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칼뱅)에 있어서의 교회와 국가론 [교회와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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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칼빈(칼뱅)에 있어서의 교회와 국가론 [교회와 국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면서

Ⅱ. 칼빈의 교회론와 국가론의 형성배경
1. 교회론의 형성 배경
2. 국가관의 형성배경

Ⅲ. 칼빈이 본 교회와 국가의 관계
1. 세상 권세와 크리스천
2. 교회와 국가의 상관관계
3. 교회와 국가의 차이점

Ⅳ. 루터와 칼빈의 교회와 국가 관계에 대한 이해

Ⅴ. 나가면서

본문내용

또 성례전을 통하여 그 믿음이 확인되므로 성례전 역시 교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Deus lonuens)으로 교회는 성경을 연구하는 것으로 충분하고 오히려 계속 선포하여야 하고 복음은 기록되어져야 할 뿐 아니라 육체적 음성으로 선포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성령의 조명과 감화 가운데 기록된 말씀과 설교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도록 해야 한다.
루터는 ‘너희는 왕같은 제사장이다’(벧전 2:9) 말씀을 중요시 한다. 성직자와 평신도는 다 같은 성도로서 성직자는 다만 교역의 사무를 맡는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사제의 직이 지위나 특전이 아니라 성경의 의무로 이해한 것이다. 이것이 루터의 교회론의 절정이료 가장 탁월한 특성으로 꼽을 수 있다.
교회는 그 본질상 성도의 교제(communio sanctorum)이지만 그 선택된 자는 오직 하나님만이 알고 계시기 때문에 감추어져 있고 불가시적이다. 루터는 교회 건물을 뜻하는 Kirche보다는 성도의 교제(communio sanctorum)를 즐겨 사용한다.
루터는 이 혼합되어 나타나빚 이 경험적인 교회를 보면서 ‘내적인 기독교’, 곧 제1의 것, 본래적이고 근본적이며 순수한 것과 ‘외적인 기독교’, 곧 사람이 만든 제2의 것 외면적인, 신체적인, 외적 세계를 구분하게 된다. 이는 멀리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개의 도성, 두 왕국, 두 영역(realms)에서 온 것으로 루터는 먼저 복음과 율법의 구별에서 시작하고 있다.
루터는 ‘가시적’, ‘불가시적’이라는 말보다는 육적(bodily), 영적(spiritual)이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들은 영혼과 육체사이의 관계처럼 분리하여 생각할 수도 없다.
이 두 가지 교회 역시 분리된 것이 아니고 신령한 불가시적 교회는 말씀의 교회로서 외부적으로는 규정할 수 없는 방법으로 거듭남을 가져다 주고 보이는 교회의 성례전은 그것을 외적으로 증거해 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2. 국가관의 형성배경
(1) 사상적 배경 :16C 인물주의 이장식, 기독교 사상사 제2권, (서울:대한 기독교서회, 1966), p.298.
칼빈에게 있어서 인문주의의 영향이 중요하다는 것은 칼빈의 정치적 관심이 그의 신학연구 이전에 이미 인문주의의 연구에 그 시작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문주의에 대한 칼빈의 관심은 Orleans, Bourges 대학 등에서 헬라어, 문학, 법률학 등을 공부하면서 깊어졌다. 또한 칼빈은 당시의 저명한 인문주의자들과의 폭넓은 교제를 나누기도 했다.
칼빈의 인문주의 작품은 1532년에 출판된 ‘Commentary on the De clemetia of Seneca\'였다. 칼빈은 이 작품에서 그의 해박한 지식과 스타일로 인한 에라스무스, 부드 그리고 다른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완성된 인문주의적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커다란 관심을 끌기에 충한 작품이었다. 이 작품이 그의 ’기독교 가요‘를 비롯한 후대의 저술과 관계되는 것은 그의 라틴어, 불어의 정확성, 간결성, 명확한 수사법과 내용면에 있어서 강렬한 도덕적 기풍과 자기훈련에 대한 관심이다. 특히 그가 세네카에게서 배운 도덕주의는 그의 인문주의자로서 모험과 훗날 신학자로서의 발전 사이를 잇는 교량 역할을 해주고 있다.
또한 학자들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가 씨에로의 철학논문에 많이 의존하고 있음을 지적하였고 고대의 라틴, 헬라 저자들로부터 많은 부분이 인용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칼빈의 젊은 날 인문주의에 대한 관심은 단지 지적 갈증만을 해결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교회 개혁사상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고 그와 같은 확신 위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틸리히는 칼빈의 인문주의적 경향이 그의 국가 이해에 미친 영향을 칼빈이 루터보다 훨씬 많은 권한을 국가에 부여한 사실에서 찾으려고 한다. 루터는 국가에게 악을 억제하고 사회를 혼란으로부터 지키는 권리만 인정했으나, 칼빈은 선한 통치란 죄를 억압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그 시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기 위해 존재한다고 함으로써, 인문주의적인 국가이념을 대표한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칼빈의 인문주의적 영향은 그의 국가이해의 현장인 제네바 시정에서 구체적으로 발견된다. 바질 홀(Bosil Hall)의 설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칼빈의 인문주의 제네바를 신학을 비롯한 학문 연구와 새로운 시민의
이상이 실천되는 중심지로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둘째, 칼빈의 인문주의적
방법은 그의 성서연구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났다. 그는 성서를 사색, 예증,
불확실한 지식으로 부터가 아니라, 헬라어, 히브리어, 텍스트로부터 직접적
으로 끌어내어 연구하였다. 셋째, 제네바시의 인쇄업이 발전하여 칼빈 자신의
책뿐 아니라 개혁가들의 책들을 계속 출판하게 된 것은 그의 인문주의 영향
의 결과 였다. 넷째, 제네바 대학 등 새로운 스타일의 교육을 개혁, 발전 시
킨 것으로 이는 그의 인문주의의 훌륭한 열매였다.”
그러나 인문주의가 칼빈의 모든 신학 특히 국가관의 결정적인 기초가 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비록 인문주의적 색채만은 그의 생애 마지막 날까지 계속되었지만 그의 회심을 전후하여 이후 갈수록 강하게 된 성서적, 신학적인 틀 속에 용해되어 칼빈의 사상 속에 한 요소로만 남게 되었다. 그의 인문주의자로서의 특징인 도덕성과 법률가로서의 특징인 질서에 대한 열정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라고 하는 신학의 틀 속에 용해되었다.
(2) 정치적 배경으로서의 제네바 상황
칼빈의 제네바 시정은 칼빈의 국가이해의 시범을 보여준 최초의 현장이었다. 칼빈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도덕적 이상들은 그 출발로부터 제네바의 특수한 정황이 아니였더라면 성취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의 신학은 제네바의 교회에서 자라났고 이선교의 현장에서 구체적 신앙고백의 확신을 얻어 학문적으로 전개된 것이라 해도 좋다.
확실히 제네바시는 프랑스, 스코틀랜드, 독일 등 훗날 개혁교회라 불리우는 교회들이 조직을 위한 모델이었다. 1514년, 소위 칼빈의 제2기 제네바 시정으로부터 구체적으로 구조화된 제네바시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칼빈의 신학적, 성서적 확신 외에도 쯔빙글리의 가르침, 스트라스부르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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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9.01.11
  • 저작시기2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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