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기독교사] 일본 기독교 선교전략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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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기독교사] 일본 기독교 선교전략 연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AD%EC%82%AC, 2012년 12월 14일 검색
예수회 선교의 특징은 선교사가 가는 선교지마다 교육기관을 설립한 것이었다. 예수회가 세계각지에 설립한 교육기관의 수는 약 200개 이상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당시 신부인 발리냐노
Alexandro Valignano(1536~1606) 이탈리아 선교사. 예수회의 동양 순찰사로 1579년부터 1598년까지 일본에 3회 방문했다. 오토모 소린등 九州의 유지들을 개종 시켰으며, 활자 인쇄기를 도입하여 기리시탄판을 출판함.
가 일본선교에 대단히 공을 들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들이 세운 교육기관은 가톨릭교회 부속초등교육기관을 비롯한 Seminario 포르투칼어, 예수회의 선교사가 일본인 성직자 양성을 목적으로 1580년에 개설한 학교, 기독교, 라틴어, 음악, 수학 등을 가르쳤다. 1614년 막부의 금교령에 의해 폐쇄 됨
, Collegio 성식자 양성과 서구문화를 일본에 널리 전파하기 위해 예수회의 발리냐노가 설치한 학교, 신학, 종교학, 철학, 자연과학, 라틴어 등 고등교육을 실시했다. 1580년 분교의 오이타부내에 설립되어 박해를 받아 이전하였으며, 사전과 이야기책을 출판했으며 1614년 폐쇄 됨.
등 고등교육기관 설립, 유럽학문 전파, 기술, 예술 등을 일본에 처음 소개하였다. 그리고 이들 선교사들을 통하여 활자 인쇄술이 보급되어 Collegio 에서는 많은 도서가 출판 되었다. 예수회는 교육 및 출판사업과 더불어 의료사업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일본 오이타부내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 병원과 고아원을 설립하였으며 구제사업도 적극적으로 실시하였다. 하비에르에 의한 가톨릭 전파 이래 약 40년간 기타큐슈와 긴끼지방이 전도지 중심이 되었으며 로마 가톨릭은 신자수가 당시 약 20만(일본인구의 약 1%)에 달하는 대성과를 거두었다.
당시 일본신토의 토착신앙이나 불교가 강했던 시대에 가톨릭이 급속히 전파된 이유는 일본인의 민도를 살피고 예수회가 일본인에 적합한 선교방법을 선택했던 영향이 컸다. 예를 들면 일본인 대상의 일본어 교리문답서 작성, 일본인 사제의 양성, 학교 설립 등이다.
그러나 오다 노부나가가 부하에게 배반당하여 자살한 후 유력한 다이묘 가톨릭이 전래된 당시 일본은 군웅이 할거하는 전국시대로 중앙정부인 무로마치막부(1336~1573)의 권위가 약화되고 전국 각지에서는 ‘다이묘’라고 불리는 지방영주가 통치하였다.
로 등장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는 가톨릭에 대한 엄격한 태도를 견지하였다. 초기 히데요시는 가톨릭선교를 용인하였지만 1587년에는 돌연 금교령을 내리고 선교사의 국외추방령을 지시하였다. 이러한 금교령은 철저하게 지켜지지는 않았지만 히데요시의 병사 후 유력한 다이묘로서 1603년 에도막부(1603~1867)시대를 개막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 ~1616)는 가톨릭에 대하여 한층 가혹한 탄압정책을 펼쳤다. 1614년에는 금교령이 내려져 선교사와 기독교인들이 국외로 대거 추방당하였고 이에 따르지 않는 자는 순교 당하였다. 이 시기에 막부는 백성을 반드시 사원에 등록시키는 ‘단가제도 : 壇家制度’를 실시하였다. 에도막부에 의해 취해진 가톨릭 금교령에 의한 박해는 당시의 총인구 1,000만 명중 약 30-40만 명을 차지한 가톨릭 신자들이 거의 사라질 정도로 가혹한 것이었다. 그리고 간신히 살아남은 일부 사람들만이 ‘숨은 크리스천’ 이라고 불리며 비밀리에 계속 신앙을 지켜나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실시한 금교령의 배경에는 가톨릭선교사들의 출신국인 포르투갈과 스페인 등에 대한 경계심이 컸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들 선교사들은 당시 강대국의 제국주의 앞잡이로 간주되었다. 또한 일본전국을 평정한 이들이 일본 내의 사상적 통제와 일체화를 시도했기 때문이다.
일본전국에 카톨릭 금교령이 내려진 가운데 일본 각지에서 카톨릭 신자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이 행해졌다. 1637년 큐슈에서는 ‘시마바라의 난’ 영주의 가혹한 세금징세 때문에 견디기 힘들었던 농민이 일으킨 반란으로 많은 카톨릭신자들이 가담하였다.
이 발생했다. 에도막부는 다음해인 1638년 4월에 반란을 진압하고, 가담한 신자의 대부분을 처형하였다. 1639년 에도막부는 포르투갈선의 일본내항을 금지하였고 쇄국(청조나 네덜란드 이외의 국가와는 교역금지)정책을 실시하였다.
일본에서 개신교의 전례는 미국 개신교 각 교파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따라서 일본 개신교의 역사와 성격을 논의할 때 반드시 미국 개신교와의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 미국 개신교가 일본에 처음 전래된 것은 1859년 무렵이다.
1858년 미일수호통상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미국인이 거류하는 지역에 종교의 자유가 확보되었고 교회의 설립도 허가되었다. 그러나 일본인에 대한 일본 내 선교활동은 금지되었다. 미국 선교사들은 일본에서 선교활동이 허락되기 까지 일본어 연구와 성서의 번역에 전략을 기우렸다. 그리고 진료소와 양학학원 등을 개원하며 조용히 선교의 문이 열리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1873년 개신교 선교를 금지한 법이 철폐되자 세계 각 교파의 선교사들이 일본에 상륙하기 시작했고 선교활동도 활기를 띠게 되었으며 일본 전국도시를 비롯한 농어촌에까지 교회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 시기의 선교활동은 외국에서 온 선교사들이 주도하고 있었지만 점차 선교활동의 주체도 일본인으로 바뀌어 가기 시작하였다. 임영언, 일본 기독교 문화와 정신세계의 사적(史的)고찰, 조선대학교 동북아연구소, 2009, pp.2-5
2. 기독교 성장과 침체 그리고 부흥의 시대
일본인은 비로소 기독교 금지령이 해제되고 신앙의 자유를 찾게 되었다. 이 일로 나가사키에는 순교공원이 건립되고 일본 기독교의 성지가 되어서 아직까지도 그 때의 박해와 순교를 기리고 있다.
초기에는 교육과 의료를 바탕으로 옛 무사들의 자녀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통하여 지방도시와 농촌의 지주 등 중상위 계층의 선교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런 활동들을 통하여 선교사들의 직접적인 지도에서 젊은 전도자들을 키워내서 그들이 직접 선교활동을 하는 자립 전도가 전개되었다. 또한 요코하마, 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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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8.11.20
  • 저작시기20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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