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주의 연구] 한국 종교와 신비주의 (종교심성 무교와 불교 도교 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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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신비주의 연구] 한국 종교와 신비주의 (종교심성 무교와 불교 도교 유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들어가는 말
2. 한국인의 종교심성
3. 무속 신앙
4. 무교와 불교의 만남-삼국~통일신라
5. 무교․ 불교․ 도교 (도참신앙)․ 유학의 만남-라말 여초
6. 무교․ 불교․ 유교의 만남- 여말 선초
7. 나가며
한국 종교와 기독교의 만남-교회안의 신비적 무속신앙 영향
**참고 문헌**

본문내용

회,1974),p.32.
<백제>: 백제의 불교는 침류왕 2년에 호승 동진으로부터 마라난타가 들어와서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나라 《고승전》에 의하면 난타란 스님이 여환 삼매를 얻어 물속에 들어가도 젖지 않으며, 불속에서도 타지 않고, 능히 金石을 무궁무진하게 변화시켰다고 한다. 이 난타가 동일인인지는 알수 없으나 神異가 통하지 않는 데 없고, 한 곳에 잠시라도 머물러 있지 않으며, 가지 않는 곳 없이 뜻하는 대로 순람을 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매우 적극적이며 활동적인 道人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고 한다. 이기영, 『한국의 불교』(서울: 교양국사총서 편찬위원회,세종대왕 기념사업회,1974),p.36.
<신라>:신라의 경우 고구려 백제와는 달리 표면상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법흥왕 15년(528 년), 이차돈이 군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신봉은 공인되고 장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다 참형을 자청 순교한 후, 이적 이차돈은 죽기 전에 ‘제가 이제 진리를 위해 기꺼이 형을 받지만 바라옵건대 의리르 일으키소서, 부처님이 신령하시면 제가 죽은 뒤에 반드시 異蹟이 일어날 것이옵니다.’하고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였다고 한다. 잠시후 그의 머리를 베자 머리는 멀리 금강산 꼭대기에 떨어지고, 잘린 목은 흰젖이 수십잗이나 솟아올랐으며, 갑자기 깜깜해진 하늘에서는 아름다운 꽂이 비오듯 떨어지고 땅이 크게 진동하였다고 한다.
에 놀란 신하들의 회개를 받아들여 비로소 수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법흥왕은 불교를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고 불력을 이용하여 국운을 번영시키려 하였다. 이기영, 『한국의 불교』(서울: 교양국사총서 편찬위원회,세종대왕 기념사업회,1974),p.42.
삼국이 공통적으로 불교의 원리적인 면보다는 기복적이거나 神異的 요소를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토착적 신앙을 토대로 받아들이기가 수월하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국가의 적극적인 흥불 정책에 힘입어 불교를 대중화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을 뿐 만아니라, 무교적 신앙의례가 불교적으로 대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윤사순, 고익진 『한국의 사상』,(서울: 열음사 .1984). p.13.
2) 통일신라의 불교
통일 신라 시기에는 불교의 토착화 작업이 마무리 되면서 대승불교에 대한 연구가 발생했다. 대승 불교는 업설과 종교적 차원이 크게 다르다. 대승불교가 세속을 긍정하는 입장에서 빛나는 역사를 창조하였다면, 업설은 탈속적인 피안의 해탈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승교학의 발생과 더불어 제기된 世間과 出世間의 차별, 中觀과 唯識의 대립 중관은 모든 존재의 자성을 철저히 부정하는데 대해 유식은 그런 부정을 통해 나타나는 궁극적인 진리를 인정하고 있다. 이것이 佛滅 후 1000년 인도 대승철학에 발생한 空(中觀)과 유(唯識)의 대립이라는 것이다.
이라는 두가지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 두 문제를 극복한 이론을 개발한 사람이 원효(617~686)와 의상(625~702)이다. 원효철학은 한마디로 起信論의 재발견이라 할 수 있다. 원효는 ‘一心에 의해 二門이 있다.’고 전제한다. 이문이 화합된 一心은 궁극적인 本源에서 두 법문의 상호작용을 통해 커다란 體 相 用을 발현한다. 기신론은 이런 종교적 경지를 대승의 목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윤사순, 고익진 편 『한국의 사상』,(서울: 열음사 .1984). p.15~16.
10) 한영우, 『다시 찾는 우리역사』.(서울: 경세원, 1997). p.168.
원효는 ‘無歌’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여러 마을을 돌아다며 무식한 대중들을 교화시켰다. 그는 ‘나무아미타불’만 염불하면 누구나 아미타불이 사는 서방정토, 즉 극락세계로 가서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설교하여 신라인의 대부분이 정토신앙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아미타불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모든 인간이 왕생한다는 구원론에 입각한 것이 정토신앙이다. 신비적인 경험을 열어 주는 아미타불의 본원에 힘입어 극락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정희수,「불교적 신앙의 구조와 의미」『한국종교와 한국신학』소석 유동식박사 고희기념논문집,1993.p.224.
비슷한 착상이 화엄종에서도 발견된다. 의상의 화엄사상이 그것이다. 의상의 화엄사상을 흔히 ‘중앙집권적 전제왕권을 뒷받침하기 위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였다고 보고 있으나, 그보다는 신앙적인 차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화엄경은 유난히 많은 天神들이 등장하고, 經이 설해지는 장소도 지상과 欲界天에서이다. 화엄경의 주존불인 毘盧자那(비로자나)는 ‘태양’이라는 뜻이다.
화엄경의 이러한 세계구조는 불교 전래 이전의 무교적 세계관과 비슷하다. 그 곳에서는 ‘하늘-임’이 최고지배신이 되고, 그 아래 무수히 다신교적 자연신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의 천신과 무교의 천신은 본질적 차이가 있지만 세계의 구조적인 면에서 상통한다. 이러한 화엄사상과 통일기 신라 왕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은 무교를 배경으로 신성불가침의 권위를 확립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정치이념과 이론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정치이론은 실제적인 부문을 담당한 것은 국학(유학의 도입)에서 비롯된다. 윤사순, 고익진 편 『한국의 사상』,(서울: 열음사 .1984). p.15~16.
그런데도 여전히 무교는 지배자적인 이데올로기와는 상관없이 공동체의 굿의 형식으로 전승되어지고 있었다. 무속의 신관이나 인간관은 종교적 체계를 갖고 있지 않지만 복을 빌고 재앙을 피하게 하려는 제의 절차가 무당의 망아적 경험 속에서 행운, 招福, 除災, 治病 등의 생활 문제로 집약되는 것이다. 정진홍,『基督敎와 他宗敎와의 대화』,(서울: 전망사, 1980). p.142.
5. 무교 불교 도교 (도참신앙) 유학-라말 여초
신라 불교는 화엄사상아래 찬란한 문화를 이룩하지만 하대에 들어서면서 정신적 추락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시기 불교는 불교입장에서는 매우 타락한 주술적 속된 신앙인 무교와 혼합으로 어울려져 있었다. 예를 들면 분황사 우물이 있는 용 세 마리를 당나라 사신이 저주하여 작은 고기로 만들었다는 이야기, 김현과 호녀의 이야기로 얽힌 호원사, 헌강왕 때 처용의 이야기는 동해의 용의 한 아들인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서 재앙의 귀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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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9.02.04
  • 저작시기20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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