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론
2. 두 작품 간의 외적비교
2.1. 작가
2.1.1. 일재 조중환
2.1.2. 오자키 고요
2.2. 소설과 신파극
2.3 번역과 번안, 그리고 가정소설
3. 두 작품 간의 내적비교
3.1. 외교 상황
3.2. 배경장소에 대한 인식
3.3. 경제적인 발전 정도
3.4. 내면의 구체화 정도
3.5. 여성에 관한 인식
3.5.1. 교육받은 여성
3.5.2. 여성의 정절
3.6. 공익에 대한 인식 차이
4. 결론
-참고문헌
2. 두 작품 간의 외적비교
2.1. 작가
2.1.1. 일재 조중환
2.1.2. 오자키 고요
2.2. 소설과 신파극
2.3 번역과 번안, 그리고 가정소설
3. 두 작품 간의 내적비교
3.1. 외교 상황
3.2. 배경장소에 대한 인식
3.3. 경제적인 발전 정도
3.4. 내면의 구체화 정도
3.5. 여성에 관한 인식
3.5.1. 교육받은 여성
3.5.2. 여성의 정절
3.6. 공익에 대한 인식 차이
4.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1 [119회]
『장한몽』 상, 회동서관, 1913.9 [177면]
『장한몽』 중·하, 유일서관·한성서관, 1916.12 [중144면, 하 176면]
-「국의 향」, 『매일신보』, 1913.10.2~12.28 [67회]
『국의 향』, 상·하, 유일서관, 1914.8 [상159면]
-「단장록」, 『매일신보』, 1914.1.1~6.9 [116회]
-「주유삼남」, 『매일신보』, 1914.6.23~7.10 [12회]
-「비봉담」, 『매일신보』, 1914.7.21~10.28 [65회]
-「속편 장한몽」, 『매일신보』, 1915.5.25~12.26 [146회]
「리수일과 심순애 장한몽 속」 상·하, 조선도서주식회사,보문관, 1925.3 [상268면, 하 270면]
조중환은 소설을 연재하는 전문 기자라는 점에서 신문이라는 매체의 성향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고, 연재하는 소설이라는 형태를 통해서 매체의 성향을 드러낼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즉, 조중환은 매체의 성향을 통해 시대에 지배적인 담론을 드러내야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소설의 재미를 통해 매체의 판매부수를 올려야 했기 때문에 소설 자체가 가지는 재미를 추구해야 하기도 했다. 1910년대 식민지 조선의 번역, 번안 소설물들은 대체로 일본 신문에서 연재되었던 소설을 번역, 번안한 경우가 많았다. 그 말은 이미 일본에서 이 소설물들이 어느 정도의 인기를 끌었는지 판단하고 가져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전은경, 「근대 계몽기 한·일 번역문학과 근대 독자층 비교 연구」, 『語文學』, Vol.117, 한국어문학회, 2012, 236쪽
다시 말해, 1910년대에 대체로 일본의 소설을 대상으로 번역, 번안한 경우가 많은 이유는 일본 신문에서 연재되었던 소설들이 충분히 검증된 인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2.1.2. 오자키 고요 오자키 고요에 관한 자료는 나카무라 미쓰오 저. 고재석 옮김『일본 메이지 문학사』를 참조하였다.
(尾崎紅葉)
오자키 고요[尾崎紅葉, 1867~1903]는 에도 출생의 일본 소설가이다. 그가 문학적 활동을 보인 시기로는 1885년부터이다. 1885년 야마다 비묘와 함께 “겐유샤(硯友社) 겐유샤 : 창단 후 약 20년 간 일본의 소설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잡지 겸 문학 결사. 도시의 아들이었던 그들은 분카와 분세이 시대에 발달했던 에도 문학의 영향으로 해학과 유희를 일삼으면서도 감성의 세련을 믿는 반속정신이나 선민의식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게사쿠(통속오락소설) 작가 취미는 당대의 풍조에 대한 도시인다운 반항이었다. 그들은 적어도 그 출발점에서는 문학에 중대한 의미를 인정하지도 않았고, 문학을 직업으로 삼을 생각도 없었던 것 같다. 『당대서생기질』이나 『소설신수』의 주장이 이런 점에서 그들에게 감화를 주었으며, 그 때까지 유흥이자 소극적 반항의 도구였던 문학에 적극적으로 “문명의 요소”일 수 있는 의의를 가르쳐주었다.
”를 설립했고 『가라쿠타문고(我樂多文庫)』창간을 시작으로 하여 문학활동을 전개한다. 창간 이후 이후 이시바시 시안, 마루오카 규카, 가와카미 비잔, 이와야 사자나미 등도 가담하게 된다.
1888년에는 이하라 사이카쿠 에도 시대[江戶時代]의 하이카이[俳諧] 시인이며 소설가. 17세기 일본 문예부흥기의 가장 두드러진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상인계급이나 화류계의 연애사건이나 돈에 얽힌 이야기를 생생하게 그려내어 독자들을 매료시켰다. 사이카쿠는 처음에 17음의 하이쿠[俳句]의 모태가 된 코믹 렌가[連歌:5·7·5음의 시구와 7·7음의 시구를 번갈아 읊는 연시]인 하이카이 작가로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명성을 얻었다. 템포가 빠르고 암시적이며 함축성 있는 스타일의 소설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에 심취하여 새롭게 발굴한 고전을 통해 새로운 분야의 개척을 결심한다. 1889년 『색욕참회』를 발표한 이후 작품 발표할 때마다 명성이 높아졌다. 불과 10여년 사이에 겐유샤의 맹주로서 시대의 문학을(적어도 세속적으로는) 대표하는 지위를 차지했다. 같은 해에 요미우리 신문사 입사 후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였는데 그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오자키 고요의 작품
- 『갸라마쿠라[伽羅枕]』,1890
- 『3인처(三人妻)』,1892
- 『다정다한(多情多恨)』,1896
- 『금색야차(金色夜叉)』,1897∼1902,미완
1903년 10월 위암으로 사망하게 되어 『금색야차』는 미완으로 끝이 난다. 그의 생애 동안 나온 작품들을 통해 일본 문학사에서는 오자키 고요를 ‘메이지 중기의 사회상을 사실적으로 그려 낸 풍속소설의 1인자’로 평하고 있다.
2.2 소설과 신파극
오자키 고요의 『금색야차(金色夜叉)』는 1897년부터 1899년까지 『요미우리 신문(新聞)』에 연재되었다. 『요미우리 신문』은 메이지 7년 1974년 11월 2일 합명회사인 ‘니슈샤’가 창간했다. 다른 대신문이 가나로 토를 달지 않은 채 정론을 펴는 것을 주로 한 반면, 『요미우리 신문』은 가나로 토를 붙여 인기를 얻었다.
1890년대 후반부터 『요미우리 신문(新聞)』의 발행부수가 점점 줄면서 『요미우리 신문(新聞)』은 지방 구독자를 대폭 늘리고자 노력하게 된다. 『금색야차(金色夜叉)』는 그런 신문사의 취지를 반영하여, 수많은 지방 구독자들을 증가시키는 데 큰 역할 당시 정론 중심이었던 대신문의 독자층은 관리학자학생 등의 지식인으로 치중되어 있었다. 반면 소신문이었던 『요미우리 신문』은 대중적인 취향의 신문으로 여성독자나 일반 대중을 독자층으로 삼아 발행부수를 높이고자 했으며, 이는「子共の眼さまし」라는 제목으로 편집장이 실은 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실제로 『요미우리 신문』은 1877년 2만 5천부의 발행부수를 기록하고 전국 1위의 실적을 차지하는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다.
을 했다. 전은경, 「근대 계몽기 한·일 번역문학과 근대 독자층 비교 연구」, 『語文學』, Vol.117, 한국어문학회, 2012, 236쪽
오자키 고요의 미완성 대작으로 꼽히는 작품 1903년 1월부터 3월까지 《신쇼세츠[新小說]》에 발표 : 1898년에 전편, 1899년에 중편, 1900년 후편, 1902년 속편, 1903년 속속편 등 5책을
『장한몽』 상, 회동서관, 1913.9 [177면]
『장한몽』 중·하, 유일서관·한성서관, 1916.12 [중144면, 하 176면]
-「국의 향」, 『매일신보』, 1913.10.2~12.28 [67회]
『국의 향』, 상·하, 유일서관, 1914.8 [상159면]
-「단장록」, 『매일신보』, 1914.1.1~6.9 [116회]
-「주유삼남」, 『매일신보』, 1914.6.23~7.10 [12회]
-「비봉담」, 『매일신보』, 1914.7.21~10.28 [65회]
-「속편 장한몽」, 『매일신보』, 1915.5.25~12.26 [146회]
「리수일과 심순애 장한몽 속」 상·하, 조선도서주식회사,보문관, 1925.3 [상268면, 하 270면]
조중환은 소설을 연재하는 전문 기자라는 점에서 신문이라는 매체의 성향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고, 연재하는 소설이라는 형태를 통해서 매체의 성향을 드러낼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즉, 조중환은 매체의 성향을 통해 시대에 지배적인 담론을 드러내야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소설의 재미를 통해 매체의 판매부수를 올려야 했기 때문에 소설 자체가 가지는 재미를 추구해야 하기도 했다. 1910년대 식민지 조선의 번역, 번안 소설물들은 대체로 일본 신문에서 연재되었던 소설을 번역, 번안한 경우가 많았다. 그 말은 이미 일본에서 이 소설물들이 어느 정도의 인기를 끌었는지 판단하고 가져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전은경, 「근대 계몽기 한·일 번역문학과 근대 독자층 비교 연구」, 『語文學』, Vol.117, 한국어문학회, 2012, 236쪽
다시 말해, 1910년대에 대체로 일본의 소설을 대상으로 번역, 번안한 경우가 많은 이유는 일본 신문에서 연재되었던 소설들이 충분히 검증된 인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2.1.2. 오자키 고요 오자키 고요에 관한 자료는 나카무라 미쓰오 저. 고재석 옮김『일본 메이지 문학사』를 참조하였다.
(尾崎紅葉)
오자키 고요[尾崎紅葉, 1867~1903]는 에도 출생의 일본 소설가이다. 그가 문학적 활동을 보인 시기로는 1885년부터이다. 1885년 야마다 비묘와 함께 “겐유샤(硯友社) 겐유샤 : 창단 후 약 20년 간 일본의 소설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잡지 겸 문학 결사. 도시의 아들이었던 그들은 분카와 분세이 시대에 발달했던 에도 문학의 영향으로 해학과 유희를 일삼으면서도 감성의 세련을 믿는 반속정신이나 선민의식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게사쿠(통속오락소설) 작가 취미는 당대의 풍조에 대한 도시인다운 반항이었다. 그들은 적어도 그 출발점에서는 문학에 중대한 의미를 인정하지도 않았고, 문학을 직업으로 삼을 생각도 없었던 것 같다. 『당대서생기질』이나 『소설신수』의 주장이 이런 점에서 그들에게 감화를 주었으며, 그 때까지 유흥이자 소극적 반항의 도구였던 문학에 적극적으로 “문명의 요소”일 수 있는 의의를 가르쳐주었다.
”를 설립했고 『가라쿠타문고(我樂多文庫)』창간을 시작으로 하여 문학활동을 전개한다. 창간 이후 이후 이시바시 시안, 마루오카 규카, 가와카미 비잔, 이와야 사자나미 등도 가담하게 된다.
1888년에는 이하라 사이카쿠 에도 시대[江戶時代]의 하이카이[俳諧] 시인이며 소설가. 17세기 일본 문예부흥기의 가장 두드러진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상인계급이나 화류계의 연애사건이나 돈에 얽힌 이야기를 생생하게 그려내어 독자들을 매료시켰다. 사이카쿠는 처음에 17음의 하이쿠[俳句]의 모태가 된 코믹 렌가[連歌:5·7·5음의 시구와 7·7음의 시구를 번갈아 읊는 연시]인 하이카이 작가로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명성을 얻었다. 템포가 빠르고 암시적이며 함축성 있는 스타일의 소설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에 심취하여 새롭게 발굴한 고전을 통해 새로운 분야의 개척을 결심한다. 1889년 『색욕참회』를 발표한 이후 작품 발표할 때마다 명성이 높아졌다. 불과 10여년 사이에 겐유샤의 맹주로서 시대의 문학을(적어도 세속적으로는) 대표하는 지위를 차지했다. 같은 해에 요미우리 신문사 입사 후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였는데 그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오자키 고요의 작품
- 『갸라마쿠라[伽羅枕]』,1890
- 『3인처(三人妻)』,1892
- 『다정다한(多情多恨)』,1896
- 『금색야차(金色夜叉)』,1897∼1902,미완
1903년 10월 위암으로 사망하게 되어 『금색야차』는 미완으로 끝이 난다. 그의 생애 동안 나온 작품들을 통해 일본 문학사에서는 오자키 고요를 ‘메이지 중기의 사회상을 사실적으로 그려 낸 풍속소설의 1인자’로 평하고 있다.
2.2 소설과 신파극
오자키 고요의 『금색야차(金色夜叉)』는 1897년부터 1899년까지 『요미우리 신문(新聞)』에 연재되었다. 『요미우리 신문』은 메이지 7년 1974년 11월 2일 합명회사인 ‘니슈샤’가 창간했다. 다른 대신문이 가나로 토를 달지 않은 채 정론을 펴는 것을 주로 한 반면, 『요미우리 신문』은 가나로 토를 붙여 인기를 얻었다.
1890년대 후반부터 『요미우리 신문(新聞)』의 발행부수가 점점 줄면서 『요미우리 신문(新聞)』은 지방 구독자를 대폭 늘리고자 노력하게 된다. 『금색야차(金色夜叉)』는 그런 신문사의 취지를 반영하여, 수많은 지방 구독자들을 증가시키는 데 큰 역할 당시 정론 중심이었던 대신문의 독자층은 관리학자학생 등의 지식인으로 치중되어 있었다. 반면 소신문이었던 『요미우리 신문』은 대중적인 취향의 신문으로 여성독자나 일반 대중을 독자층으로 삼아 발행부수를 높이고자 했으며, 이는「子共の眼さまし」라는 제목으로 편집장이 실은 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실제로 『요미우리 신문』은 1877년 2만 5천부의 발행부수를 기록하고 전국 1위의 실적을 차지하는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다.
을 했다. 전은경, 「근대 계몽기 한·일 번역문학과 근대 독자층 비교 연구」, 『語文學』, Vol.117, 한국어문학회, 2012, 236쪽
오자키 고요의 미완성 대작으로 꼽히는 작품 1903년 1월부터 3월까지 《신쇼세츠[新小說]》에 발표 : 1898년에 전편, 1899년에 중편, 1900년 후편, 1902년 속편, 1903년 속속편 등 5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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