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줄의 미스테리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를 고찰하다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넉줄의 미스테리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를 고찰하다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질적인 작자는 백수광부의 처라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연구자들의 견해는 곽리자고의 아내인 여옥을 작자로 인정하는 견해, 백수광부의 처를 원작자로 보고 여옥이 그것을 한역시켜 정착시킨 인물로 보는 견해 등으로 갈라져 있지만, 이들 의견이「공무도하가」를 개인의 창작물로 본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공무도하가」의 민요적 성격에 주목하여 특정인을 작자로 지목하지 않고 여러 사람들의 손을 거쳐 이루어진 작품으로 보는 견해가 조동일, 성기옥에 의해서 제기된다.
백수광부의 아내라는 특수한 개인이 겪는 경험의 특수성 때문에 「공무도하가」를 개인 창작시로 보는 연구자들의 견해에 대해서, 성기옥은 「공무도하가」에서 보여 주는 경험의 특수성이란 극적 독백체 민요인 까닭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그는「공무도하가」를 민요로 볼 수 있는 근거로 우선 전승 경로가 민요적이라는 점, 논란이 되고 있는 각 작자설이 제나름의 타당성을 지닌다는 것이 공동작의 민요임을 반증한다는 점, 시상의 전개구조가 민요 특유의 소박 단순함을 드러내고 있는 점, 민요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노래의 진술이 배경설화의 서사진행 과정을 그대로 좇아서 진행되고 있는 현상 등을 들었다. 전관수(일민최철교수화갑기념논문간행위원회), 『한국고전시가사』, (서울 : 집문당, 1997), pp.220-221
☞ 현재 전해지는 기록 자체가 모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각기 다른 해석들이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여러 견해들 중에서 「공무도하가」의 민요적 성격에 따른 다수인의 손을 거쳤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간다. 이러한「공무도하가」의 민요적 성격은 초기 두 문헌인 채옹의『금조(琴操)』와 최표의『고금주(古今注)』에서의 기록 내용상의 차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첫째, 위에서 언급했듯이 노래의 작자가 다르게 소개된다. 둘째, 전파의 과정이 다르다. 『금조』에서는 백수광부의 아내가 지은 노래를 곽리자고가 공후인으로 만들었다는 사실만 전하고 있으나, 『고금주』에서는 곽리자고가 목격한 사실을 여옥에게 전하고, 여옥이 이를 노래로 만들어 이웃 여자인 여용에게 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셋째, 세부적 묘사와 서술이 서로 다르다. 사건의 진행과 등장인물들의 행위를 전하는 부분에서 약간씩의 차이를 보인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서 볼 때, 「공무도하가」의 배경설화는 일종의 민간설화로서 유동성(流動性)과 적층성(積層性)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사건이 전승되면서 본래의 내용이 변모되거나 새로운 요소들이 덧붙여지는 현상을 통해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김학성(白影 鄭炳昱 先生 10週忌追慕論文集 刊行委員會), 『한국고전 시가작품론 1』,
鄭夏英, 「공무도하가의 성격과 의미」, (서울: 집문당, 1992), pp.16-17
「공무도하가」는 여성의 노래이며, 죽음으로 인한 이별의 슬픔을 담은 노래이다. 비록 백수광부와 그 처의 이야기라는 개인적 특수성을 빌려 소개되었지만, 그 주제는 보편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민요로 불리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5) 형성시기 및 전파과정
「공무도하가」의 형성시기와 전파과정에 대해서는 이와 관련한 자료가 전하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인 견해를 밝히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작품을 통한 추론에 의할 수 밖에 없다. 먼저 형성시기에 대한 가장 지배적인 견해는 고조선 때 생성되었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이 작품이 문자로 정착되기 이전 상당 기간의 구전과정(口傳過程)을 가진 민요적 작품임을 고려한 것이다. 오세창이 『대동시선』에서 「공무도하가」를 고조선의 시로 분류한 이후, 안자산(安自山)이나 조윤제 등도 이를 따르고 있다. 조동일도 『한국문학통사 1』에서 고조선이 국가적인 체제를 확립하게 되자 민간 무당이 불신되거나 배격되는 상황 속에서 생성된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또한 성기옥은 「공무도하가」가 기원전 3, 4세기에 대동강 유역의 토착주민들에 의해 불리던 아주 단순한 형태의 노동요였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시간의 경과에 따라 향수층이 확대되어 나중에는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민요가 되었고 위만조선 말기(기원전 2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음악적으로 세련된 기악 음곡으로 상승되었으리라고 보았다. 전관수 (일민최철교수화갑기념논문간행위원회), 『한국고전시가사』, (서울 : 집문당, 1997), pp.221-222
☞ 이 부분은 솔직히 내 자신의 의견을 내기에는 너무도 연구지식이 미약하다. 그래서 고조선 때에 생성
  • 가격1,600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18.11.25
  • 저작시기2018.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071331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