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연구 주요 저작 강독 -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3 - 북한 편 스칼라피노 이정식 공저 - 소련식 경제발전 모델 유일체제의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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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북한연구 주요 저작 강독 -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3 - 북한 편 스칼라피노 이정식 공저 - 소련식 경제발전 모델 유일체제의 형성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주요 내용 및 논지 요약
◆'주체'의 등장
◆소련식 경제발전 모델
◆외교정책:소련에서 중공으로 한발짝 이동
◆유일체제의 형성
◆중소 갈등 사이에서 '주체' 띄운 김일성
◆국내-권력의 안정, 하지만 ‘준엄한 시기’

2. 저작의 성과 및 주요내용

3. 연구의 한계

4. 문제제기

본문내용

과오를 바로잡을 생각도 안한다\'고 비난했다.
이같은 훈계 결과 엄격한 책벌과 포상제도로 강화된 사업규율이 당 일꾼의 사고와 생활에 깊이 스며들었다. 모든 직급의 당일꾼들은 인민의 모범이 되라는 주문을 받았다. 반면 창의성이 억제되고 실패와 결함을 은폐하기 위해 실적 이상의 보고를 유발하는 문제를 낳았다.
북한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대중통제의 무기로 비판과 자아비판의 전술을 중요하게 활용하기 시작했다. 독자투고란과 인민들에 대한 \'자백운동\'이 대표적이다. 자백운동은 가족 내부에까지 파급됐을 정도다. 이는 모든 사람을 당원 중심으로 결속시키고 소련식 경제발전계획을 추진해나가는 결핍의 시기에 대중의 물질적 욕망을 유보시키기 위한 방안 중 하나였다.
한국전쟁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에게 중대한 자산을 남겼다. 북한 내의 거의 모든 반공주의자들이 제거되거나 월남해버리면서 최상의 환경이 조성됐고 아래로 휴전선이 있기때문에 남한으로의 탈출도 불가능했다. 따라서 북한 당국은 남한 실정에 대해 왜곡선전하면서 주민들이 남한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 살고 있다는 이미지를 심는데 주력했다.
지방조직 재건도 중요한 과제였다. 당은 \"지방의 지도력을 육성하자\" \"지방의 독자성을 드높이자\"는 구호를 내세우는 한편 헌법수정을 통해 1954년 10월 31일 새로운 지방주권기관 구성법을 공포했다. 1956년에는 각급 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실시했다. 또 \'열성자회의\' 명목으로 전국의 공장과 협동농장에서 잦은 회합을 여는 한편 장증 재교부 사업을 통해 당원 개개인에 대한 심사를 단행했다. 지방에서의 창발성을 강조했지만 이는 전국적으로 경제계획 목표를 실현할 자원을 갖고 있지 못한 국가가 지방기관에 책임을 부과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저자는 평가했다. 대부분의 지방기관이 중앙당국을 만족시킬 정도로 책임을 완수할수 없었기 때문에 허위 실적 보고, 주민에로의 압력 전가가 일어나면서 국가권력은 오히려 더 기만되었다.
이무렵 당이 직면한 가장 복잡한 문제는 지식계급의 처리였다. 박헌영과 추종세력에 대한 대규모 숙청이 단행된 후에도 소련과 중공을 배경을 한 소련파와 연안파가 손을 잡고 있었다. 1953년 숙청 이후 연안파의 원로 김두봉은 공식적인 북한 서열 2위였다. 그 아래로 박정애 최용건 박창옥 김일 최창익이 대표 엘리트로 꼽힌다. 박창옥은 소련2세 한인이었고 김일은 27세부터 김일성의 항일 무장유격대에 가담했던 인물이다. 최창익은 연안파의 실질적 지도자로 우수한 이론가였다. 이와함께 2급 지도자로는 민주독립당 지도자 홍명희, 기술관료 출신인 정일룡, 김일성 유격대 일원이었던 박금철 등이 있다. 파벌이 존재하긴 했지만 나름대로 매우 단합된 형태였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내각 수상이자 당 위원장이었던 김일성은 확고한 자신을 갖고 권력을 행사하면서 경제복구와 당 재건이라는 과제를 수행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에 있어 지식인 문제는 큰 관심사였다. 상당수의 지식인들이 전통적으로 한국 지식인사회의 중심지였던 남한출신이고, 김일성파 보다는 박헌영 세력이나 연안파, 소련파에 사상적으로 경도돼있었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1955년 4월 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당 교양사업을 지도하는 일부 선전 일꾼들은 군중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로 해설해주지 않고 자기도 완전히 리해하지 못하는 어려운 용어들과 명제들을 라열\"해 당원 대중에게 혼란을 일으키게 한다고 비난했다. 유격대 출신인 김일성이 도시화되고 서구화된 인텔리겐챠들에게 깊은 의심을 품고 있었음을 보여준 셈이다.
한편 조선인민군은 전쟁을 거치면서 당 외부에 있는 유일한 전국적 조직체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김일성은 자신과 당에 대한 군대의 충성심을 강화하기 위해 인민군 창건 10주년 경축행사를 한달간이나 열고 군부의 주요인물 20여명에게 국기훈장을 수여했다. 와중에도 김일성의 군 장악에 반기를 드는 듯한 사건은 있었다. 1958년 1월 인민군 군단장이었던 장평산이 박창옥-최창익 일파를 위해 쿠데타를 꾸몄다는 혐의로 숙청됐고 이 무렵 군부내부에서는 인민군이 당의군대인가 인민의 군대인가를 놓고 논쟁이 일어났다는 전언도 있다. 결국 이 문제를 제기한 두 장군은 숙청됐다.
◆\'주체\'의 등장
김일성은 당 내 종파주의를 공격하는 한편 본격적으로 \'주체\'민족주의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박헌영이 사형 언도받은지 13일만인 1958년 12월 28일 김일성은 당 선전선동일꾼들에 대한 연설에서 처음으로 \'주체\', 즉 고유한 필요와 경험을 필수적인 기준으로 삼고 자주성을 조선혁명의 중심과제로 삼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가 \'주체\'를 공식적으로 언급한 첫 사례다. 특히 김일성이 집권 초기 소련의 지원에 전적으로 힘입어 권력을 잡은데 이어 소련의 방식으로 전적으로 따라왔던데 반해 당내 반대파를 의식해 민족주의와 자주성을 언급하기 시작한 셈이다. 저자들은 특히 이 언급이 조선공산당 제20차 대회 개최 이전에 일어났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모스크바의 정치적 불안정, 모스크바와 미국의 관계개선 움직임 등이 반발을 불러오긴 했지만 \'주체\'에 대한 구상은 국제적 요인이 아닌 국내적 요인, 즉 소련파와 연안파의 세력과 정책을 우려한 결과라는 것이다.
후르시초프가 스탈린을 비판하고 긴장완화 정책을 시사한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는 김일성에게 당혹스러웠던 것이 분명하다. 북한은 이 대회의 연설 발체문을 노동신문에 호의적으로 보도했지만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대회가 끝난지 약 6주 후에나 프라우다의 사설 \'어째서 개인숭배는 맑스-레닌주의 사상과 인연이 없는가\'를 번역 게재했다.
당시 북한은 김일성에 대한 과도한 개인숭배를 진행하고 있었다. 김일성의 기념비가 각처에 건립됐고 그의 유격대시절 활동은 신격화됐다. 김일성은 스탈린에 대한 찬사를 늘어놨고 평양 대광장에 \'스탈린 광장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거의 모든 군중집회에 스탈린의 초대형 초상화가 내걸렸을 정도였다.
이 시기에 열린 1956년 4월 23일 조선노동당 3차대회에서 김일성은 개인숭배의 책임을 박헌영 등 종파분자에게 전가하는 한편 집체적 지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대회를 통해 노동당은 당과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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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9.02.09
  • 저작시기20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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