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주의 연구] 새벽기도회와 신비주의- 초기한국교회 및 오늘날한국교회 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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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신비주의 연구] 새벽기도회와 신비주의- 초기한국교회 및 오늘날한국교회 새벽기도회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버지가 매일 새벽에 일찍 일어나시어 기도하시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주 예수 애워(主耶蘇 愛我)란 말의 ‘예수사랑하심은’의 중국말 찬송을 부르시곤 하였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김광수, “새벽기도를 새롭게 하자”, 『월간목회』, 138호(1988. 2), 25-26.
새벽기도회에 대한 선교부의 보고문서도 있다. 1904년 북장로회 평양선교부 보고에는, 그 해 연초에 평양에서 거행된 겨울 사경회 때 참석자들이 묵고 있는 집마다 “동틀 무렵 기도와 찬양”을 드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고 보고하였다. 이덕주, “초기 한국 토착교회 형성과 종교문화”, 『신학과 세계』, 50호(2004. 여름), 감리교신학대학교, 179.
새벽기도회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보고는 1904년 9월에 열렸던 이화학당의 부흥회와 관련된 선교보고에 나온다. 이화학당 교장 프라이(L. E. Frey)의 ‘1905년 선교보고’ 관련 기사는 다음과 같다. “학교를 개학했을 때, 전에 다니던 학생 말고도 스무 명 정도가 새로 들어왔는데 대부분 교인 집안 출신입니다. 하디(R. A. Hardie) 박사께서 고맙게도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학생들을 위해 정동제일교회에서 부흥회를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흥회가 열리기 두 주일 전부터 매일 세 차례 예배를 드렸습니다. 마지막 주간 집회 때, 저는 페인(Paine)양과 함께 저녁 집회에 참석했는데 학생들은 매일 밤 자정까지 자기 죄를 자백하며 우리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우리는 이른 아침에 학생들이 하나 둘 몰래 예배실로 들어와 기도하는 것을 목격하였는데, ‘언제, 어느 때 죄를 사함 받았느냐’고 물으면 그들 중 대다수는 ‘어느 날 아침 예배실에서 혼자 기도하다가 확신을 얻어노라’고 했습니다. 부흥회 여파는 1년 내내 지속되었습니다.” L. E. Frey, \"Ewa Haktang-Seoul\", Annual Reports of the Korea Woman\'s Conference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1905, 5. 이덕주, “한국 교회의 새벽기도 전통”, 『세계의 신학』, 111에서 재인용.
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04년 9월, 학교 개학을 맞아 원산부흥운동의 주역이었던 하디(R. A. Hardie)는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학생들을 위해 정동교회에서 부흥회를 해주기로 하였다. 부흥회를 앞두고 이화학생들은 2주간의 준비 기도회를 가졌다. 그리고 이 기도회 기간 중에 이화학당 학생들은 은혜를 경험했고, 자발적으로 이른 아침에 새벽기도를 한 것이다.
2.2 교회적인 기도회로의 발전
산발적으로 일어났던 새벽기도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교회적인 기도회로 발전하게 된다. 이 때 1906년 당시 평양 장로회신학교 졸업반 학생이자 평양 장대현교회 조사로 있던 길선주가 그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여기서는 개인적인 기도에서 교회적인 기도회로 발전하는 단계를 보여준다. 『신앙생활』에서 김인서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선생(先生)은 입신(入信) 처음부터 기도(祈禱)와 성경연구(聖經硏究)를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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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9.02.04
  • 저작시기2019.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08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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