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I. 서론
Ⅱ. 본론
1. 신석기시대의 지역별 구분
1) 황하 유역
2) 장강 중·하류 유역
3) 화남, 서남 지역
4) 북방 지역
2. 신석기시대의 시기별 구분
1) 전기 신석기 시대
(1) 배리강문화
(2) 앙소문화
(3) 하모도문화
(4) 세석기문화
(5) 기하문양 도기문화
2) 중기 신석기 시대
(1) 용산문화
(2) 제가문화
(3) 대문구문화
(4) 양저문화
3) 후기 신석기 시대
(1) 염제
(2) 황제
(3) 태호
(4) 구이
(5) 요와 순
3. 신석기시대의 특징
1) 주거지와 묘지
2) 농업, 목축업과 수공업
3) 예술
Ⅲ. 결론
참고문헌
Ⅱ. 본론
1. 신석기시대의 지역별 구분
1) 황하 유역
2) 장강 중·하류 유역
3) 화남, 서남 지역
4) 북방 지역
2. 신석기시대의 시기별 구분
1) 전기 신석기 시대
(1) 배리강문화
(2) 앙소문화
(3) 하모도문화
(4) 세석기문화
(5) 기하문양 도기문화
2) 중기 신석기 시대
(1) 용산문화
(2) 제가문화
(3) 대문구문화
(4) 양저문화
3) 후기 신석기 시대
(1) 염제
(2) 황제
(3) 태호
(4) 구이
(5) 요와 순
3. 신석기시대의 특징
1) 주거지와 묘지
2) 농업, 목축업과 수공업
3) 예술
Ⅲ.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21.
골각기 제작에 있어서 사용된 뼈는 동물의 뼈를 위주로 하고, 조류의 뼈는 그리 많이 사용하지 않았다. 뿔은 주로 사슴의 뿔을 사용하여 도구를 만들고, 소와 양의 뿔은 제작이 주로 쉽지 않았다. 조개껍데기는 담수(淡水:짠맛이 없는 맑은 물)의 조개를 사용하였고, 장식품은 해수(海水)의 조개를 사용하였다. 그 외에 상아 등 동물의 치아로 장식품을 만들기도 하였다. 김영환, 전인서,p.35.
3) 예술
신석기 시대의 또다른 특징은 암화(岩畵)의 출현이다. 암화는 암석 위에 조각을 하고 그림을 그린 것을 말한다. 그 창작 시기는 비교적 이른 구석기 시대이며 후기라 한다 해도 신석기 시대 초기를 넘지 않는다. 중국 내의 암화의 분포는 광범위한데, 비교적 유명한 것으로는 음산(陰山) 암화, 운남 변경의 창원(蒼遠) 암화, 광서(廣西)의 화산(花山) 암화 및 가욕관(嘉關) 부근의 흑산(黑山) 암화 등이 있다. 중국의 암화는 그 표현 내용에 따라서 남·북 두 계통으로 나뉘어진다. 북방 지역의 암화는 다양한 동물, 인물, 수렵 및 각종의 부호를 표현하고 있어 원시 유목 생활을 반영하고 있다. 남방 지역의 암화는 각종 동물, 수렵 장면 이외에도 채집, 집안 또는 촌락, 종교 의식 등의 내용을 표현하고 있어 남방 원시 농업 사회의 생활 상태를 반영하고 있다. 이런 암화는 총체적으로 상고(上古) 시기의 사회 경제와 생산 상황과 인간들의 조직 형태를 반영하고 있으며 원시 사회의 살아있는 화석이 되어 원시인의 정신세계를 탐색하는 데 실물 근거를 제공해 주고 있다. 중국사학회, 강영매(역),《중국역사 박물관》(경기,범우사,2004),p.21.
하남(河南) 무양현(舞陽縣) 가호(賈湖) 신석기 유적지에서 10여 점의 뿔피리가 출토되었다. 대부분 일곱 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7성(聲)의 음계를 연주할 수 있었다. 구조도 완정하고 정확했으며 음질 역시 비교적 좋았다. 신석기시대 중국 음악의 탄생은 바로 동아시아 음악의 선구자가 되었으며, 중국 음악 문화 발전에 기초를 다졌고, 상(商)과 주(周)의 생활방식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중국사학회, 전인《중국통사 1》,p.32.
Ⅲ. 결론
1만 년 전, 인류는 처음으로 문화대변혁을 겪는다. 거의 자연 상태인 타제석기를 사용해 생존을 위한 어업 수렵과 채집 활동을 할 수 있었을 뿐이었던 구석기시대 인류는 어떤 의미를 가진 문화 활동을 했다고 말할 수 없다. ‘신석기 혁명’이 시작되면서 인류는 진정한 문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변화가 적어도 지금으로부터 8천여 년 전에 발생했다. 두정승(편), 전인서,pp.28-29.
야생의 곡물을 재배하고 사냥해 온 짐승을 기르기 시작했다는 것은 인류가 자연현상의 구체적이고 단편적인 변화상을 연관시켜 추상적이며 종합적인 원리로 정립해내는 고도의 사고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현상의 배후에 있는 원리를 깨달아가면서 성숙한 정신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 시기에 애니미즘, 토테미즘, 샤머니즘 등의 원시 신앙이 발생하고 추상적인 도안의 예술품이 등장하는 것은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은 생산력의 수준이 낮아서 자연의 위험이나 굶주림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한 인류는 공동체의 안전과 풍요로운 생산에 대한 염원으로 다양한 공동의 의식 문화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끊임없이 수준 높은 기술들이 개발되었다. 수백 년간 인류를 지배했던 ‘깨트리는 문화’에서 ‘가는 문화’로 기술상의 대혁신을 이루었다. 더욱 정교해진 손놀림으로 다양한 간석기들이 만들어졌다. 창과 활과 도끼 등 이음도구들이 발달했으며 실을 뽑고 그물을 만들었다. 물고기과 곡물들을 보다 다양한 조리법으로 식탁에 올릴 수 있게 되었고, 따뜻한 옷을 지어 입을 수 있게 되었다. 남은 곡식은 토기를 만들어 저장하였다. 초기의 원시농경은 생산력이 낮아서 여성들에 의해 전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랜 경험으로 야생곡물의 생장이치를 깨닫고 농경을 시작하였지만 그것이 처음부터 풍부한 산물을 안겨주었을 리는 없다. 임신과 육아를 담당해야 했던 여성들은 집 근처에서 간 돌도끼, 돌호미 등으로 농사를 짓고 수확물은 갈돌로 갈아서 토기로 된 시루에 찌는 등 요리를 했다. 남성들은 멀리 나가 활이나 창으로 말·사슴·들소 등을 사냥했으며 낚시와 어망으로 물고기를 잡았다. 개·돼지·소·양 등의 가축도 기르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남녀 간의 분업은 있었으나 아직 남녀의 차별은 없었으며, 잉여생산물이 적어 빈부의 차나 그로 인한 사람간의 차별도 거의 없었다. 경험이 풍부한 지도자는 있었을지언정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지배자는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 죽어서도 함께 씨족 공동묘지에 묻혔다. 이들은 마을 중앙에 있는 커다란 집이나 광장에서 마을 공동의 일을 함께 논의하고 종교적 의식을 집행했으며, 공동으로 생산하고 그 산물은 평등하게 나누어 가졌다. 이들의 관계는 서로 평등했다. 안정애, 전인서,pp.23-24.
신석기 후기에 이르면 농업 생산력이 상당히 증대되었다. 늘어난 생산물은 인구를 증가시키고 인간의 정신문화를 보다 풍족하게 하는 자양분이 되었으나, 이의 획득을 놓고 씨족 내부의 갈등이 생겨나고 다른 씨족과의 전쟁도 빈번하게 발생하게 되었다. 인간 사이의 억압과 지배의 새로운 관계가 시작된 것이다. 농경이 보다 확실한 생활수단이 되자 남성들의 근력이 더욱 중요하게 되었고 생산물이 증대될수록 남성의 권력은 강화되었다. 남성의 묘에서는 생산도구가, 여성의 묘에서는 물레 틀이나 머리 장식품 등이 출토되었다. 방직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생산 활동에서 남성의 역할이 더욱 중요시되면서 여성의 지위는 점차 남성에게 종속되어 부계 사회가 출현하였다. 저장할 곡식이 더욱 많아졌고 사유재산의 개념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남성들은 사유재산을 자신의 아이에게 상속하기를 바랐다. 분명한 자기아이임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어느 여성을 독점해야 했고 이에 따라 일부일처제의 혼인제도가 성립하게 되었다. 가끔 남녀 합장묘가 발굴되는 것은 이러한 현상을 알려준다. 세습적인 지도자가 출현하고 씨족 간의 평등한 관계도 깨어지기 시작했다. 집이나 묘지들은 이제 모양과 크기가 일정하지 않았으며,
골각기 제작에 있어서 사용된 뼈는 동물의 뼈를 위주로 하고, 조류의 뼈는 그리 많이 사용하지 않았다. 뿔은 주로 사슴의 뿔을 사용하여 도구를 만들고, 소와 양의 뿔은 제작이 주로 쉽지 않았다. 조개껍데기는 담수(淡水:짠맛이 없는 맑은 물)의 조개를 사용하였고, 장식품은 해수(海水)의 조개를 사용하였다. 그 외에 상아 등 동물의 치아로 장식품을 만들기도 하였다. 김영환, 전인서,p.35.
3) 예술
신석기 시대의 또다른 특징은 암화(岩畵)의 출현이다. 암화는 암석 위에 조각을 하고 그림을 그린 것을 말한다. 그 창작 시기는 비교적 이른 구석기 시대이며 후기라 한다 해도 신석기 시대 초기를 넘지 않는다. 중국 내의 암화의 분포는 광범위한데, 비교적 유명한 것으로는 음산(陰山) 암화, 운남 변경의 창원(蒼遠) 암화, 광서(廣西)의 화산(花山) 암화 및 가욕관(嘉關) 부근의 흑산(黑山) 암화 등이 있다. 중국의 암화는 그 표현 내용에 따라서 남·북 두 계통으로 나뉘어진다. 북방 지역의 암화는 다양한 동물, 인물, 수렵 및 각종의 부호를 표현하고 있어 원시 유목 생활을 반영하고 있다. 남방 지역의 암화는 각종 동물, 수렵 장면 이외에도 채집, 집안 또는 촌락, 종교 의식 등의 내용을 표현하고 있어 남방 원시 농업 사회의 생활 상태를 반영하고 있다. 이런 암화는 총체적으로 상고(上古) 시기의 사회 경제와 생산 상황과 인간들의 조직 형태를 반영하고 있으며 원시 사회의 살아있는 화석이 되어 원시인의 정신세계를 탐색하는 데 실물 근거를 제공해 주고 있다. 중국사학회, 강영매(역),《중국역사 박물관》(경기,범우사,2004),p.21.
하남(河南) 무양현(舞陽縣) 가호(賈湖) 신석기 유적지에서 10여 점의 뿔피리가 출토되었다. 대부분 일곱 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7성(聲)의 음계를 연주할 수 있었다. 구조도 완정하고 정확했으며 음질 역시 비교적 좋았다. 신석기시대 중국 음악의 탄생은 바로 동아시아 음악의 선구자가 되었으며, 중국 음악 문화 발전에 기초를 다졌고, 상(商)과 주(周)의 생활방식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중국사학회, 전인《중국통사 1》,p.32.
Ⅲ. 결론
1만 년 전, 인류는 처음으로 문화대변혁을 겪는다. 거의 자연 상태인 타제석기를 사용해 생존을 위한 어업 수렵과 채집 활동을 할 수 있었을 뿐이었던 구석기시대 인류는 어떤 의미를 가진 문화 활동을 했다고 말할 수 없다. ‘신석기 혁명’이 시작되면서 인류는 진정한 문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변화가 적어도 지금으로부터 8천여 년 전에 발생했다. 두정승(편), 전인서,pp.28-29.
야생의 곡물을 재배하고 사냥해 온 짐승을 기르기 시작했다는 것은 인류가 자연현상의 구체적이고 단편적인 변화상을 연관시켜 추상적이며 종합적인 원리로 정립해내는 고도의 사고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현상의 배후에 있는 원리를 깨달아가면서 성숙한 정신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 시기에 애니미즘, 토테미즘, 샤머니즘 등의 원시 신앙이 발생하고 추상적인 도안의 예술품이 등장하는 것은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은 생산력의 수준이 낮아서 자연의 위험이나 굶주림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한 인류는 공동체의 안전과 풍요로운 생산에 대한 염원으로 다양한 공동의 의식 문화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끊임없이 수준 높은 기술들이 개발되었다. 수백 년간 인류를 지배했던 ‘깨트리는 문화’에서 ‘가는 문화’로 기술상의 대혁신을 이루었다. 더욱 정교해진 손놀림으로 다양한 간석기들이 만들어졌다. 창과 활과 도끼 등 이음도구들이 발달했으며 실을 뽑고 그물을 만들었다. 물고기과 곡물들을 보다 다양한 조리법으로 식탁에 올릴 수 있게 되었고, 따뜻한 옷을 지어 입을 수 있게 되었다. 남은 곡식은 토기를 만들어 저장하였다. 초기의 원시농경은 생산력이 낮아서 여성들에 의해 전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랜 경험으로 야생곡물의 생장이치를 깨닫고 농경을 시작하였지만 그것이 처음부터 풍부한 산물을 안겨주었을 리는 없다. 임신과 육아를 담당해야 했던 여성들은 집 근처에서 간 돌도끼, 돌호미 등으로 농사를 짓고 수확물은 갈돌로 갈아서 토기로 된 시루에 찌는 등 요리를 했다. 남성들은 멀리 나가 활이나 창으로 말·사슴·들소 등을 사냥했으며 낚시와 어망으로 물고기를 잡았다. 개·돼지·소·양 등의 가축도 기르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남녀 간의 분업은 있었으나 아직 남녀의 차별은 없었으며, 잉여생산물이 적어 빈부의 차나 그로 인한 사람간의 차별도 거의 없었다. 경험이 풍부한 지도자는 있었을지언정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지배자는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 죽어서도 함께 씨족 공동묘지에 묻혔다. 이들은 마을 중앙에 있는 커다란 집이나 광장에서 마을 공동의 일을 함께 논의하고 종교적 의식을 집행했으며, 공동으로 생산하고 그 산물은 평등하게 나누어 가졌다. 이들의 관계는 서로 평등했다. 안정애, 전인서,pp.23-24.
신석기 후기에 이르면 농업 생산력이 상당히 증대되었다. 늘어난 생산물은 인구를 증가시키고 인간의 정신문화를 보다 풍족하게 하는 자양분이 되었으나, 이의 획득을 놓고 씨족 내부의 갈등이 생겨나고 다른 씨족과의 전쟁도 빈번하게 발생하게 되었다. 인간 사이의 억압과 지배의 새로운 관계가 시작된 것이다. 농경이 보다 확실한 생활수단이 되자 남성들의 근력이 더욱 중요하게 되었고 생산물이 증대될수록 남성의 권력은 강화되었다. 남성의 묘에서는 생산도구가, 여성의 묘에서는 물레 틀이나 머리 장식품 등이 출토되었다. 방직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생산 활동에서 남성의 역할이 더욱 중요시되면서 여성의 지위는 점차 남성에게 종속되어 부계 사회가 출현하였다. 저장할 곡식이 더욱 많아졌고 사유재산의 개념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남성들은 사유재산을 자신의 아이에게 상속하기를 바랐다. 분명한 자기아이임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어느 여성을 독점해야 했고 이에 따라 일부일처제의 혼인제도가 성립하게 되었다. 가끔 남녀 합장묘가 발굴되는 것은 이러한 현상을 알려준다. 세습적인 지도자가 출현하고 씨족 간의 평등한 관계도 깨어지기 시작했다. 집이나 묘지들은 이제 모양과 크기가 일정하지 않았으며,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