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경건에만 너무 많은 시간들을 투자하고 있다. 물론 이제는 사회적 성화로의 발걸음을 내딛는 교회가 많이 있지만, 여전히 교회의 인식속에는 ‘복음주의’라는 허물 좋은 천막을 치고 ‘개인주의적 경건’에만 몰두하고 있기에, 사회적인 성화로의 발걸음이 ‘기독교교육’을 통해서 가르쳐지지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개인주의적 경건을 제자화(Discipleship)으로 오히려 더 강화하면서도 시민양성(Citizenship)으로의 삶을 심각하게 묻는 물음은(225p) 실로 정확하고 명쾌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전체적으로 과거를 통해 현재를 바라보고 현재를 통해서 미래의 대신을 제시하는 임영택 교수의 교육신학의 문화적 접근은 현재 기독교 교육으로 하여금 ‘노를 젓는 일만’ 계속할 것이 아니라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5. 적용
‘교사들이여, 절대로 가르치지 마라’
이제 우리의 교육현장은 더 이상 내용 중심의 기독교교육(70p)을 이야기할 수 없다. ‘전달’은 더 이상 ‘돌봄’의 차원이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무런 접촉점을 이끌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전달’은 기독교교육의 내용인 복음(82p)의 가치를 공식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렇다면 이런 전인적 돌봄에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리고 제자화와 시민양성의 목적을 이루는 신앙공동체를 현장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나는 그 작업을 하나의 ‘건물’을 만드는 과정에 비유해 적용해 보고 싶다.
첫 째로, 측량의 작업이다. 하나의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그 건물이 짓기에 적합한 곳을 찾고, 측량을 해야 한다. 완전한 평지를 닦기 위한 조사의 작업과 더불어 그 지반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측량의 작업을 통해 확인해야 한다. 즉, 양육자인 교사는 학습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학습과 돌봄의 시작은 ‘관심’이다. 그러므로 교사는 학습자에 대한 사명적 요구에 따른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학습자의 가정, 학교, 학원 등 교회외의 현장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서는 교사는 학습자의 영적 상태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무엇에 관심하고 있는지, 지난 기독교교육의 습관들 속에서 영적기근의 상태에 있지는 않은지, 복음이 그 안에 있는지 등의 관심이 필요한 것이다. 방법에는 상담, 활동 등이 있지만 그 학습자에 맞는 접근이 필요하다.
둘 째로, 설계도면의 완성이다. 특히 급격하게 성장하며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이들과 청소년 시기에는 양육이 세밀하고 과학적이어야 한다(81p). 즉, 이러한 돌봄과 양육의 기초를 닦는 과정은 세밀하고 계획적인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여기에서 계획적인, 또는 목적이 있는 프로그램들이 정해져야 하고, 돌봄에 관심에 따른 전략이 세워져야 한다.
셋 째로, 터를 닦고 철근을 배근해야 한다. 즉, 기독교교육의 내용인 복음을 세우는 작업이다. 아무리 좋은 방법론을 적용하고, ‘관심’을 표명한다고 하여도 그 안에 복음이 없으면 학습자로 하여금 실존적인 물음에 서게 할 수가 없다. 십자가 앞에 서야 만이 자신의 존재를 깨닫고 ‘스스로’ 일어서 가는 법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철근을 배근하는 작업, 즉 복음을 심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그러나 자칫 지나친 내용에 충실한 교육으로 빠지는 우를 막기 위해서 교사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해야 한다.
넷 째로, 층을 쌓는 것이다. 이제는 제자화와 시민양성으로의 개발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절대적으로 교사가 유의해야 할 것은 ‘균형’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과 기독교적 민주시민이 되는 것은 전혀 다르지 않다. 오히려 제자가 되었다면 당연히 민주시민이 되어야 하는 과제를 갖게 되는 것이다. 제자화를 지나치게 강요하게 되면 개인적인 경건에 빠지므로 끊임없이 ‘자기 비움’의 과정을 통해 제자화로,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사회의 주체자로써의 민주적 시민화로 계속해서 발전해 나가야 한다.
다섯 번째로, 지붕을 올리는 일이다. 우선적으로 기독교교육의 현장은 ‘교회’이다. 이 교회는 ‘공동체’성을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 웨스터호프의 이야기처럼 신앙공동체는 사회화의 과정이며, 신앙의 나눔을 표현하고 변형하고 전달되는 과정이다(129-130p). 또한 이러한 공동체에서 ‘나눔’이 일어나지 않으면 아무리 기독교의 복음을 잘 전달하여도 ‘신앙적’이 될 수 없다(84p). 그러므로 신앙공동체 안에서 간세대간의 역할모델(role-model)이 일어나며, 나눔이 일어나며, 다름을 경험하게 되는 일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여섯 번째로, 출입문을 통해 사람을 들이고 나가는 일이다. 건물은 여러 가지 의미로 사람을 주거케 하며 또는 일을 하게 하는 공간이 된다. 어느 누구도 그 건물에서 죽을 때까지 있는 일은 없다. 즉, 완성된 건물은 누군가를 맞이하기도 하며, 때로는 나가기도 한다. 이는 교회가 신앙공동체의 모습을 가지지만 교회의 벽을 넘어서 민주사회의 주체로서의 발걸음을 내딛기도 하며, 모든 잠재된 학습자들이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 교육의 현장 중 중심이 되는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막11:17)이기 때문이다. 이 건물을 짓는 과정가운데 교사의 역할이 중요하였지만, 결국 이 집의 소유는 교사에게 있지 않은 것이다.
‘교사들이여, 절대로 가르치지 마라’
우리의 기독교 교육현장은 때로는 불가능한 목표를 이루어야 하는 ‘서바이벌’ 현장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왜곡된 가치관속에서, 부정적인 문화적 코드 속에서 정체성을 찾지 못하는 아이들이 소리없는 몸부림을 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교육현장 속에서 언제까지 ‘가르치고’, ‘요구하며’, ‘다그칠’ 것인가. 이런 교육현장은 마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다. 그렇기에 교사는 때로는 지치고 힘들 때가 많다. 나 역시 그렇다. 하지만 그 몸부림을 더 이상 뿌리칠 수가 없다. 아니, 그 몸부림이 나로 하여금 몸부림치게 한다. 가르치는 교사가 아닌 사랑하고 돌보는 교사가 있는 교육현장은 성령님의 일하심과 복음의 능력 속에서 결국엔 기독교교육의 목표를 이루어 낼 것이다. 그리고 그 것은 나의 현장에 있고, 우리의 현장에 있다.
이런 배경 속에서 개인주의적 경건을 제자화(Discipleship)으로 오히려 더 강화하면서도 시민양성(Citizenship)으로의 삶을 심각하게 묻는 물음은(225p) 실로 정확하고 명쾌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전체적으로 과거를 통해 현재를 바라보고 현재를 통해서 미래의 대신을 제시하는 임영택 교수의 교육신학의 문화적 접근은 현재 기독교 교육으로 하여금 ‘노를 젓는 일만’ 계속할 것이 아니라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5. 적용
‘교사들이여, 절대로 가르치지 마라’
이제 우리의 교육현장은 더 이상 내용 중심의 기독교교육(70p)을 이야기할 수 없다. ‘전달’은 더 이상 ‘돌봄’의 차원이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무런 접촉점을 이끌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전달’은 기독교교육의 내용인 복음(82p)의 가치를 공식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렇다면 이런 전인적 돌봄에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리고 제자화와 시민양성의 목적을 이루는 신앙공동체를 현장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나는 그 작업을 하나의 ‘건물’을 만드는 과정에 비유해 적용해 보고 싶다.
첫 째로, 측량의 작업이다. 하나의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그 건물이 짓기에 적합한 곳을 찾고, 측량을 해야 한다. 완전한 평지를 닦기 위한 조사의 작업과 더불어 그 지반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측량의 작업을 통해 확인해야 한다. 즉, 양육자인 교사는 학습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학습과 돌봄의 시작은 ‘관심’이다. 그러므로 교사는 학습자에 대한 사명적 요구에 따른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학습자의 가정, 학교, 학원 등 교회외의 현장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서는 교사는 학습자의 영적 상태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무엇에 관심하고 있는지, 지난 기독교교육의 습관들 속에서 영적기근의 상태에 있지는 않은지, 복음이 그 안에 있는지 등의 관심이 필요한 것이다. 방법에는 상담, 활동 등이 있지만 그 학습자에 맞는 접근이 필요하다.
둘 째로, 설계도면의 완성이다. 특히 급격하게 성장하며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이들과 청소년 시기에는 양육이 세밀하고 과학적이어야 한다(81p). 즉, 이러한 돌봄과 양육의 기초를 닦는 과정은 세밀하고 계획적인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여기에서 계획적인, 또는 목적이 있는 프로그램들이 정해져야 하고, 돌봄에 관심에 따른 전략이 세워져야 한다.
셋 째로, 터를 닦고 철근을 배근해야 한다. 즉, 기독교교육의 내용인 복음을 세우는 작업이다. 아무리 좋은 방법론을 적용하고, ‘관심’을 표명한다고 하여도 그 안에 복음이 없으면 학습자로 하여금 실존적인 물음에 서게 할 수가 없다. 십자가 앞에 서야 만이 자신의 존재를 깨닫고 ‘스스로’ 일어서 가는 법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철근을 배근하는 작업, 즉 복음을 심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그러나 자칫 지나친 내용에 충실한 교육으로 빠지는 우를 막기 위해서 교사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해야 한다.
넷 째로, 층을 쌓는 것이다. 이제는 제자화와 시민양성으로의 개발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절대적으로 교사가 유의해야 할 것은 ‘균형’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과 기독교적 민주시민이 되는 것은 전혀 다르지 않다. 오히려 제자가 되었다면 당연히 민주시민이 되어야 하는 과제를 갖게 되는 것이다. 제자화를 지나치게 강요하게 되면 개인적인 경건에 빠지므로 끊임없이 ‘자기 비움’의 과정을 통해 제자화로,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사회의 주체자로써의 민주적 시민화로 계속해서 발전해 나가야 한다.
다섯 번째로, 지붕을 올리는 일이다. 우선적으로 기독교교육의 현장은 ‘교회’이다. 이 교회는 ‘공동체’성을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 웨스터호프의 이야기처럼 신앙공동체는 사회화의 과정이며, 신앙의 나눔을 표현하고 변형하고 전달되는 과정이다(129-130p). 또한 이러한 공동체에서 ‘나눔’이 일어나지 않으면 아무리 기독교의 복음을 잘 전달하여도 ‘신앙적’이 될 수 없다(84p). 그러므로 신앙공동체 안에서 간세대간의 역할모델(role-model)이 일어나며, 나눔이 일어나며, 다름을 경험하게 되는 일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여섯 번째로, 출입문을 통해 사람을 들이고 나가는 일이다. 건물은 여러 가지 의미로 사람을 주거케 하며 또는 일을 하게 하는 공간이 된다. 어느 누구도 그 건물에서 죽을 때까지 있는 일은 없다. 즉, 완성된 건물은 누군가를 맞이하기도 하며, 때로는 나가기도 한다. 이는 교회가 신앙공동체의 모습을 가지지만 교회의 벽을 넘어서 민주사회의 주체로서의 발걸음을 내딛기도 하며, 모든 잠재된 학습자들이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 교육의 현장 중 중심이 되는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막11:17)이기 때문이다. 이 건물을 짓는 과정가운데 교사의 역할이 중요하였지만, 결국 이 집의 소유는 교사에게 있지 않은 것이다.
‘교사들이여, 절대로 가르치지 마라’
우리의 기독교 교육현장은 때로는 불가능한 목표를 이루어야 하는 ‘서바이벌’ 현장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왜곡된 가치관속에서, 부정적인 문화적 코드 속에서 정체성을 찾지 못하는 아이들이 소리없는 몸부림을 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교육현장 속에서 언제까지 ‘가르치고’, ‘요구하며’, ‘다그칠’ 것인가. 이런 교육현장은 마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다. 그렇기에 교사는 때로는 지치고 힘들 때가 많다. 나 역시 그렇다. 하지만 그 몸부림을 더 이상 뿌리칠 수가 없다. 아니, 그 몸부림이 나로 하여금 몸부림치게 한다. 가르치는 교사가 아닌 사랑하고 돌보는 교사가 있는 교육현장은 성령님의 일하심과 복음의 능력 속에서 결국엔 기독교교육의 목표를 이루어 낼 것이다. 그리고 그 것은 나의 현장에 있고, 우리의 현장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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