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론
2. 임진왜란
2.1. 임진왜란의 원인
2.2. 임진왜란의 과정
2.3. 임진왜란의 결과
2.4. 임진왜란의 이후의 사회 변화
3. 병자호란
3.1. 병자호란의 원인
3.2. 병자호란의 과정
3.3. 병자호란의 결과
3.4. 병자호란의 이후의 사회 변화
4. 결론
2. 임진왜란
2.1. 임진왜란의 원인
2.2. 임진왜란의 과정
2.3. 임진왜란의 결과
2.4. 임진왜란의 이후의 사회 변화
3. 병자호란
3.1. 병자호란의 원인
3.2. 병자호란의 과정
3.3. 병자호란의 결과
3.4. 병자호란의 이후의 사회 변화
4. 결론
본문내용
계를 맺게 되었다. 이후 조선은 청의 속방이 되어 청에게 조공과 세폐를 바치고 청 황제의 책봉을 받아야 했다. 청과 조선은 다음과 같은 조약에 합의했다.
첫째, 조선은 청에 대해 신의 예를 행할 것. 둘째, 명에서 받은 고명책인(誥命冊印)을 바치고 명과의 교호(交好)를 끊으며 조선이 사용하는 명의 연호를 버릴 것. 셋째, 조선왕의 장자와 차자 그리고 대신의 아들을 볼모로 청에 보낼 것. 넷째, 청이 명을 정벌할 때 조선은 기일을 어기지 말고 원군을 파견할 것. 다섯째, 가도(島)를 공취할 때 조선은 배 50척을 보낼 것. 여섯째, 성절(聖節)·상삭(上朔)·동지(冬至)·중궁천추(中宮千秋)·태자천추·경(慶)·조(弔) 사신의 파견은 명의 구례(舊例)를 따를 것. 일곱째, 압록강을 건너간 뒤 피로인 중에서 도망자는 전송할 것. 여덟째, 내외제신과 혼인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할 것. 아홉째, 조선은 신구(新舊) 성원(城垣)을 보수하거나 쌓지 말 것. 열째, 올량합인(兀良合人)은 마땅히 쇄환할 것. 열한째, 조선은 기묘년(1639)부터 세폐를 보낼 것 등이었다.
3.4 병자호란 이후의 사회 변화
병자호란 이후 명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청과의 철저한 군신 관계가 설정되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청으로 볼모로 보내고 대표적인 주전파들을 처형하는 등 치욕적인 강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약에 따라 청에 보내는 세폐도 크게 늘었다. 이는 명나라에 보내던 조공품의 몇 배에 달하고 병자호란 이전에 청에 보내던 세폐의 3배에 달하는 수치였다고 한다. 청의 요구로 세폐가 너무 크게 늘어서 조선이 지는 경제적 부담은 엄청나게 가중되었고 이는 백성들의 고통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청의 군대가 휩쓸고 간 북쪽 지역은 약탈과 살육으로 황폐화되었다. 농업 중심의 경제사회가 붕괴되고 농민들은 스스로 노비가 되기도 하고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대규모의 백성들이 포로로 압송되어 고초를 겪었으며, 특히 당시 청군이 끌고 간 환향녀 문제는 당시 조선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들 중 상당수가 나중에 조선으로 귀환하여 시가(媤家)를 다시 찾았는데, 인조가 직접 \"강간 피해는 이혼의 대상이 아니니 내치지 말라.\"고 명령했음에도 사대부들이 무시하였다. 결국 그녀들 대부분은 비구니가 되거나 친정으로 돌아갔지만, 그렇기 못한 경우는 자살하거나 기녀로 전락해 성매매를 하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병자호란으로 청에 대한 적개심과 반감이 고조되어 북벌론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계속 커지는 청의 국력과 국내의 정치 현실 때문에 북벌론은 실행되지 못하게 되었다.
4. 결론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모두 국제정세에 대한 잘못된 판단 때문에 외세의 침략을 허용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임진왜란은 왜군의 침략을 예상하기는 하였으나 그 규모에 대한 오판으로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침략을 허용한 것이며, 병자호란은 쇠퇴해 가는 명나라와 세력을 키워 가는 후금(청나라) 사이에서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하여 침략을 허용한 것이다. 그런데 임진왜란은 끈질긴 극복의 과정을 통해 결과적으로 외세를 몰아낼 수 있었다. 수군의 활약, 의병의 활약, 조명 연합군의 활약에 힘입어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병자호란에서는 이런 과정을 발견할 수 없다. 오로지 무기력한 패배와 치욕적인 굴복의 모습만 발견된다.
두 난의 결과를 다르게 만든 요소는 무엇이었을까? 두 난에서 지배층의 무능은 공통적이다. 다만, 지도자의 순간적 상황 판단과 국민적 협력은 달리 보인다. 임진왜란에서는 적어도 이것이 가능했기 때문에 굴복을 피하고 항전할 수 있었던 것이고, 병자호란에서는 이것마저도 불가능했기 때문에 굴복할 수밖에 없
첫째, 조선은 청에 대해 신의 예를 행할 것. 둘째, 명에서 받은 고명책인(誥命冊印)을 바치고 명과의 교호(交好)를 끊으며 조선이 사용하는 명의 연호를 버릴 것. 셋째, 조선왕의 장자와 차자 그리고 대신의 아들을 볼모로 청에 보낼 것. 넷째, 청이 명을 정벌할 때 조선은 기일을 어기지 말고 원군을 파견할 것. 다섯째, 가도(島)를 공취할 때 조선은 배 50척을 보낼 것. 여섯째, 성절(聖節)·상삭(上朔)·동지(冬至)·중궁천추(中宮千秋)·태자천추·경(慶)·조(弔) 사신의 파견은 명의 구례(舊例)를 따를 것. 일곱째, 압록강을 건너간 뒤 피로인 중에서 도망자는 전송할 것. 여덟째, 내외제신과 혼인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할 것. 아홉째, 조선은 신구(新舊) 성원(城垣)을 보수하거나 쌓지 말 것. 열째, 올량합인(兀良合人)은 마땅히 쇄환할 것. 열한째, 조선은 기묘년(1639)부터 세폐를 보낼 것 등이었다.
3.4 병자호란 이후의 사회 변화
병자호란 이후 명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청과의 철저한 군신 관계가 설정되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청으로 볼모로 보내고 대표적인 주전파들을 처형하는 등 치욕적인 강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약에 따라 청에 보내는 세폐도 크게 늘었다. 이는 명나라에 보내던 조공품의 몇 배에 달하고 병자호란 이전에 청에 보내던 세폐의 3배에 달하는 수치였다고 한다. 청의 요구로 세폐가 너무 크게 늘어서 조선이 지는 경제적 부담은 엄청나게 가중되었고 이는 백성들의 고통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청의 군대가 휩쓸고 간 북쪽 지역은 약탈과 살육으로 황폐화되었다. 농업 중심의 경제사회가 붕괴되고 농민들은 스스로 노비가 되기도 하고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대규모의 백성들이 포로로 압송되어 고초를 겪었으며, 특히 당시 청군이 끌고 간 환향녀 문제는 당시 조선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들 중 상당수가 나중에 조선으로 귀환하여 시가(媤家)를 다시 찾았는데, 인조가 직접 \"강간 피해는 이혼의 대상이 아니니 내치지 말라.\"고 명령했음에도 사대부들이 무시하였다. 결국 그녀들 대부분은 비구니가 되거나 친정으로 돌아갔지만, 그렇기 못한 경우는 자살하거나 기녀로 전락해 성매매를 하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병자호란으로 청에 대한 적개심과 반감이 고조되어 북벌론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계속 커지는 청의 국력과 국내의 정치 현실 때문에 북벌론은 실행되지 못하게 되었다.
4. 결론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모두 국제정세에 대한 잘못된 판단 때문에 외세의 침략을 허용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임진왜란은 왜군의 침략을 예상하기는 하였으나 그 규모에 대한 오판으로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침략을 허용한 것이며, 병자호란은 쇠퇴해 가는 명나라와 세력을 키워 가는 후금(청나라) 사이에서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하여 침략을 허용한 것이다. 그런데 임진왜란은 끈질긴 극복의 과정을 통해 결과적으로 외세를 몰아낼 수 있었다. 수군의 활약, 의병의 활약, 조명 연합군의 활약에 힘입어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병자호란에서는 이런 과정을 발견할 수 없다. 오로지 무기력한 패배와 치욕적인 굴복의 모습만 발견된다.
두 난의 결과를 다르게 만든 요소는 무엇이었을까? 두 난에서 지배층의 무능은 공통적이다. 다만, 지도자의 순간적 상황 판단과 국민적 협력은 달리 보인다. 임진왜란에서는 적어도 이것이 가능했기 때문에 굴복을 피하고 항전할 수 있었던 것이고, 병자호란에서는 이것마저도 불가능했기 때문에 굴복할 수밖에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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