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주요 고문헌 조사 ) 관심 있는 한국의 주요 고문헌 1종을 선정하고 기본적인 정보 정리 (저자, 내용, 형태사항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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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의 주요 고문헌 조사 ) 관심 있는 한국의 주요 고문헌 1종을 선정하고 기본적인 정보 정리 (저자, 내용, 형태사항 등)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론
2. 본론
(1) 석보상절의 기본 정보
(2) 석보상절의 구성과 의미
1) 석보상절의 구성
3) 석보상절의 의미
(3) 석보상절의 판본
1) 금속(동) 활자본
2) 복각 목판본
(4) 석보상절의 소장처
(4)
3. 결론
4. 참고문헌

본문내용

어야 한다. 실제 지어진 순서를 보면 석보상절이 먼저였으나 수양대군은 스스로 왕이 된 지 5년 후인 1459년에 아버지인 세종의 노래 월인천강지곡을 앞세워 아들인 자기의 산문인 석보상절의 순서를 뒤로 하고, 월인과 석보의 순서로 완성하였다. 즉 월인석보는 조선식 대장경의 시작이다. 따라서 이 세 개의 책은 부모와 자식이 대를 이어가면서 쓴 책이고, 둘이 합하면 하나가 되고 나누게 되면 셋이 되는 화엄사상을 실현한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불가사의한 집필 완성 속도를 살펴본다. 그렇다면 대작인 석보상절 24권과 600여 권의 대서사시인 월인천강지곡의 완성 속도와 분량은 어떠했을까 살펴보자. 21세기의 정보를 바탕으로 생각해 볼 때 훈민정음을 반포한 지 10개월 만에 이토록 방대하고 훌륭한 산문과 운문을 짓기는 생각해보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것은 곧 훈민정음 창제 때부터 준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방증이고, 조력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월인석보의 서문에는 책의 자문단으로 명기되어있는 11명의 동참자들이 등장한다. 이를 정독을 하다 보면 석보상절에서는 ‘김수온’이, 월인석보에서는 ‘신미’의 말이 겹쳐질 때가 있다. 과연 그러할까.
석보상절을 꼼꼼히 읽게 된다면 세조와 세종이 이 두 책을 짓기에 이미 충분한 역량을 갖춘 불교학자임에 대한 믿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읽기를 거듭할수록 이것을 작성하는 것은 결코 한 명의 천재적인 단독 작업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현재에서 훈민정음의 창제에 관여했다고 알려진 사람은 바로 신미 대사이고, 석보상절의 저본으로 추정되고 있는 중수석가보를 편찬자인 김수온은 그의 동생이다. 지금까지도 충북 영동의 김씨의 가문에는 그들의 훈민정음 창제와 석보상절, 월인석보의 편찬에 관여한 사실에 대한 근거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이 어디 그들 뿐이겠는가. 실제로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을 합해서 수정하고 보완함으로써 환골탈태시킨 월인석보에는 모두 11명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다. 이 11명은 바로 혜각존자 신미, 판선종사 수미, 판교종사 설준, 연경사 주지 홍준, 회암사 주지의 효운, 대자사 주지의 지해, 소요사 주지의 해초, 대선사 사지, 학열, 학조, 가정대부동 지중추원사인 김수온이 그들이다. 이들 중 김수온을 제외하고는 모두 스님이다. 이것이 무엇인지를 의미하는 지를 생각해보면 훈민정음을 창제와 관련된 기록이 없는 사람들이 첫 번째 책에 자문단으로 다수 참여하고 있다.
세조는 월인석보를 편찬한 2년 후인 1461년에 간경도감을 설치해서 현재 가장 많이 알려져있는 거의 모든 주요 경전이 훈민정음 불경으로 재탄생되었다. ‘능엄경언해’를 필두로 법화경언해, 금강경언해, 반야심경언해, 아미타경언해, 원각경언해 등이 1462년부터 1467년까지의 5년 사이에 훈민정음 불경으로 태어났다. 이 과정에서 이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신미는 목우자수심결, 사법어, 몽산화상법어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고 있다.
우리는 아직도 ‘훈민정음’이라는 문자 자체의 우수성, 독창성, 과학성, 체계성, 합리성이란 단어에만 열광한 채로만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훈민정음의 우수성에 대해 구체적인 예를들어 과학적으로 설명하시오’ 라는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답할 수 있는가. 문자라는 것은 아무리 완벽하더라도 그것이 말로 사용되고 문장으로 활용될 수 없다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이 세상의 얼마나 많은 언어와 문자가 사어가 되어 버리고 지속해서 사라지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훈민정음은 600년 전에 창제되어 지금까지 활발하게 세계를 누리며 한류문화를 선도하고 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에는 훈민정음으로 지어진 첫 번째 책인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의 공이 있고 바로 그것을 지은 저자들과 집단지성 덕분이다.
석보상절의 서문 앞 훈민정음을 보면, 사람들은 흔히 훈민정음에 대해 얘기할 때 세종이 지은 책 서문인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를 언급한다. 이 서문이 바로 월인석보에도 등장하는데 월인석보의 차례에는 훈민정음으로 쓴 서문과 팔상도, 서문, 그리고 월인석보의 본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월인석보가 불교 책임에도 불구하고 훈민정음으로 시작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품는 이들도 있으나 월인석보의 목표는 백성들에게 훈민정음을 알리기 위한 최초의책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선 새로 만든 글자 훈민정음을 익히고 나서, 그 다음에 새로이 글자로 이루어진 문장인 석보상절을 천천히 익히게 하려했던 배려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세종이라면 과연 어떻게 했을까. 우리의 할머니나 하다못해 어머니 세대까지만 하더라도 글자를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심지어 여자가 대학에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교육에 남녀 차별을 둔 부모들도 많았다. 과거와는 다르다 하여도 21세기가 아직 이러하는데 하물며 600년 전의 양반 중심으로 남존여비의 계급사회였던 조선 시대에 한자로만 이루어진 문자의 철옹성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어떠했을까. 문자는 바로 그 시대의 특권층이 지닌 전유물이었다. 힘이 없는 백성들에게 새로운 문자의 길을 열어준 사람이 바로 세종이다. 조선의 백성들 모두에게 편견없이 사용할 수 있는 배려와 특권을 준 것이다.
수양대군의 석보상절 서문을 보면, 서문의 형식은 먼저 본문이 나오고 그 뒤에는 본문을 해설하는 주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주석을 하나하나 풀이하다 보면 본문의 맥이 끊겨버려 수려한 수양대군의 육성을 이어가지 못하는 문제가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주석의 내용은 현대어의 번역과 풀이 과정에서 충분히 살리고 본문의 내용을 충실히 전달하고자 했다.
석보상절 서문의 형식을 보면 먼저 한문에 토를 달고, 크고 굵은 글씨로 원문을 쓴다. 그런 다음에 설명이나 풀이가 필요한 정의를 사전적으로 해석한 글로 주석을 단다. 이것은 세주 또는 협주라고 불린다. 그러고나서 줄을 바꾼 후에 한 칸을 내려써서 훈민정음으로 지은 우리말인 석보상절의 서문이 펼쳐지게 된다.
〈석보상절 서〉 釋譜詳節序
佛이 爲三界之尊샤
[ ] 부톄 三界옛 尊이 외야겨샤
弘渡群生시니
[ ]衆生 너비 濟渡시니 無量功德이 그지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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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22.08.24
  • 저작시기2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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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118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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