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인권의 변화
Ⅱ. 주권원칙과 인도주의 개입과의 대립, 이론적 접근
Ⅲ. 르완다-인도주의 개입사례
Ⅳ. 참고문헌 및 출처
Ⅱ. 주권원칙과 인도주의 개입과의 대립, 이론적 접근
Ⅲ. 르완다-인도주의 개입사례
Ⅳ. 참고문헌 및 출처
본문내용
상을 보였으나, 그동안 잠재되어있던 민족주의와 인종적 경쟁이 극에 치닫는 상황이 발생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르완다’ 사태이다.
르완다에서 1994년 집단살해가 일어나기 전에는 국제적 사회에서 크게 이슈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 비극은 1994년 하비아리마나 르완다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비행장에 접근하는 과정 중 추락하여 사망하였는데, 4년간의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대통령의 사망을 계기로 후투족 강경파인 대통령 경호군과 민병대가 정부를 장악, 총리를 살해 후 유엔군으로 파병된 벨기에군 10명을 추가로 사살하였다. 이후 후투족은 ‘인종청소’라는 명목하에 집단살해를 감행하여 RPF가 1994년 키갈리를 점령하기 까지 약 75-100만명의 목숨이 희생되었다.
이와같은 대규모 집단살해 사태가 발생하자 미국과 영국등의 주요 국가는 유엔군의 철수를 주장하였으며, 다양한 문제와 이유로 UNAMIR는 결의안 912에 의해 2,558명에서 270명으로 축소하고 대상 지역까지 완전 축소하였다. 중요한 것은 정치적인 문제에 의해서 철수명령과 추가 파병인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1998년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 증인으로 참석한 당시 UN Assistance in Rewanda 총사령관이였던 ‘Romeo Dallaire’장군은 UN안보리의 권한위임과 약 5,000명의 평화유지군 파병만 주어졌다면, 후투족의 인종청소 저지와 더불어 수십만명의 르완다 주민들의 생명이 보호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 주장하였다.
르완다 대통령 사망 1년 후 UN 안보리는 결의안 918을 통해 유엔평화유지군 5,500명을 강화하려 했으나, 미국의 반대 및 거부권 행사로 다른 회원국들 또한 개입을 주저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이러한 르완다 사태를 관망 할 수 없었다. 1994년 5월 말 서부 르완다에 수천명을 파병하여 국제사회의 합의 없이 일방적인 개입을 단행하였고, 인도주의 임무 성격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당시 프랑스군은 학살 저지, 난민보호, 정치중립이라는 타이틀을 앞세웠으며, 르완다 남서부에 ‘인도주의 보호지역’을 설정하였으나, RPF가 키갈리를 점령하여 집단학살이 중지되자 프랑스의 역할 또한 중지되었다. 남서부의 르완다 주민은 프랑스가 보호하고있었으며, 미국 행정부는 미국의 안보 이익으로 간주하고 미국과 유럽연합 사령부는 동부에서 인도주의 구호작전을 수행 하였다.
즉, 빠른 실행과 결단이 있었다면 르완다의 수십만 주민들은 지금도 누군가의 소중한 사람으로써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르완다의 집단살해는 충분히 막을 수 있었으나 정치적인 문제로 너무 큰 비극이 거부할 수 없이 찾아온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UN 안전보장이사회의 정치적인 의지 결집에 실패한 사례로 남아있으며, 냉정 종식 이후 UN 안전보장이사회가 상임이사국들간에 완전 합의제를 채택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인권’은 인류 전체가 서로 지켜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Ⅳ. 참고문헌 및 출처
최의철, ‘인도주의 개입에 대한 국제사회의 동향’, 통일연구원, 2004.
르완다에서 1994년 집단살해가 일어나기 전에는 국제적 사회에서 크게 이슈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 비극은 1994년 하비아리마나 르완다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비행장에 접근하는 과정 중 추락하여 사망하였는데, 4년간의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대통령의 사망을 계기로 후투족 강경파인 대통령 경호군과 민병대가 정부를 장악, 총리를 살해 후 유엔군으로 파병된 벨기에군 10명을 추가로 사살하였다. 이후 후투족은 ‘인종청소’라는 명목하에 집단살해를 감행하여 RPF가 1994년 키갈리를 점령하기 까지 약 75-100만명의 목숨이 희생되었다.
이와같은 대규모 집단살해 사태가 발생하자 미국과 영국등의 주요 국가는 유엔군의 철수를 주장하였으며, 다양한 문제와 이유로 UNAMIR는 결의안 912에 의해 2,558명에서 270명으로 축소하고 대상 지역까지 완전 축소하였다. 중요한 것은 정치적인 문제에 의해서 철수명령과 추가 파병인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1998년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 증인으로 참석한 당시 UN Assistance in Rewanda 총사령관이였던 ‘Romeo Dallaire’장군은 UN안보리의 권한위임과 약 5,000명의 평화유지군 파병만 주어졌다면, 후투족의 인종청소 저지와 더불어 수십만명의 르완다 주민들의 생명이 보호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 주장하였다.
르완다 대통령 사망 1년 후 UN 안보리는 결의안 918을 통해 유엔평화유지군 5,500명을 강화하려 했으나, 미국의 반대 및 거부권 행사로 다른 회원국들 또한 개입을 주저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이러한 르완다 사태를 관망 할 수 없었다. 1994년 5월 말 서부 르완다에 수천명을 파병하여 국제사회의 합의 없이 일방적인 개입을 단행하였고, 인도주의 임무 성격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당시 프랑스군은 학살 저지, 난민보호, 정치중립이라는 타이틀을 앞세웠으며, 르완다 남서부에 ‘인도주의 보호지역’을 설정하였으나, RPF가 키갈리를 점령하여 집단학살이 중지되자 프랑스의 역할 또한 중지되었다. 남서부의 르완다 주민은 프랑스가 보호하고있었으며, 미국 행정부는 미국의 안보 이익으로 간주하고 미국과 유럽연합 사령부는 동부에서 인도주의 구호작전을 수행 하였다.
즉, 빠른 실행과 결단이 있었다면 르완다의 수십만 주민들은 지금도 누군가의 소중한 사람으로써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르완다의 집단살해는 충분히 막을 수 있었으나 정치적인 문제로 너무 큰 비극이 거부할 수 없이 찾아온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UN 안전보장이사회의 정치적인 의지 결집에 실패한 사례로 남아있으며, 냉정 종식 이후 UN 안전보장이사회가 상임이사국들간에 완전 합의제를 채택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인권’은 인류 전체가 서로 지켜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Ⅳ. 참고문헌 및 출처
최의철, ‘인도주의 개입에 대한 국제사회의 동향’, 통일연구원,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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