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들어가며
Ⅱ. 신사참배
Ⅱ-ⅰ 신사참배의 정의
Ⅱ-ⅱ 신사참배의 목적
Ⅱ-ⅲ 신사참배의 전개
Ⅲ. 기독교와 신사참배
Ⅲ-ⅰ 일제에게 굴복하다
Ⅲ-ⅱ 신사참배 거부운동
Ⅳ. 김재준과 신사참배
Ⅳ-ⅰ 김재준을 비판한다
Ⅳ-ⅱ 김재준을 변호한다
Ⅴ. 나아가며
Ⅱ. 신사참배
Ⅱ-ⅰ 신사참배의 정의
Ⅱ-ⅱ 신사참배의 목적
Ⅱ-ⅲ 신사참배의 전개
Ⅲ. 기독교와 신사참배
Ⅲ-ⅰ 일제에게 굴복하다
Ⅲ-ⅱ 신사참배 거부운동
Ⅳ. 김재준과 신사참배
Ⅳ-ⅰ 김재준을 비판한다
Ⅳ-ⅱ 김재준을 변호한다
Ⅴ. 나아가며
본문내용
위자일 수는 없는 것이다. Ibid., p.119.
3. 조선신학교와 황민화 교육에 대한 논박과 변호
가) 조선신학교가 그 설립 목적에 “충량유의한 황국의 교역자 양성”이라 명시한 문구는 1930년대 신설학교 설립에 명기되는 공식 문구이다. 김승태,『일제강점기 종교 정책사 자료집 : 1910-1945』(서울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6), p.301. ; Ibid., p.121에서 재인용.
따라서 축자적으로 이 부분을 가지고 조선신학교를 일본 군국주의에 주구(走拘)역할을 한 교회사 양성기관이라 말한 것은 기록 사실만을 가지고 사실을 왜곡 과장하는 것이며, 특히 “다소의 재정 지원”이란 말은 설립 보고에서 확인되듯이 전혀 근거 없는 날조이다. 그리고 조선신학교의 교과목만을 가지고 교육결과를 재단하는 것은 교육 주체를 빼버리고 교육의 과정을 무시한 환원주의적 평가이다. 오히려 교과목에 일제가 금지한 구약개론, 구약신학, 히브리어 등을 넣은 것은 일제의 교육지침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나) 조선신학교는 태평양 전쟁 하의 극한 상황에서 양식 있는 일본인 목회자를 교수와 이사장으로 세웠다는 것이 결코 민족 주체적인 교육내용을 좌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일적이라는 것은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것에 대한 반일이지, 일본 그 자체에 대한 반일은 아니다. 국적만을 가지고 보편적인 기독교 정신에의 연대와 협력을 인종주의적 시각으로 재는 것은 또 하나의 국수주의적인 시각이다. Ibid., p.121.
장공 김재준이 한국교회에 그 이름이 알려진 것은 1935년 아빙돈 단권 성격주석 사건이었다. 그는 한국교회의 근본주의의 신학 풍토와 율법주의적 형식주의, 그리고 성장한 한국교회를 지배하는 보수적 교권주의 세력 가운데서 한국교회의 개혁을 위해서는 신학교육의 갱신과 더불어 새로운 교육기관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그러나 현식의 벽은 너무도 높았다. 한국 장로교회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서북 교권세력의 완강한 거부와 일제의 강력한 통제가 그것이었다. 김재준이 이와 같은 이중의 벽을 뚫기 위해 선택한 것이 형식적이나마 신사참배였다. 그리고 그는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신학교육을 할 수 있는 가능한 차원에서 일제의 정책에 순응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차적인 벽으로 학교운영을 방해하는 보수적 교권세력들의 완강한 거부의 벽을 뚫은 것이다. 이것은 이차적으로 일제로부터의 간섭의 벽을 뚫기 위한 전제 조건이었다. 조선신학교가 일본 식민지 하의 민족 모순을 전제하면서도 먼저 교회 내에 보수적 교권세력과의 갈등과 모순 관계를 풀어가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조선신학교가 민족 모순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우선은 소극적 참여로 일제의 지시에 순응하는 것이었지만 학생 중에는 박학수 열사를 비롯한 순교자 김은도 등 김재준,『김재준 전집』13권(한신대학교 출판부, 1992), pp.197-201. ; Ibid., pp.122-123에서 재인용.
항일 독립운동에 나서 신앙적 양심으로 생명을 바친 이들도 있었다는 것은 조선신학교의 민족적 성격을 새롭게 규명하는 것이다.
Ⅴ. 나아가며
우리는 신사참배와 교회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았다. 신사참배는 우리 민족의 얼을 말살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용되었고, 이것은 우리 민족의 아픔이고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이다. 또한 이 문제는 상처를 넘어 민족 간의 싸움을 만들어 지금까지도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1938년 장로교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마지막으로 모든 공교회가 신사참배에 결의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몇몇 인물들은 하나님 외에 그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겠다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반대하였고, 누군가는 완전한 승리를 위해, 후대를 위해 눈물을 삼키며 민족의 원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우리는 이 행동들에 옳고 그름을 정의내릴 수 없었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민족의 얼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고 생각된다. 목숨을 걸고 그들과 싸우는 것, 자존심을 버리고 온전한 승리를 물려주기 위해 무릎 꿇은 것, 이 모든 것은 그들 나름의 용기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단행본
김승태,『신사참배 거부 항쟁자들의 증언』다산글방, 1993
안도명,『신사참배 반대투쟁 정신사』혜선출판사, 1991
연규홍,『역사를 살다』한신대학교 출판부, 2012
장동민,『대화로 풀어보는 한국교회사』부흥과개혁사, 2009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한국 기독교의 역사Ⅱ』기독교문사, 1990
학술지 논문
신경규, “신사참배와 한국교회의 대응” 서울신학대학교신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5
3. 조선신학교와 황민화 교육에 대한 논박과 변호
가) 조선신학교가 그 설립 목적에 “충량유의한 황국의 교역자 양성”이라 명시한 문구는 1930년대 신설학교 설립에 명기되는 공식 문구이다. 김승태,『일제강점기 종교 정책사 자료집 : 1910-1945』(서울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6), p.301. ; Ibid., p.121에서 재인용.
따라서 축자적으로 이 부분을 가지고 조선신학교를 일본 군국주의에 주구(走拘)역할을 한 교회사 양성기관이라 말한 것은 기록 사실만을 가지고 사실을 왜곡 과장하는 것이며, 특히 “다소의 재정 지원”이란 말은 설립 보고에서 확인되듯이 전혀 근거 없는 날조이다. 그리고 조선신학교의 교과목만을 가지고 교육결과를 재단하는 것은 교육 주체를 빼버리고 교육의 과정을 무시한 환원주의적 평가이다. 오히려 교과목에 일제가 금지한 구약개론, 구약신학, 히브리어 등을 넣은 것은 일제의 교육지침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나) 조선신학교는 태평양 전쟁 하의 극한 상황에서 양식 있는 일본인 목회자를 교수와 이사장으로 세웠다는 것이 결코 민족 주체적인 교육내용을 좌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일적이라는 것은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것에 대한 반일이지, 일본 그 자체에 대한 반일은 아니다. 국적만을 가지고 보편적인 기독교 정신에의 연대와 협력을 인종주의적 시각으로 재는 것은 또 하나의 국수주의적인 시각이다. Ibid., p.121.
장공 김재준이 한국교회에 그 이름이 알려진 것은 1935년 아빙돈 단권 성격주석 사건이었다. 그는 한국교회의 근본주의의 신학 풍토와 율법주의적 형식주의, 그리고 성장한 한국교회를 지배하는 보수적 교권주의 세력 가운데서 한국교회의 개혁을 위해서는 신학교육의 갱신과 더불어 새로운 교육기관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그러나 현식의 벽은 너무도 높았다. 한국 장로교회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서북 교권세력의 완강한 거부와 일제의 강력한 통제가 그것이었다. 김재준이 이와 같은 이중의 벽을 뚫기 위해 선택한 것이 형식적이나마 신사참배였다. 그리고 그는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신학교육을 할 수 있는 가능한 차원에서 일제의 정책에 순응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차적인 벽으로 학교운영을 방해하는 보수적 교권세력들의 완강한 거부의 벽을 뚫은 것이다. 이것은 이차적으로 일제로부터의 간섭의 벽을 뚫기 위한 전제 조건이었다. 조선신학교가 일본 식민지 하의 민족 모순을 전제하면서도 먼저 교회 내에 보수적 교권세력과의 갈등과 모순 관계를 풀어가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조선신학교가 민족 모순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우선은 소극적 참여로 일제의 지시에 순응하는 것이었지만 학생 중에는 박학수 열사를 비롯한 순교자 김은도 등 김재준,『김재준 전집』13권(한신대학교 출판부, 1992), pp.197-201. ; Ibid., pp.122-123에서 재인용.
항일 독립운동에 나서 신앙적 양심으로 생명을 바친 이들도 있었다는 것은 조선신학교의 민족적 성격을 새롭게 규명하는 것이다.
Ⅴ. 나아가며
우리는 신사참배와 교회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았다. 신사참배는 우리 민족의 얼을 말살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용되었고, 이것은 우리 민족의 아픔이고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이다. 또한 이 문제는 상처를 넘어 민족 간의 싸움을 만들어 지금까지도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1938년 장로교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마지막으로 모든 공교회가 신사참배에 결의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몇몇 인물들은 하나님 외에 그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겠다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반대하였고, 누군가는 완전한 승리를 위해, 후대를 위해 눈물을 삼키며 민족의 원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우리는 이 행동들에 옳고 그름을 정의내릴 수 없었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민족의 얼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고 생각된다. 목숨을 걸고 그들과 싸우는 것, 자존심을 버리고 온전한 승리를 물려주기 위해 무릎 꿇은 것, 이 모든 것은 그들 나름의 용기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단행본
김승태,『신사참배 거부 항쟁자들의 증언』다산글방, 1993
안도명,『신사참배 반대투쟁 정신사』혜선출판사, 1991
연규홍,『역사를 살다』한신대학교 출판부, 2012
장동민,『대화로 풀어보는 한국교회사』부흥과개혁사, 2009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한국 기독교의 역사Ⅱ』기독교문사, 1990
학술지 논문
신경규, “신사참배와 한국교회의 대응” 서울신학대학교신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5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