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시비’라는 단어의 뜻을 알지 못해 계속 고민했고, 막상 연세대 학생들 또한 알지 못해서 학교 전체를 한바퀴 돌고야 말았다. 결국 먼저 다녀온 친구에게 물어보아 ‘시비’가 시로 쓰여진 비석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제서야 우리는 윤동주 시비를 찾을수가 있었다. 그리고 시비가 시로 쓰여진 비석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교수님이 우리에게 이러한 과제를 내주신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윤동주님의 서시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시이다. 하지만 그렇게 비석으로 쓰여져 있는 시비의 모습을 보니, 여태까지 알고 있던 서시와는 왠지 모르게 다른 느낌이 들었다.
연세대학교에서는 일제치하 독립운동을 하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 민족시인 윤동주 동문의 조국사랑과 문학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윤동주 기념 사업회’라는 것이 있는데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매년 4월 ~ 5월경쯤 윤동주 시문학상과 윤동주 백일장을 개최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이 탐방을 하면서 왜 윤동주 시비가 연세대학교에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졌다. 그래서 연세대학교 홈페이지에서 아래와 같은 내용을 찾게 되었다.
1938년 4월 9일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다. 겨우 약관弱冠을 면한 나이로 아직 문단에 이렇다 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때였다.
열매를 맺기 위한 봉오리 셋 - 윤동주 송몽규 강처중들이 기숙사(현 핀슨관) 3층 꼭대기방에서 함께 학교생활을 시작했다. 셋이 하나같이 조고계操界에 뜻을 두고 연희동산을 소요逍遙하면서 시론詩論을 나누다가 나중에는 기숙사에서 나와 하숙생활을 할 때는 하루가 멀다 하고 서로 하숙방을 찾아가 문예를 논하면서 해를 지웠다 한다. 늘 친우는 달변인데 비해 윤동주는 언제나 말없이 듣기만 했다 한다. 이렇듯 과묵한 윤동주의 시작詩作활동은 연희 생활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후일 민족시인이라는 이름으로 시인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윤동주는 연희에 와서 처음으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되었다. 1938년이라면 일본 제국주의가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소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조선이라는 나라는 더욱 예종 隸從의 길로 옭아맬 때로 민중들은 우리말은 고사하고 숨조차 저들의 허락없이 함부로 쉴 수 없을 때였다. 그러한 때에 연희캠퍼스 건물 곳곳에 태극이 새겨져 있고, 연희동산에는 무궁화가 만발한 것을 보게된 것이다. 그리고 첫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 용정龍井으로 돌아가서 친아우 못지 않게 사랑하던 고향 후배 장덕순에게 연희에서 받은 충격과 감동을 이렇게 전해 주었다.
\"연희전문학교는 그 전통과 교수, 그리고 학교의 분위기가 민족적인 정서를 살리기에 가장 알맞은 배움터라는 것이다. 당시 만주땅에서는 볼 수 없는 무궁화가 캠퍼스에 만발했고, 도처에 우리 국기의 상징인 태극마크가 새겨져 있고, 일본 말을 쓰지 않고, 강의도 우리 말로 하는 「조선문학」도 있다는 등등 내 구미를 돋우는 유혹적인 이야기를 차분히, 그러나 힘주어서 들려 주었다\" - 장덕순 <윤동주와 나>, 「나라사랑」 제23호, 1976년 6월
결국 장덕순도 윤동주의 달콤한 유혹(?)에 끌려
윤동주님의 서시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시이다. 하지만 그렇게 비석으로 쓰여져 있는 시비의 모습을 보니, 여태까지 알고 있던 서시와는 왠지 모르게 다른 느낌이 들었다.
연세대학교에서는 일제치하 독립운동을 하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 민족시인 윤동주 동문의 조국사랑과 문학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윤동주 기념 사업회’라는 것이 있는데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매년 4월 ~ 5월경쯤 윤동주 시문학상과 윤동주 백일장을 개최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이 탐방을 하면서 왜 윤동주 시비가 연세대학교에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졌다. 그래서 연세대학교 홈페이지에서 아래와 같은 내용을 찾게 되었다.
1938년 4월 9일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다. 겨우 약관弱冠을 면한 나이로 아직 문단에 이렇다 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때였다.
열매를 맺기 위한 봉오리 셋 - 윤동주 송몽규 강처중들이 기숙사(현 핀슨관) 3층 꼭대기방에서 함께 학교생활을 시작했다. 셋이 하나같이 조고계操界에 뜻을 두고 연희동산을 소요逍遙하면서 시론詩論을 나누다가 나중에는 기숙사에서 나와 하숙생활을 할 때는 하루가 멀다 하고 서로 하숙방을 찾아가 문예를 논하면서 해를 지웠다 한다. 늘 친우는 달변인데 비해 윤동주는 언제나 말없이 듣기만 했다 한다. 이렇듯 과묵한 윤동주의 시작詩作활동은 연희 생활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후일 민족시인이라는 이름으로 시인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윤동주는 연희에 와서 처음으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되었다. 1938년이라면 일본 제국주의가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소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조선이라는 나라는 더욱 예종 隸從의 길로 옭아맬 때로 민중들은 우리말은 고사하고 숨조차 저들의 허락없이 함부로 쉴 수 없을 때였다. 그러한 때에 연희캠퍼스 건물 곳곳에 태극이 새겨져 있고, 연희동산에는 무궁화가 만발한 것을 보게된 것이다. 그리고 첫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 용정龍井으로 돌아가서 친아우 못지 않게 사랑하던 고향 후배 장덕순에게 연희에서 받은 충격과 감동을 이렇게 전해 주었다.
\"연희전문학교는 그 전통과 교수, 그리고 학교의 분위기가 민족적인 정서를 살리기에 가장 알맞은 배움터라는 것이다. 당시 만주땅에서는 볼 수 없는 무궁화가 캠퍼스에 만발했고, 도처에 우리 국기의 상징인 태극마크가 새겨져 있고, 일본 말을 쓰지 않고, 강의도 우리 말로 하는 「조선문학」도 있다는 등등 내 구미를 돋우는 유혹적인 이야기를 차분히, 그러나 힘주어서 들려 주었다\" - 장덕순 <윤동주와 나>, 「나라사랑」 제23호, 1976년 6월
결국 장덕순도 윤동주의 달콤한 유혹(?)에 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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