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중세의 윤리설
(아우구스티누스, 아벨라르, 토마스 아퀴나스)
목차
성 아우구스티누스
- 우리의 최고선
- 사랑의 질서
- 평화
- 두 개의 국가
- 도덕 법칙
- 악의 문제
- 자유의지
페테 아벨라르
- 죄란 무엇인가?
- 행위의 도덕적 무관함
성 토마스 아퀴나스
- 윤리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접근
- 자연법과 인간의 행위
(아우구스티누스, 아벨라르, 토마스 아퀴나스)
목차
성 아우구스티누스
- 우리의 최고선
- 사랑의 질서
- 평화
- 두 개의 국가
- 도덕 법칙
- 악의 문제
- 자유의지
페테 아벨라르
- 죄란 무엇인가?
- 행위의 도덕적 무관함
성 토마스 아퀴나스
- 윤리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접근
- 자연법과 인간의 행위
본문내용
필요가 있다. 죄를 짓는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어떤 그릇된 일을 행하기를 원하고 욕구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죄를 짓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르다고 인식하는 어떤 것에 동의하는 문제이며, 어떤 그릇된 일을 행하려는 욕구에 굴복하여 이러한 욕구를 시인하고 그것이 요구하는 바에 따르기로 결정하는 것이다.
악한 의지가 없이도 즉, 그릇된 일을 하려는 욕구가 없이도 어떤 강제의 상황하에서 즉, 자기 방어를 위하여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경우 죄를 저지르게 된다면 이러한 경우에도 과연 스스로 원해서 죄를 저질렀다고 할 수 있는가? 예를 들어 누군가가 어떤 여성을 보고 격렬한 정욕을 느끼고 그의 마음이 육체적인 쾌락에 이끌려서 그녀를 겁탈하도록 자극받았다면, 이러한 의지와 저속한 욕망은 죄가 아니고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아벨라르에 따르면 육체적인 욕구와 강렬한 욕망은 도덕적인 싸움을 벌일 수 있는 바탕이 된다. 우리는 이에 굴복할 것인가 아니면 이를 억누를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우리가 죄를 저지르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결정한다. 죄는 오직 우리가 격렬한 정욕에 굴복하고 이에 동의하였을 경우에만 성립된다. 따라서 죄란 여성을 보고 육체적 욕망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욕망에 동의하는 것이다. 의지의 동의는 저주받아 마땅한 것인데 이는 결코 성행위를 하려는 의지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항상 육체적 욕망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 자체만으로 곧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아니다. 사실 우리는 이러한 육체적 욕망을 억누르고 지배함으로써 최고의 승리와 영광에 이르게 된다.
사실 죄란, 어떤 그릇된 행위를 구체적으로 행하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불법적인 행위를 하는데 동의하였다면 그것으로 곧 충분히 죄를 저지른 것이다. 예를 들어 만일 육체적인 욕망에 빠져들어 기회가 주어지기만 하면 불법적인 성행위를 하려고 한다면 우리가 실지로 그런 행위를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미 죄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실지로 행위를 수행하는 것이 죄를 증가시키는데 아무 것도 더하지는 않는다.
행위의 도덕적 무관함
아벨라르의 윤리학 중 가장 논란의 대상의 되는 측면은 행위는 도덕적으로 무관한 것이라는 그의 주장일 것이다. 그는 행위를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것이 단지 육체적이고 외부적인 행위일 뿐 영혼의 행위가 아닌데 어떻게 행위의 실행이 이미 그러한 행위에 동의함으로써 생겨난 죄를 증가시킬 수 있는가? “어떤 행위를 실행하는 것은 죄를 늘이는데 어떤 역할도 하지 않으며 영혼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서는 영혼을 더럽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한다. 아벨라르는 더 나이가 어떤 육체적 행위라도 그것이 강요된 경우에는 그 행위의 행위자는 그것에 대하여 책임이 없으며 그로 인해서 비난받아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마찬가지로 행위자 자신이 무엇을 행하는지, 누구에게 행하는지, 무엇을 가지고 행하는지, 어떤 맥락에서 행하는지 등과 관련된 어느 한 가지 또는 그 이상의 중요한 요소를 파악하지 못한채 행한 모든 행위는 행위자는 그 행위의 책임을 면제받을 수 있다. 어떤 행위라도 도덕적인 죄를 범하지 않고 행해진다면 그 행위는 도덕적으로 무관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어떤 행위도 그 자체로는 그르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행위의 실행이 행위자를 도덕적 되를 저지른 것으로 만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아벨라르가 보기에는 한 행위자가 죄를 짓는다는 것은 행위자 자신이 도덕적으로 그리다는 점을 이미 알고 있는 행위를 실행하는데 동의하는 것이다.
아벨라르는 우리가 항상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우리의 영혼 또는 정신의 행위뿐이라고 주장한다. 옳은 행위를 하는가 아니면 그른 행위를 하는가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잇는 것이 아니다. 외부적인 사건이 우리로 하여금 선한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방해할 수도 있고 어떤 그른 일을 행하도록 강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방식의 행위에 대하여 우리가 동의하는가 동의하지 않는가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으며 우리가 실지로 무엇에 동의하였는가가 우리가 되를 저질렀는지 아니면 영광받을 만한지를 결정한다. 아벨라르는 이런 사실들로부터 도덕적 명령들은 사실상 우리의 육체적 행위를 향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동의를 향한 것이라는 점을 이끌어낸다. 우리는 오직 우리가 할 수 있는 능력 안에 속하는 것에 대해서만 도덕적인 명령을 받아들일 수가 있는데 오직 동의만이 항상 우리의 능력 안에 속하는 것이다. 도덕적인 금지가 행위와 관련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는 1225년 이탈리아의 로카세카에서 태어났다. 그는 후에 파리로가서 신학을 가르쳤으며 그 후에는 신학자로서의 경력을 쌓아가면서 이탈리아에 머물기도 하고 다시 파리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그의 철학은 중세 최고조의 시기에 등장한 가장 영예로운 것 중의 하나로 평가되며 그는 오늘날까지도 서양 문명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철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아퀴나스의 철학은 기독교 교리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종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윤리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접근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아퀴나스 철학의 다른 어떤 부분들보다도 윤리학의 영역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아퀴나스는 인간에게 있어 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윤리적 탐구를 시작한다. 따라서 선의 개념은 그의 윤리학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 되며 우리의 행위는 항상 어떤 목적 또는 선을 목표삼는데 궁극적으로는 가장 위대한, 최고의 그리고 최종의 선을 목표삼는다는 점도 기본적으로 전제된다. 인간에게 있어 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자체는 본성상 분명히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것이지만 이에 대한 아퀴나스의 대답은 명백히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서 그는 인간의 최고선은 결국 인간 자신의 완전성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완전성이란 인간이 신과 접촉하고 신의 계획을 완성함으로써 더욱 높은 수준으로 현존하게 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아퀴나스 모두는 인간의 삶을 선을 향한 불굴의 노력, 최종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시도로 보고 있으며
악한 의지가 없이도 즉, 그릇된 일을 하려는 욕구가 없이도 어떤 강제의 상황하에서 즉, 자기 방어를 위하여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경우 죄를 저지르게 된다면 이러한 경우에도 과연 스스로 원해서 죄를 저질렀다고 할 수 있는가? 예를 들어 누군가가 어떤 여성을 보고 격렬한 정욕을 느끼고 그의 마음이 육체적인 쾌락에 이끌려서 그녀를 겁탈하도록 자극받았다면, 이러한 의지와 저속한 욕망은 죄가 아니고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아벨라르에 따르면 육체적인 욕구와 강렬한 욕망은 도덕적인 싸움을 벌일 수 있는 바탕이 된다. 우리는 이에 굴복할 것인가 아니면 이를 억누를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우리가 죄를 저지르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결정한다. 죄는 오직 우리가 격렬한 정욕에 굴복하고 이에 동의하였을 경우에만 성립된다. 따라서 죄란 여성을 보고 육체적 욕망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욕망에 동의하는 것이다. 의지의 동의는 저주받아 마땅한 것인데 이는 결코 성행위를 하려는 의지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항상 육체적 욕망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 자체만으로 곧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아니다. 사실 우리는 이러한 육체적 욕망을 억누르고 지배함으로써 최고의 승리와 영광에 이르게 된다.
사실 죄란, 어떤 그릇된 행위를 구체적으로 행하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불법적인 행위를 하는데 동의하였다면 그것으로 곧 충분히 죄를 저지른 것이다. 예를 들어 만일 육체적인 욕망에 빠져들어 기회가 주어지기만 하면 불법적인 성행위를 하려고 한다면 우리가 실지로 그런 행위를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미 죄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실지로 행위를 수행하는 것이 죄를 증가시키는데 아무 것도 더하지는 않는다.
행위의 도덕적 무관함
아벨라르의 윤리학 중 가장 논란의 대상의 되는 측면은 행위는 도덕적으로 무관한 것이라는 그의 주장일 것이다. 그는 행위를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것이 단지 육체적이고 외부적인 행위일 뿐 영혼의 행위가 아닌데 어떻게 행위의 실행이 이미 그러한 행위에 동의함으로써 생겨난 죄를 증가시킬 수 있는가? “어떤 행위를 실행하는 것은 죄를 늘이는데 어떤 역할도 하지 않으며 영혼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서는 영혼을 더럽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한다. 아벨라르는 더 나이가 어떤 육체적 행위라도 그것이 강요된 경우에는 그 행위의 행위자는 그것에 대하여 책임이 없으며 그로 인해서 비난받아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마찬가지로 행위자 자신이 무엇을 행하는지, 누구에게 행하는지, 무엇을 가지고 행하는지, 어떤 맥락에서 행하는지 등과 관련된 어느 한 가지 또는 그 이상의 중요한 요소를 파악하지 못한채 행한 모든 행위는 행위자는 그 행위의 책임을 면제받을 수 있다. 어떤 행위라도 도덕적인 죄를 범하지 않고 행해진다면 그 행위는 도덕적으로 무관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어떤 행위도 그 자체로는 그르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행위의 실행이 행위자를 도덕적 되를 저지른 것으로 만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아벨라르가 보기에는 한 행위자가 죄를 짓는다는 것은 행위자 자신이 도덕적으로 그리다는 점을 이미 알고 있는 행위를 실행하는데 동의하는 것이다.
아벨라르는 우리가 항상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우리의 영혼 또는 정신의 행위뿐이라고 주장한다. 옳은 행위를 하는가 아니면 그른 행위를 하는가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잇는 것이 아니다. 외부적인 사건이 우리로 하여금 선한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방해할 수도 있고 어떤 그른 일을 행하도록 강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방식의 행위에 대하여 우리가 동의하는가 동의하지 않는가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으며 우리가 실지로 무엇에 동의하였는가가 우리가 되를 저질렀는지 아니면 영광받을 만한지를 결정한다. 아벨라르는 이런 사실들로부터 도덕적 명령들은 사실상 우리의 육체적 행위를 향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동의를 향한 것이라는 점을 이끌어낸다. 우리는 오직 우리가 할 수 있는 능력 안에 속하는 것에 대해서만 도덕적인 명령을 받아들일 수가 있는데 오직 동의만이 항상 우리의 능력 안에 속하는 것이다. 도덕적인 금지가 행위와 관련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는 1225년 이탈리아의 로카세카에서 태어났다. 그는 후에 파리로가서 신학을 가르쳤으며 그 후에는 신학자로서의 경력을 쌓아가면서 이탈리아에 머물기도 하고 다시 파리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그의 철학은 중세 최고조의 시기에 등장한 가장 영예로운 것 중의 하나로 평가되며 그는 오늘날까지도 서양 문명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철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아퀴나스의 철학은 기독교 교리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종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윤리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접근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아퀴나스 철학의 다른 어떤 부분들보다도 윤리학의 영역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아퀴나스는 인간에게 있어 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윤리적 탐구를 시작한다. 따라서 선의 개념은 그의 윤리학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 되며 우리의 행위는 항상 어떤 목적 또는 선을 목표삼는데 궁극적으로는 가장 위대한, 최고의 그리고 최종의 선을 목표삼는다는 점도 기본적으로 전제된다. 인간에게 있어 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자체는 본성상 분명히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것이지만 이에 대한 아퀴나스의 대답은 명백히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서 그는 인간의 최고선은 결국 인간 자신의 완전성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완전성이란 인간이 신과 접촉하고 신의 계획을 완성함으로써 더욱 높은 수준으로 현존하게 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아퀴나스 모두는 인간의 삶을 선을 향한 불굴의 노력, 최종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시도로 보고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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