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개념 정의
◎ 우리네 삶을 닮은 영화 <여자, 정혜>
◎ 느슨한 5단계 구조
◎ 소통을 두려워하는 여자, 정혜
◎ 닫힌 공간, 열린 공간
◎ 영화보다 낯선 삶
<여자, 정혜> 장면분할표
◎ 우리네 삶을 닮은 영화 <여자, 정혜>
◎ 느슨한 5단계 구조
◎ 소통을 두려워하는 여자, 정혜
◎ 닫힌 공간, 열린 공간
◎ 영화보다 낯선 삶
<여자, 정혜> 장면분할표
본문내용
려워하는 여자, 정혜. 소통하는 법을 잘 몰랐기 때문에 정혜는 외려 세상으로부터 무관심한 태도를 취했던 것이 아닐까. 서툴게 손을 내밀었다가 비웃음을 당하거나 거절당한 경험들이 정혜로 하여금 자신의 안으로 침잠하게 만들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여자, 정혜>의 결말은 많은 여운을 남긴다. 처음으로 소리내어 엉엉 운 직후에, 자신이 일부러 떠나보냈던 존재인 고양이를 다시 찾으러 간 정혜 앞에 나타난 작가인 듯한 남자와 정혜는 과연 소통할 수 있을까. 그와의 관계를 통해 소통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닫힌 공간, 열린 공간
영화 속 정혜의 세계는 크게 직장인 우편취급소, 엄마와 함께 살았던 아파트의 거실과 부엌, 동료들과 가는 호프집, 마을버스 등의 거리, 그리고 고모부를 만난 체육공원으로 나뉜다. 그런데 정혜의 공간들은 정혜에게 일반적인 ‘상식’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소통’을 도와주는 공간인 우편취급소에서 다른 이들의 ‘소통’을 매개해주는 직업을 가진 정혜는 그러나 그 공간 속에서 동료들과도 마음을 열고 나누지 못한다. 그것은 영화 속 단 세 번 울리는 정혜의 ‘휴대폰’이 갖는 의미와도 일맥상통한다. 일반적으로 ‘휴대폰’은 현대사회에서 소통을 더욱 쉽게 해주는 매개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정혜에게 오랫동안 번호를 바꾸지 않고 소지한 휴대폰은 한때 결혼했던 남자가 자신이 다시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하는, 다시 말해 그 남자와의 연이 끊어짐을 전하는 매개체이며 엄마의 제사에 오지 못한다는 고모의 말을 전하는 매개체이고 번호를 잘못 눌렀다는, 자신이 오랫동안 잊혀진 존재였다는 것을 깨우쳐주는 친구의 말을 전하는 매개체로 존재한다. 더 나아가 끊임없이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는 동료 2는 정혜를 함께 있으면서도 소외된 존재로 만들고 모텔방의 남자의 휴대폰 통화는 정혜와 그 남자와의 사이에서는 아무 일도 벌어질 수 없다는 것을 상징한다. 함께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공간인 호프집에서도 정혜는 TV만을 보거나, 고양이 걱정에 집에 갈 생각만 하고 주변에서는 소통이 아닌 싸움이 벌어진다.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매개체가 될 수도 있는 마을버스 역시 정혜에게는 작가인 듯한 남자를 피해 도망치듯 올라타는 곳이고 극단적으로 사방으로 열린 공간인 체육공원은 전혀 소통이 불가능한 고모부와 정혜의 관계를 더욱 강조한다.
반면 삼중으로 문을 걸어잠근 아파트 안에서 정혜는 고양이와 소통을 시도하고 홈쇼핑 채널을 통해 세상과의 끈을 유지한다. 정혜가 자신을 돌아보고, 손을 내밀까 고민하고, 마침내 소리내어 울기까지 하는 공간이 가장 개인적인 밀실인 ‘화장실’이라는 것도 정혜의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아이러니다.
이처럼 영화 속 정혜의 공간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동일한 공간이 특정한 어떤 이들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치로 설정되어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 영화보다 낯선 삶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선 굵고 분명한 성격의 주인공이 등장해서 명확한 목표와 욕망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그 과정에서 일생에 한두번 벌어질까 말까한 극적인 사건들이 전개되는 영화들, 인과관계가 명확해서 의문의 여지가 남지 않는 영화들, 그래서 때로는 대리만족을, 때로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끔 해주는 영화들. 그러나 이처럼 극적인 상황과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화들은 오히려 우리에게 굉장히 친숙하고 익숙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의외로 우리가 실제로 처한 현실은 영화보다 낯설다. 왜 나는, 내 친구는, 내 이웃은 이런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지, 왜 우리에게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지 납득할 수 없는 일들 투성이다. 한번쯤 돌아보자. 오늘 내게 벌어지는 일들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나의 오늘의 행동들은 과연 그럴 법한 일들이었는지. 우리는 너무나 자주 그런 말들을 내뱉지 않는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이게 말이나 될 법한 상황이야” “걔는 도대체 왜 그런대”와 같은.
<여자, 정혜>가 낯선 이유는 그러한 일상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개연성이 부족한 행동들,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의 반응, 난해하기 짝이 없는 현실의 여러 상황들. 이처럼 ‘꿈’을 그리는 영화가 아니라 ‘현실’을 묘사하는 영화이기 때문에 <여자, 정혜>는 고전적 내러티브가 아닌 대안적 내러티브, 그 중에서도 지나치게 현실같지 않은 안티플롯이 아니라 미니플롯을 차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연성, 수동적 주인공, 내적 갈등, 열린 결말은 대부분의 우리네 삶이 지닌 모습을 닮아있다. 역으로 특정 요소들만을 골라내어 담아놓은 ‘액자’가 아니라 우리네 삶을 그대로 비추는 ‘창’으로서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영화는 우연성, 수동적 주인공, 내적 갈등, 열린 결말과 같은 미니플롯의 요소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영화는 우리네 삶을 빼닮았기 때문에 관객은 이 영화를 보는 것이 불편하고 낯설고 힘겨울 수 있다. 그것은 “연예인 A와 B가 깨졌대, B가 바람을 폈다나봐”라고 수다를 떨기는 쉬워도 그것이 나의 이야기, 친구의 이야기, 가족의 이야기가 될 때는 그렇게 마음 편하게 수다를 떨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나의 것이 아닌 이야기일 때에는 심리적으로 거리를 둘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감정을 이입하기도, 그러한 전개나 결과를 이해하거나 용납하기도 쉬워진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이야기, 내 바로 옆에 실재하는 이야기가 되면 복잡하고 불편해지고 힘겨워질 수 있다.
현실에서 잠깐이라도 도피해서 꿈을 꾸기 위해서 영화라는 매체를 선택하는 많은 이들에게 따라서 현실을 닮은 대안적 내러티브는 부담스러운 선택일 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대안적 내러티브가 난해한 ‘예술영화’라서가 아니라 그 내러티브가 가지고 있는 ‘실재성’이 불편해서 상업적, 대중적 성공을 거두기 쉽지 않은 측면이 있다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여자, 정혜> 속 정혜가 여성을 다룬 고전적 내러티브의 페미니즘영화에 딱 맞을 법한 상처를 가지고 있음에도 정혜의 상처가 아니라, 정혜가 사는 오늘의 현실을 그리기 위해 이 영화에서는 실재의 현실의 특징을 담은 대안적 내러티브의 구성요소들이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여자, 정혜>의 결말은 많은 여운을 남긴다. 처음으로 소리내어 엉엉 운 직후에, 자신이 일부러 떠나보냈던 존재인 고양이를 다시 찾으러 간 정혜 앞에 나타난 작가인 듯한 남자와 정혜는 과연 소통할 수 있을까. 그와의 관계를 통해 소통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닫힌 공간, 열린 공간
영화 속 정혜의 세계는 크게 직장인 우편취급소, 엄마와 함께 살았던 아파트의 거실과 부엌, 동료들과 가는 호프집, 마을버스 등의 거리, 그리고 고모부를 만난 체육공원으로 나뉜다. 그런데 정혜의 공간들은 정혜에게 일반적인 ‘상식’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소통’을 도와주는 공간인 우편취급소에서 다른 이들의 ‘소통’을 매개해주는 직업을 가진 정혜는 그러나 그 공간 속에서 동료들과도 마음을 열고 나누지 못한다. 그것은 영화 속 단 세 번 울리는 정혜의 ‘휴대폰’이 갖는 의미와도 일맥상통한다. 일반적으로 ‘휴대폰’은 현대사회에서 소통을 더욱 쉽게 해주는 매개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정혜에게 오랫동안 번호를 바꾸지 않고 소지한 휴대폰은 한때 결혼했던 남자가 자신이 다시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하는, 다시 말해 그 남자와의 연이 끊어짐을 전하는 매개체이며 엄마의 제사에 오지 못한다는 고모의 말을 전하는 매개체이고 번호를 잘못 눌렀다는, 자신이 오랫동안 잊혀진 존재였다는 것을 깨우쳐주는 친구의 말을 전하는 매개체로 존재한다. 더 나아가 끊임없이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는 동료 2는 정혜를 함께 있으면서도 소외된 존재로 만들고 모텔방의 남자의 휴대폰 통화는 정혜와 그 남자와의 사이에서는 아무 일도 벌어질 수 없다는 것을 상징한다. 함께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공간인 호프집에서도 정혜는 TV만을 보거나, 고양이 걱정에 집에 갈 생각만 하고 주변에서는 소통이 아닌 싸움이 벌어진다.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매개체가 될 수도 있는 마을버스 역시 정혜에게는 작가인 듯한 남자를 피해 도망치듯 올라타는 곳이고 극단적으로 사방으로 열린 공간인 체육공원은 전혀 소통이 불가능한 고모부와 정혜의 관계를 더욱 강조한다.
반면 삼중으로 문을 걸어잠근 아파트 안에서 정혜는 고양이와 소통을 시도하고 홈쇼핑 채널을 통해 세상과의 끈을 유지한다. 정혜가 자신을 돌아보고, 손을 내밀까 고민하고, 마침내 소리내어 울기까지 하는 공간이 가장 개인적인 밀실인 ‘화장실’이라는 것도 정혜의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아이러니다.
이처럼 영화 속 정혜의 공간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동일한 공간이 특정한 어떤 이들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치로 설정되어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 영화보다 낯선 삶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선 굵고 분명한 성격의 주인공이 등장해서 명확한 목표와 욕망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그 과정에서 일생에 한두번 벌어질까 말까한 극적인 사건들이 전개되는 영화들, 인과관계가 명확해서 의문의 여지가 남지 않는 영화들, 그래서 때로는 대리만족을, 때로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끔 해주는 영화들. 그러나 이처럼 극적인 상황과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화들은 오히려 우리에게 굉장히 친숙하고 익숙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의외로 우리가 실제로 처한 현실은 영화보다 낯설다. 왜 나는, 내 친구는, 내 이웃은 이런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지, 왜 우리에게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지 납득할 수 없는 일들 투성이다. 한번쯤 돌아보자. 오늘 내게 벌어지는 일들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나의 오늘의 행동들은 과연 그럴 법한 일들이었는지. 우리는 너무나 자주 그런 말들을 내뱉지 않는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이게 말이나 될 법한 상황이야” “걔는 도대체 왜 그런대”와 같은.
<여자, 정혜>가 낯선 이유는 그러한 일상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개연성이 부족한 행동들,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의 반응, 난해하기 짝이 없는 현실의 여러 상황들. 이처럼 ‘꿈’을 그리는 영화가 아니라 ‘현실’을 묘사하는 영화이기 때문에 <여자, 정혜>는 고전적 내러티브가 아닌 대안적 내러티브, 그 중에서도 지나치게 현실같지 않은 안티플롯이 아니라 미니플롯을 차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연성, 수동적 주인공, 내적 갈등, 열린 결말은 대부분의 우리네 삶이 지닌 모습을 닮아있다. 역으로 특정 요소들만을 골라내어 담아놓은 ‘액자’가 아니라 우리네 삶을 그대로 비추는 ‘창’으로서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영화는 우연성, 수동적 주인공, 내적 갈등, 열린 결말과 같은 미니플롯의 요소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영화는 우리네 삶을 빼닮았기 때문에 관객은 이 영화를 보는 것이 불편하고 낯설고 힘겨울 수 있다. 그것은 “연예인 A와 B가 깨졌대, B가 바람을 폈다나봐”라고 수다를 떨기는 쉬워도 그것이 나의 이야기, 친구의 이야기, 가족의 이야기가 될 때는 그렇게 마음 편하게 수다를 떨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나의 것이 아닌 이야기일 때에는 심리적으로 거리를 둘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감정을 이입하기도, 그러한 전개나 결과를 이해하거나 용납하기도 쉬워진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이야기, 내 바로 옆에 실재하는 이야기가 되면 복잡하고 불편해지고 힘겨워질 수 있다.
현실에서 잠깐이라도 도피해서 꿈을 꾸기 위해서 영화라는 매체를 선택하는 많은 이들에게 따라서 현실을 닮은 대안적 내러티브는 부담스러운 선택일 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대안적 내러티브가 난해한 ‘예술영화’라서가 아니라 그 내러티브가 가지고 있는 ‘실재성’이 불편해서 상업적, 대중적 성공을 거두기 쉽지 않은 측면이 있다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여자, 정혜> 속 정혜가 여성을 다룬 고전적 내러티브의 페미니즘영화에 딱 맞을 법한 상처를 가지고 있음에도 정혜의 상처가 아니라, 정혜가 사는 오늘의 현실을 그리기 위해 이 영화에서는 실재의 현실의 특징을 담은 대안적 내러티브의 구성요소들이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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