마가 담임선생님께 먼저 연락하라고 나에게 말했다. 그러고는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고 아빠가 말해주셨다. 가슴이 철렁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바로 눈물이 흘러나왔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댁 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나를 많이 아껴주셨다. 그런데 나는 조금 컸다고 명절날이 아니고는 할머니댁에 잘 가지도 않았고, 전화도 잘 드리지 않았다. 그리고 할머니가 애정표현을 하려고 하면 가까이 가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할머니께서 쓰러지셔서 중환자실에 입원을 했다고, 그날 학교가 끝나고 가족끼리 병원을 갔는데 담당 의사선생님은 상태가 호전될지는 기다려 봐야 알겠다는 말만 되풀이 했고, 얼핏 지나가다가 어른들끼리 하시는 말을 들었는데 이제 보내드려야 될 때가 된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 나는 정말 후회했다. 그토록 건강하시던 할머니께서 아프셔서 이제 가족 곁을 떠난 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 할머니가 아프지 않으셨을 때 내가 더 잘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면서 머릿속이 하얘졌다. 각 가족의 어른들끼리 날짜를 정해서 새벽에 할머니 병간호를 하자고 했었는데, 그때는 방학중이여서 선뜻 나도 하겠다고 말을 했다. 아빠도 처음에는 그냥 집에 들어가라고 했는데, 끝까지 나도 하겠다고 말을 하니 아빠도 허락해주셨다. 아빠와 내가 병간호를 하는 날에는 내가 12시부터 3시까지 아빠가 3시부터 7시까지 시간을 나누어서 했다. 그때 할머니와 단둘이 중환자실에 있었다. 나는 할머니 옆에 앉아서 할머니 손을 잡았다. 매우 따뜻했다. 아마도 그때가 내가 할머니 손을 가장 오래잡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 지나갔고 두 달 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가족들 사이에서는 이제 더 이상의 치료를 포기하고 할머니를 편하게 보내주자는 말도 있었다. 나를 비롯해서 가족들은 그 의견에 대해서 무조건 반대했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다 결국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4월 3일 화요일 그 날은 나와 아빠가 병간호를 하는 날이 이었는데 나는 학교에 가기 때문에 3월 달부터는 아빠혼자서 할머니 병간호를 했고 모든 가족 중에 아빠혼자만 할머니의 임종을 지키셨다. 나는 그날 장례식장에서 아빠가 창밖을 보고 있었는데 나도 말없이 옆에서 아빠와 가만히 서있었다. 나는 지금도 할머니께 죄송하고, 솔직히 말하자면 할머니가 보고 싶고 다시 우리 곁으로 와주셨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나도 몇 년 후에는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이 된다. 그리고 직장도 가지게 될 것이며 결혼도해서 가정도 꾸릴 것이다. 또다시 이런 후회하는 일이 안 생기도록 지금부터 부모님께 잘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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