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들어가며
Ⅱ. 주기철의 생애와 오산학교 시절
1. 주기철의 생애
2. 오산학교 시절
Ⅲ. 주기철의 신사참배 반대
1.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배경과 전개
2. 주기철의 신사참배 반대
Ⅳ. 실력양성론자, 주기철
- 주기철이 국외 독립운동가와 구별되는 점
Ⅴ. 나오며
# 참고문헌
Ⅱ. 주기철의 생애와 오산학교 시절
1. 주기철의 생애
2. 오산학교 시절
Ⅲ. 주기철의 신사참배 반대
1.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배경과 전개
2. 주기철의 신사참배 반대
Ⅳ. 실력양성론자, 주기철
- 주기철이 국외 독립운동가와 구별되는 점
Ⅴ. 나오며
# 참고문헌
본문내용
국주의 지배 체제를 구축하려는 일본의 정치 군사적 의지를 정면으로 거부한 저항운동이었다.
Ⅳ. 실력양성론자, 주기철
1. 주기철이 국외 독립운동가와 구별되는 점
1919년 3 1 운동 이후, 한 부류는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를 세우고 정치, 군사와 같은 외형적인 과정과 성취에 의한 해방을 추구하였다. 다른 한 부류는 러시아의 10월 혁명에 자극을 받아 반제(反帝) 공산주의 혁명에 의한 민족과 민중의 해방을 전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민족주의계 민족교육론자들은 국외로 떠나거나 피하지 않고, 민족 해방의 날을 민족 중흥과 실력의 양성 이후라는 장기적인 시각을 가지고 국내에 남아서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주로 ‘교육’에 헌신하면서 민족의식을 예각화시키려 한 사람들이다.
주기철 역시 국내에 남아서 농촌 계몽 운동에 힘썼다. 그는 1917년 안질에 걸려 학업을 계속할 수 없어 고향에 내려왔을 때, 고향인 웅천교회에서 집사로 봉사하면서 저녁에는 야간학교를 만들어 젊은 청년들을 가르쳤다. 또한, 그는 지방 교육계몽에 착상하여 교남학회(矯南學會)를 조직해서 학생들을 통해 민족의 힘을 기르도록 전력하였다. 『 』
이는 오산학교의 이승훈과 조만식을 통해 배운 ‘나라사랑’과 ‘민족정신’의 실천이라고 볼 수 있다.
Ⅴ. 나오며
주기철에 대한 기존 연구는 주로 ‘순교자, 순교정신’의 측면에서 이루어졌다는 데에 한계가 있다. 그의 일제의 황국화 정책에 대항하여 목숨을 걸고 저항한 지사적인 삶과 농촌 계몽 운동 등으로 실력양성을 통해 나라를 일으키고자 했던 헌신적인 애국자의 삶은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주기철에 대한 1차적 자료의 발굴과 그에 대한 좀 더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졌으면 한다.
그에 대해 정리하자면, 첫째, 주기철은 이타적인 삶을 살았다. 민족애와 나라사랑의 정신을 가지고,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신사참배 강요에 대항한 것은 큰 용기가 되어 이후의 민족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둘째, 그는 굳은 의지와 옳곧은 정신의 소유자이었다. 모진 고문 속에서도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면서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자세는 요즘 목전의 이익 앞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한국인들의 풍토에서 우리가 본받을 만한 점이다.
이러한 주기철의 이타적인 정신과 올곧은 삶은 조선이 일본의 정책대로 완전히 황국화되어 한국의 민족 정체성이 상실되려는 위기에서 마지막까지 버팀으로 많은 이들이 그의 정신을 본받아 부당한 일제의 정책에 대항하는 운동을 벌일 수 있었다. 즉, 그의 삶은 한국의 민족적 정체성이 소멸되지 않고 지켜질 수 있도록 한 것이라는 의의가 있다.
# 참고문헌
이영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민경배, 『순교자 주기철목사』, 대한기독교서회, 2005.
이상규,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 반대와 저항』, 1997.
이덕주, 『사랑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 연구』,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2003.
주광조, 『 죽음을 이겨낸 영원한 삶(나의 아버지 순교자 주기철 목사)』, 대성닷컴, 2005.
오산칠십년사 편찬위원회,『오산칠십년사』, 1978.
조지당, 『한국민족운동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한국문화사대계, Ⅰ, 1964.
『조선총독부 통계연보』, 명치 43년.
한석희, 「전시하 조선인의 신사참배 강요와 기독인의 저항」,『식민지시대의 한국의 사회와 저항』, 강제언 외 지음, 백산서당, 1983.
김요나, 『일사각오』, 한국뿌리찾기선교회, 1992.
김기동, 『남강 이승훈』, 현대교육_서 출판사, 1964.
조기준, 「남강선생의 기업관」,『나라사랑』, 제12집, 1973.
황정덕, 『鎭海市史』, 지혜문화사, 1987.
Ⅳ. 실력양성론자, 주기철
1. 주기철이 국외 독립운동가와 구별되는 점
1919년 3 1 운동 이후, 한 부류는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를 세우고 정치, 군사와 같은 외형적인 과정과 성취에 의한 해방을 추구하였다. 다른 한 부류는 러시아의 10월 혁명에 자극을 받아 반제(反帝) 공산주의 혁명에 의한 민족과 민중의 해방을 전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민족주의계 민족교육론자들은 국외로 떠나거나 피하지 않고, 민족 해방의 날을 민족 중흥과 실력의 양성 이후라는 장기적인 시각을 가지고 국내에 남아서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주로 ‘교육’에 헌신하면서 민족의식을 예각화시키려 한 사람들이다.
주기철 역시 국내에 남아서 농촌 계몽 운동에 힘썼다. 그는 1917년 안질에 걸려 학업을 계속할 수 없어 고향에 내려왔을 때, 고향인 웅천교회에서 집사로 봉사하면서 저녁에는 야간학교를 만들어 젊은 청년들을 가르쳤다. 또한, 그는 지방 교육계몽에 착상하여 교남학회(矯南學會)를 조직해서 학생들을 통해 민족의 힘을 기르도록 전력하였다. 『 』
이는 오산학교의 이승훈과 조만식을 통해 배운 ‘나라사랑’과 ‘민족정신’의 실천이라고 볼 수 있다.
Ⅴ. 나오며
주기철에 대한 기존 연구는 주로 ‘순교자, 순교정신’의 측면에서 이루어졌다는 데에 한계가 있다. 그의 일제의 황국화 정책에 대항하여 목숨을 걸고 저항한 지사적인 삶과 농촌 계몽 운동 등으로 실력양성을 통해 나라를 일으키고자 했던 헌신적인 애국자의 삶은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주기철에 대한 1차적 자료의 발굴과 그에 대한 좀 더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졌으면 한다.
그에 대해 정리하자면, 첫째, 주기철은 이타적인 삶을 살았다. 민족애와 나라사랑의 정신을 가지고,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신사참배 강요에 대항한 것은 큰 용기가 되어 이후의 민족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둘째, 그는 굳은 의지와 옳곧은 정신의 소유자이었다. 모진 고문 속에서도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면서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자세는 요즘 목전의 이익 앞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한국인들의 풍토에서 우리가 본받을 만한 점이다.
이러한 주기철의 이타적인 정신과 올곧은 삶은 조선이 일본의 정책대로 완전히 황국화되어 한국의 민족 정체성이 상실되려는 위기에서 마지막까지 버팀으로 많은 이들이 그의 정신을 본받아 부당한 일제의 정책에 대항하는 운동을 벌일 수 있었다. 즉, 그의 삶은 한국의 민족적 정체성이 소멸되지 않고 지켜질 수 있도록 한 것이라는 의의가 있다.
# 참고문헌
이영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민경배, 『순교자 주기철목사』, 대한기독교서회, 2005.
이상규,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 반대와 저항』, 1997.
이덕주, 『사랑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 연구』,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2003.
주광조, 『 죽음을 이겨낸 영원한 삶(나의 아버지 순교자 주기철 목사)』, 대성닷컴, 2005.
오산칠십년사 편찬위원회,『오산칠십년사』, 1978.
조지당, 『한국민족운동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한국문화사대계, Ⅰ, 1964.
『조선총독부 통계연보』, 명치 43년.
한석희, 「전시하 조선인의 신사참배 강요와 기독인의 저항」,『식민지시대의 한국의 사회와 저항』, 강제언 외 지음, 백산서당, 1983.
김요나, 『일사각오』, 한국뿌리찾기선교회, 1992.
김기동, 『남강 이승훈』, 현대교육_서 출판사, 1964.
조기준, 「남강선생의 기업관」,『나라사랑』, 제12집, 1973.
황정덕, 『鎭海市史』, 지혜문화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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