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다하루키의 북조선 - 만주항일전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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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와다하루키의 북조선 - 만주항일전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산 사냥에 쓰는 방침도 있었다.
어려운 상황에서 김일성의 제2방면군은 분산하여 ‘고난의 행군’ 작전을 개시하였다. 그 와중에도 김일성 부대는 일본 토벌 부대인 마에다 중대를 전멸시키는 등 빛나는 성과를 올렸다. 이런 고난의 행군 끝에 김일성이 정착한 곳은 소련이었으며, 그는 이 기간동안 장남인 김정일을 유격대캠프에서 낳았다.
1945년 7월 소련 측으로부터 대일전쟁이 가까우니 정보요원을 보내 달라는 요청이 있자, 항일연군을 만주로 가는 대원과 조선으로 가는 대원의 둘로 나누기로 결정하였다. 그에 맞춰 항련의 당조직도 둘로 나뉘었다. 조선으로 가는 조직은 조선공작단이라 불렸고 만주로 가는 신동북위원회도 있었다. 김일성은 조선공작단의 구성원 중 하나였으며, 단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때 김일성을 중심으로 북조선에서 공작한다는 것이 결정되었다. 김일성은 33세의 유격대 지휘관으로서 그때까지 그의 인생은 고통스러운 투쟁의 연속이었다. 일본의 가혹한 토벌작전을 견뎌내고 살아남아 60명의 부하와 함께 조국 땅을 밟았다는 사실은 역시 김일성의 비범한 능력을 보여준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1945년 조선이 해방되었을 때, 소련은 조선 점령에 대한 준비를 거의 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김일성이 속해 있던 하바로프스크 가까운 야영에 있던 동북항일연군 제88특별여단 속에 조선인 집단이 있었다. 이를 알게 되자 모스크바로 불러 직접 확인을 하였다. 소련군은 공산주의자들의 힘이 조선에서 강한 것을 발견하고 이 힘에 의거하여 조선인 측에 행정을 맡겼다. 북조선 점령 방침에 관해서는 9월 20일 최고사령관 스탈린의 이름으로 지령이 내려졌다. 지령의 내용은, 소련이 점령한 북조선에 정권을 세우되, 그것은 공산당이 참가하는 정부여야 한다는 지시였다. 소련은 조선의 통일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점령한 지역에 친소 정부를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북조선의 공산당조직 중앙은 국내계를 주력으로 하고 소련군과 함께 온 소련계 사람들, 만주파의 간부 등이 모여서 구성하였다. 소련 점령 당국으로서는 꼭 필요한 조직이었다. 이리하여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생겨났다.
1946년 김일성은 당뿐 아니라 정권의 정상이 되어 북조선의 모든 개혁을 자신의 이름 아래 실행해 간다. 그는 민족주의파와의 분열, 그리고 실질적인 단독정권의 수립을 진행하였다. 김일성을 정점으로 연안계와 소련계가 장악한 공산당은 서울 중앙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1946년 2월 8일에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위원장에는 김일성이 취임하였으며, 이로써 그는 당의 정점이자 정권의 정점이 되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제일 처음에 실시한 것은 토지개혁이었고, 이미 우리가 봐왔던 것처럼 이는 급진적이며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저자는 아주 급속히 진행된 방식이 만주의 해방구에서 실시했던 토지개혁 방식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하며, 일본군이 다가오기 때문에 단기간에 토지개혁을 실행하여 농민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는 경험을 얻었고 그것이 여기서 실행된 것이 아닐까 보고있다고 하였다. 토지개혁과 동시에 사법제도 또한 정비되었으며, 개혁 후의 김일성의 권위와 공산당의 권위는 현저히 높아졌다.
1946년 11월 에는 선거를 통하여 북조선에서 정식 정부가 성립하였다. 임시인민위원회의 ‘임시’가 여기서 벗겨졌다. 이로써 더 한층 김일성 숭배가 고취되었다. 1948년 8월 15일 서울에서는 대한민국의 성립이 선언되었다. 대한민국은 전 조선을 영토로 하는 조선의 유일한 합법국가라고 주장되었다.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에는 서울이 수도로 되어 있고 평양은 임시 수도이다. 따라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입장에서 서울의 대한민국 정부는 왹구 힘으로 자국 영토에 세워져 있는 괴뢰정권이다. 논리적으로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서로 용납할 수 없는 존재, 화해할 수 없는 존재이다. 서로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상대를 부정하는 것이다. 분단국가가 된 후, 무력에 의한 상대 제거라는 국토통일 구상의 토대가 쌍방에 놓여 있었다. 이를 먼저 실행에 옮긴 것은 김일성이었다. 그는 소련의 지지를 등에 업고 1950년 6월 25일 전쟁을 시작하였다.
이에 미국은 유엔안보이사회를 움직여 25일 중에 북조선의 침략행위를 비난하는 결의를 채택시켰다. 27일에는 유엔가맹국이 무력공격을 격퇴하는 한국을 원조하도록 요청하는 결의를 채택시켰고, 30일 미 정부는 맥아더에게 지상군 파견을 허용하는 결정을 내렸다. 맥아더는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인민군의 보급로를 끊었고,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인민군은 퇴각하였다. 10월에는 유엔군이 한국군과 함께 38도선을 넘어 북진하였다.
전쟁이 심화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소련과 미국은 정전회담을 진행하였다. 결국 한국전쟁은 통일을 가져오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이는 북의 공산주의자 측에도 남의 반공주의자 측에도 실패였다. 희생은 엄청 났으며, 정쟁의 결과로 남북의 철저한 이질화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전쟁의 결과는 김일성의 정치적 승리로 끝났다. 그는 내부의 반대세력들을 숙청하는 기회를 얻었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연안계, 소련계, 국내계의 우두머리는 모두 밀려났고, 김일성의 힘은 한층 더 강화되었다.
북조선의 체제 형성사는 두 단계로 나누어진다. 북조선 체제는 역사적으로, 단계적으로 형성되어 왔다. 다른 사회주의국가와 공통된 토대 위에 북조선 독자의 구조가 겹쳐 쌓였다고 볼 수 있다.
우선 제1단계로 1961년까지 소련, 동유럽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국가사회주의가 성립했다고 볼 수 있다. 정전협정이 조인되자 공업이 부흥하기 시작하고 농업에서는 초보적인 협동화 방책이 시도되었다. 1954년 3월 중아우이원회 전원회의에서는 경제 각료가 일신되었다. 이들은 모두 경공업 우선파였다. 정치부문에서는 최초이자 최후의 당내 투쟁이 일어나, 도전한 당내 여러 조류가 일소되고 김일성의 만주파 및 그에 극히 가까운 갑산계가 당정부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의 정치적 개입을 언잖게 생각하였고, 그들로부터의 자립을 주장하였다. 1956년에는 흐루시초프의 비밀보고에 의해 스탈린 비판이 이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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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9.02.09
  • 저작시기20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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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1083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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