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연구] - 한국공산주의 운동사3 - 강독 보고서 - 강요된 행진 유일체제의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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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연구] - 한국공산주의 운동사3 - 강독 보고서 - 강요된 행진 유일체제의 형성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주요내용
가. 강요된 행진
나. 유일체제의 형성

Ⅱ. 평가 및 의견
가. 관심 포인트
나. 의문사항
다. 성과와 한계
라. 문제제기

본문내용

회복 불가능 상태
5. 소련 모델에 따른 경제발전
o 휴전협정 직후 김일성은 경제발전을 초우선 순위에 두겠다고 천명
- 중공업에 우선순위를 두는 소련식 발전모델을 채택
- 1단계로 인민경제 복구건설의 준비단계, 2단계는 인민경제 복구건설 3개년 계획 수행, 3단계는 전반적인 공업화의 기초를 축성하기 위한 5개년 계획 작성
o 소련 및 중공, 체코, 폴란드, 헝가리, 동독 등 사회주의 국가의 국제적 지원 확보
- 소련은 10억루블 지원 및 전쟁채무의 절반 탕감, 잔액의 상환기일 연장과 함께 기본적인 중공업시설 건설을 대규모로 지원, 중공은 북한에 생활필수품을 공급하고 교통시설 복구에 참여, 체코는 수력발전소 건설, 폴란드는 탄광 복구, 헝가리는 화학공장, 동독은 디젤엔진 공장 등
- 이 결과 투자와 숙련 인력을 우선적으로 배분받은 중공업, 특히 야금, 기계, 수력발전, 화학, 광업부문에서 큰 성과 거양, 사회주의적 생산형태는 1949년 전체경제에서 49%에서 1956년 82%로 상승
o 전쟁으로 인한 황폐화 상황에서 농업협동화 운동에 착수
- 협동화에 진력한 결과 전농가의 80.9%가 농업협동조합에 속하고, 전 경작면적의 77.9%를 포괄
o 3개년 계획의 결과는 상당한 성과
- 거의 모든 주민들을 엄격한 통제하 정치체제에 편입시키고 중공업 분야 생산은 급속히 발전
o 1957년 5개년 계획에 착수, 북한식 대약진운동인 천리마운동을 시작
- 농업분야에서 개인농민경리의 청산, 사회주의 경제의 자신감 가속
6. 통일정책과 외교정책
o 전쟁 직후 중공을 형제국으로, 소련은 아버지와 같은 국가로 대우하며, 공식적 기회마다 모스크바에 대한 전통적인 복종의 맹세를 반복
- 공산세계가 소련에 의해 확고하게 영도면서 주민에게 소련을 따라 배우라는 가르침
o 대남정책은 외국군대 철수, 군인수 10만명 이하로 감축, 평화상태로 전환 착수, 외국과의 군사조약 철폐, 남북간 교류협력 및 왕래 대책 추진 등을 주장
- 휴전선 이남의 정치경제상황을 주시하면서 자신들의 입장을 계속 선전하고, ‘민주기지 강화’ 등 남한 내부문제에 개입하겠다는 입장을 강조
- ‘평화적 통일’은 남북한의 진보적 인사를 규합하여 인민의 적들을 몰아내는 혁명을 고조하기 위한 정치운동을 의미
- 구체적인 통일방안을 제시하기 위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을 통일전선정책의 최고기관으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를 통일정책을 위한 직접적인 도구로 설립
- 당시 북한은 남북관계 및 통일문제에서 전략적인 주도권을 장악
- 하지만, 반공이념이 강한 남한 사회 및 남한내 공산세력 퇴조 등 약점
- 1954-56 사이 추진되던 통일운동은 이후 급속히 쇠퇴하였으나, 선전활동과 간첩교육은 지속
o 당시 북한 외교정책에 대한 중대한 도전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전개와 깊은 관련
- 한국전쟁 직후 수년간 소련의 위성국과 같은 지위
-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은 김일성과 추종자들에게는 엄청난 충격
- 1956년 헝가리 사태 또한 북경과 평양당국을 당혹케 한 사건 중 하나
o 1958년 중소관계 악화로 북한의 외교정책은 친중정책으로 급변
-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하 및 유화정책에 대한 실망과 함께, 모택동이 1956년 간섭사건을 사과했다는 설도 존재
- 외교정책의 기본관심사는 조국을 공산주의 방식으로 통일하고, 미국을 아시아에서 축출하는 것
나. 유일체제의 형성
1. 유일체제 형성
o 1950년대 북한정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개인이 정권을 장악한 독재국가
- 김일성은 곧 당이며, 당은 모든 면에서 사실상의 국가
o 1970년대초까지 김일성은 당을 완전히 장악한 최고지도자로 군림
- 내부적으로는 수령을 절대적으로 추종하고 사회주의적 애국심으로 단련되었으며, 조국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도록 교육받은 전투적 민족주의로 신세대가 성장
- 국제관계에서도 두 공산대국 사이에서 일정한 중립성 지위를 확보
- 경제분야, 특히 공업분야에서의 성장은 대단한 성과로 인정
- 다만, 주민들의 안락한 생활 약속은 점차 성취하기 어려운 희망사항으로 잔존
o 청산리 방법 개발
- 농촌에 협동조합이 조직된 1958년 이후 지방당 조직구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김일성은 청산리 현지지도를 통해 새로운 당관리 체계를 개발
- 지방당 간부에게 정치적-이데올로기적인 능력과 전문기술을 갖출 것을 요구
- 군당 간부들이 아래로 내려가 농민들과 직접 대화하고 직접 지도하라는 내용이 핵심
- 대중으로 하여금 당정책이 입안되고 시행확산되는 전 과정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당과 대중을 결합
o 1970년 5차 당대회에서는 경제문제에 대한 초조감이 표출과 함께, 정치적으로 남조선해방의 과제달성 전망이 희박해졌으며, 국제정세도 공산주의 진영의 심각한 내분이라는 악제에 직면
- 북한은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고수하면서 국제사회에서 점차 고립
2. 조선노동당 제4차 대회
o 1961년 9월 조선노동당 제4차 대회 당시 정치적, 경제적 상황은 매우 우호적
- 5개년 계획은 예정을 앞당겨 성공적으로 완수, 새로운 7개년 계획 준비 완료
- 김일성은 공업생산성의 급속한 발전, 소비재 생산 중소규모의 종합공장의 건설, 농어부문의 수리화, 전기화, 기계확의 획기적 달성에 으한 농업생산성 증가 등
o 1960년 1월 5개년 계획이 예정기간을 2년 반 앞당겨 완수
- 공업총생산이 3.5배 증가, 연평균 성장률은 36.6%
- 농업부문의 수리화, 전기화, 기계화의 3대 과업은 괄목 성장, 경작면적의 증가 및 비료사용의 증대와 함께 농업생산량의 상당한 증대
o 7개년 발표, 국민소득 2.7배 증가, 노동자사무원들의 수입 1.7배 증가, 농민 실질수입 2배 이상 증가, 부유한 중농 수준 제고 설정
- 고급기사 및 전문인력 육성을 위해 산합협동계획과 노동자 보수교육을 강조
- 청산리방법으로 정치우선과 군중노선의 개념을 정치분야와 경제분야까지 확산
o 대안의 사업체계 개발
- 정책결정의 단일관리체계를 지방당 위원회의 주도 하에 공장이나 협동농장의 근로자 전원이 참가하는 집체적 방식으로 전환시키는데 주안점
3. 공산주의 세계의 동요와 주체사상
o 1959년 중소관계는 극도의 긴장상태로 전환
- 소련은 중공에 대해 핵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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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9.02.09
  • 저작시기20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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