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연구] - 와다 하루키 - 북조선-유격대국가에서 정규군국가로 -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사회주의체제와 유격대국가의 성립 북조선의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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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북한 연구] - 와다 하루키 - 북조선-유격대국가에서 정규군국가로 -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사회주의체제와 유격대국가의 성립 북조선의 경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주요내용
1. 북조선을 어떻게 해독할 것인가?
2.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탄생
4. 조선전쟁
5. 사회주의체제와 유격대국가의 성립
6. 북조선의 정치문화
7. 북조선의 국제관계
8. 북조선의 군사력
9. 북조선의 경제
10. 김일성의 사망과 김정일의 복상
11. 북조선의 미래

▶ 독자의 의견 및 감상

본문내용

저우언라이와 회견. 70년 4월 5-7일 저우언라이 북조선 방문은 조중 관계 회복을 가져옴.
- 베트남전에서 승리를 기대할 수 없자 미국은 중국과 화해 모색. 71년 7월 5일 닉슨의 중국 방문 계획 발표. 북조선은 방침 전환을 위해 8월 6일 남북대회 제의. 이후 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 발표
- 남북 화해 모드 속에 박정희는 10월 17일 쿠데타적 방법으로 유신체제를 수립하고 북조선은 12월 신헌법 제정으로 유격대국가를 제도적으로 완성.
- 마오쩌둥 사후 78년 5월 화궈펑에 이어 9월 덩샤오핑이 신방침 설명을 위해 북조선 방문. 12월 중공 3중전회에서 개혁, 개방 개시를 선언.
- 83년 10월 9일 랭군에서 폭탄테러 사건 발생. 증거 없이 북조선의 행동으로 규정, 버마 정부는 외교관계 단절. 11월 6일자 인민일보에 버마와 북조선 정부 성명 발표를 어떠한 코멘트 없이 나란히 게재하여 중국이 간접적으로 북조선에 경고.
- 84년 1월 7일 한국 외교 채널을 통해 북조선이 중국을 통해 남, 북, 미 3자회담 제의 정보가 흘러나옴. 심지어 랭군사건 하루 전날 이루어짐.
- 회담 방식은 근본저긍로 달랐으나 랭군사건으로 인한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회담 제안 경쟁으로의 이행은 놀라운 일이며 이를 북조선 외교 특질이라고 본다면 극한적 대결정책에서 화해정책으로의 유연한 전환 혹은 양 극단 정책의 동시 추구라는 유격대적 외교 표현으로 볼 수 있음.
- 86년 7월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시작. 87년 대한항공기 실종 사건 발생. 노태우 대통령 당선으로 한국 단독 개최 올림픽 불참 성명 발표.
- 88년 8월 15일 노태우가 남북 정상회담 제안. 김일겅은 9월 9일 남북 불가침선언 채택, 1제도 연방국가 경성을 인정한다면 평양에서 남북 최고위급회담을 열어도 좋다고 대응.
- 서울올림픽이 성공을 거두며 북조선은 한국에 결정적으로 뒤처지게 됨. 유리한 정세를 틈타 한국은 북조선에 적극적 대화를 요구하고 양보하는 태도를 보임. 89년 정주영 회장이 북조선을 방문하여 금강산 개발 협의를 하고 돌아오고 3월에는 문익환 목사가 방북.
- 북조선은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앞두고 많은 제안을 하면서 한국을 당황케 하고, 이 축전에 임수경이 참가하면서 동요를 드러냄. 한국에서는 낡은 수법이 모두 동원되어 공안정국 시작.
- 89년이 되어 동유럽에 민주화 바람이 불고 북조선 지도자의 위기의식은 극에 달했을 것. 엎친데 덮친 격으로 90년 6월 4일 소련과 한국의 국교 수립.
- 상황 타개를 위한 방법 모색 중 일본과의 관계 개선 시작. 91년 1월 30일 평양에서 제1차 조일 교섭 시작. 그러나 회담은 NPT 의무 이행과 식민치하 피해와 손실에 대한 배상의 문제로 난항을 거듭. 미국이 핵문제를 제기하며 개입하고 일본이 김현희의 일본어 선생인 ‘이은혜’ 납치 문제를 제기하면서 초기 단계에서부터 장애를 만남.
- 91년 11월 5차 조일 교섭 이후 북조선 외교부는 미국이 핵무기 철수를 시작하면 북조선은 IAEA가 요구하는 보장조치협정에 섬여하고 남북한 동시사찰을 수용하겠다고 밝히며 이를 위한 조미 회담 개최 요구. 12월 5차 남북 총리회담에는 남북한간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에 서명.
- 북조선은 일본과의 국교 수립을 선택하고 한국과 관계 개선은 가능한 미뤄둘 의도였던 것으로 보이나 한국과 미국의 개입에 의해 의도하지 않은 결과 발생
- 92년 1월 22일 북조선과 미국의 최초 공식 교섭인 조미 차관급회담 개최. 2월 19-21일 6차 남북 총리회담이 열리고 남북 기본합의서 발효. 8월 24일 한중 국교 수립. 같은 달 북한의 카운터파트너였던 가네마루 신의 스캔들이 터지고 정치생명이 끝나면서 일본과의 회담 결렬.
- 93년 2월 25일 IAEA 이사회는 두 곳에 특별사찰 수용을 요구했으나 3월 8일 김정일은 팀스피리트 훈련 재개에 대항하여 준전시체제 선언. 3월 12일 NPT 탈퇴 의지 표명. 5월 10일 미국은 조미 고위급회담 개시 합의.
- 6월 11일 조미 공동성명 발표. 양국은 남북 비핵화 공동선언 지지 표명. 북조선 핵 카드 외교의 큰 성공.
- 7월 14일 제네바에서 2차 조미 고위급회담 개최. 미국이 핵무기 사용과 위협을 하지 않는다는 약속 재확인, 핵문제 해결 일환으로 경수로 도입 지지와 이를 위한 방책 공동으로 강구, 보장 문제 기타에 관해 국제원자력기구와 협의 시작, 남북회담 조기 실현 의사 재확인 등이 공동성명에 포함.
- 94년 1월 시설 사찰 협의 중에 북조선은 신규 7개 시설 통상 사찰을 거부하며 사태 급변. 미일 정상회담 자리에서 클린턴은 북조선에 대한 경제제재를 주장했고 결국 2월 15일 IAEA는 북조선이 7개 시설에 대한 사찰 수용에 동의했다고 발표. 그러나 이는 한정적 사찰.
- 3월에 열린 남북 특사 교환을 위한 실무자 회담에서 소위 ‘서울 불바다’ 발언이 나오고 강경한 태도 유지.
- 3월 31일 안전보장이사회가 북조선에 사찰 수용을 요구하는 결의 채택. 북조선 외교부 대변인은 이를 부당하다며 미국이 약속을 어겼기 때문에 평화적 핵 활동을 정상화시키겠다는 성명 발표.
- 4월 19일 북조선은 IAEA 사찰관이 영변 연료봉 교체에 입회하도록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고 IAEA는 샘플 채취를 희망했으나 거부당함. 6월 2일 사찰 불가능 선언하고 10일 IAEA 이사회는 북조선에 대한 기술협력 정지, 특별사찰 수용 포함 제재 결의 채택. 6월 13일 북조선 IAEA 즉시 탈퇴.
- 5월 31일 카네기 국제평화재단 연구원 샐리그 해리슨이 서울 심포지엄에 초청되어 ‘채찍보다 당근이 효과가 있다는’ 발언을 한 후 평양으로 갔고 그의 설득으로 지미 카터 방북.
- 북조선의 유격대 외교는 벼랑 끝 외교.
8. 북조선의 군사력
- 1970년 한국군 총병력은 64만 5천명. 육군 57만명. 북조선군은 총병력 41만 3천명, 육군이 37만명으로 한국군이 압도적 수적 우위. 그 외 주한미군 보병 2개 사단, 공군 1개 사단 등 총 6만 명.
- 76년 카터는 3만 3천명의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걸고 대통령 당선. 그러나 강경한 반대론에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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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9.02.09
  • 저작시기20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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