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세계의역사
1) 다음 중 하나의 문항을 택하여 기술하시오.(25점)
1. 19세기 중엽 이후 중화민국의 수립에 이르기까지의 중국의 쇠퇴과정을 서술하고 그 원인에 대해서 설명해 보시오.
2. 14세기 중엽부터 15세기 중엽까지 진행된 백년전쟁의 과정을 약술하고, 그 성격에 대해서 서술하시오.
2) 다음 중 하나의 문항을 택하여 기술하시오.(25점)
1. 일본 에도(도쿠가와) 바쿠후의 전개과정을 정리하고, 그 역사적 의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서술하시오.
2.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서술하시오.
목차
1) 19세기 중엽 이후 중화민국의 수립에 이르기까지의 중국의 쇠퇴과정을 서술하고 그 원인에 대해서 설명해 보시오.
2)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서술하시오.
출처 및 참고문헌
1) 다음 중 하나의 문항을 택하여 기술하시오.(25점)
1. 19세기 중엽 이후 중화민국의 수립에 이르기까지의 중국의 쇠퇴과정을 서술하고 그 원인에 대해서 설명해 보시오.
2. 14세기 중엽부터 15세기 중엽까지 진행된 백년전쟁의 과정을 약술하고, 그 성격에 대해서 서술하시오.
2) 다음 중 하나의 문항을 택하여 기술하시오.(25점)
1. 일본 에도(도쿠가와) 바쿠후의 전개과정을 정리하고, 그 역사적 의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서술하시오.
2.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서술하시오.
목차
1) 19세기 중엽 이후 중화민국의 수립에 이르기까지의 중국의 쇠퇴과정을 서술하고 그 원인에 대해서 설명해 보시오.
2)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서술하시오.
출처 및 참고문헌
본문내용
짐과 동시에 농촌공동체의 결속력은 약해지면서 농촌 개인주의가 만연했다. 이제 자코뱅파와 상퀼로트 연합이 새로운 정부의 중심이 되었다. 자코뱅파의 로베스피에르는 자유, 평등, 도덕의 가치를 앞세운 덕의 공화국을 건설하고자 했다. 새로운 공화국의 건설을 위해서는 민중의 참여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혁명의 중심에는 자코뱅 혁명가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민중의 경제적 요구사항에는 찬성했지만, 사회적, 경제적 체제의 개혁에 있어서는 반대했다.
1793년 영국군의 툴롱 함락 소식에 자극받은 민중들이 국민공회를 재차 습격했고 곧이어 공포정치가 시작되었다. 로베스피에르는 공화국의 단결을 주장했으나 국민공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와 그의 지지자는 1793년 말 혁명전쟁의 전세가 호전되자, 민중들을 견제해야 할 상대로 판단했다. 그러나 같은 시기 비기독교화의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민중이 과격한 투쟁을 시작했다. 로베스피에르와 국민공회는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최고 존재를 숭배하기 위한 제전을 거행하면서 비기독교화에 반대했다.
1794년 초 식량 위기에는 민중과 극좌파가 결합하고, 로베스피에르와 관용파가 연합하면서 민중에 대한 엄격한 규율이 느슨해졌다. 그러나 민중은 혁명정부에 깊은 불신을 갖게 되었고, 민중과 혁명정부 간 결속은 사라지고 말았다. 공포정치가 종식되고, 1795년 총재정부가 수립되었다. 총재정부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군대에 의존했다. 당시 혁명군의 지휘자였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이하 나폴레옹)는 1799년의 쿠데타로 무능한 총재정부를 쓰러뜨리고 통령정부를 수립했다. 유럽 대륙을 제패한 나폴레옹은 혁명의 계승자보다는 군사적 정복자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에 시민계급과 재산권, 행정제도를 확립함으로써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이후에 국가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제1제정을 건설하였다. 군사와 정치에 다양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던 그는 1784년 파리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임관 뒤, 군인으로 살아왔다. 1795년 말, 파리에 반란이 일어나 국민공회가 다시 한번 위기에 봉착했을 때, 나폴레옹은 바라스의 요청으로 반란을 잠재우고 폭도들을 물리치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행보를 보이면서 바라스의 정부(情婦)인 조제핀과 혼인하고 이탈리아의 원정군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캄포포르미오 조약을 체결하여 이탈리아 각지에 이상적인 공화국을 건설하였다. 이러한 성과로 인해 나폴레옹의 명성은 프랑스에서도 높아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집트를 원정하여 카이로에 입성한 후, 아부키르만에서 영국함대에 패배한 나폴레옹은 홀로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귀국 후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독재를 시작하였다. 그는 인간성을 무시하고 도덕성이 없는 행동을 일삼았다. 그는 그만의 정치방식인 보나파르티즘을 확립시켰고, 제1통령으로서 국정을 정비하고 법전을 편찬하였으며,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에도 여러 국가와 전쟁하고 조약을 맺으면서 그의 위상을 전 세계에 알렸다. 최후에는 1812년 러시아원정에 실패하면서 타국에 의해 파리를 빼앗겼고, 나폴레옹은 유배되는 결말을 맞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을 자신의 위세를 떨치는 수단으로 이용했다. 즉 그는 프랑스혁명의 이념을 자신이 이룩한 통령정부의 목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프랑스혁명은 단지 나폴레옹이 자신의 권력을 얻기 위한 하나의 도구, 장치에 불과했다. 그는 통령정부를 수립한 이후 여러 제도적 기반을 다지기는 했으나, 유럽 국가에 대한 정복을 멈추지 않았다. 물론 과거의 나라들이 영토를 얻고 재정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 전쟁을 일삼았다고 할 수 있지만, 나폴레옹의 정복 전쟁은 그것과는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바라스의 요청으로 국민공회의 습격을 지원할 때도 자신이 위상을 떨칠 수 있는 발판을 찾던 인물이다. 이후 조제핀과 혼인한 것 역시 본인의 위상, 평판을 위한 것이었으며,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로 귀국하여 쿠데타를 일으킨 것 역시 프랑스에서는 소문으로만 무성하던 나폴레옹의 강력함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봤을 때, 나폴레옹이 프랑스혁명 정신을 진심으로 지지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오히려 그런 정신을 갖고 있는 세력을 이용해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고 했을 뿐이다.
프랑스 혁명의 본질은 민중들의 봉기로 구체제인 봉건 체제를 붕괴하고 새로운 체제를 들어서게 한 사건이었다. 혁명을 일으키기 전 프랑스는 제1신분인 고위성직자와 제2신분인 귀족이 나라의 모든 부와 권력을 소유하고 특혜를 누리고 있었다. 한 나라의 부와 권력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제3신분에 있는 민중의 삶은 절망적이었다. 프랑스의 사회적 불평등에 대하여 지배층은 별다른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였고, 자본가들을 중심으로 한 부르주아 계급의 세력이 커지면서 기존의 정치를 반대하면서, 절대 왕정에서 공화정으로의 움직임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시기 프랑스혁명은 명분이 있는 투쟁이며 봉기였다. 그들은 혁명을 통해 자유와 평등을 얻어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집권한 이후에는 자유와 평등을 찾기 어려웠다. 오히려 나폴레옹은 정복 전쟁을 하는 과정에서 독재적인 면모를 보였으며, 전쟁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컸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침략과 전쟁을 일삼으며 프랑스 사회를 혼란스럽게 했다. 이는 프랑스혁명을 일으켰던 시민들의 이상적인 국가와 통치자의 모습은 전혀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통령으로서의 그의 업적도 존재한다. 시민계급과 재산권, 행정제도를 확립한 것, 정을 정비하고 법전을 편찬한 것, 전쟁을 통해 인근 국가들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면서 유럽 내 프랑스의 영향력을 높인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프랑스혁명에 기반을 둔 국가의 건설이었을까. 시간이 흐르고 역사를 배우는 입장에서는 나폴레옹의 쿠데타로 인한 강력한 통치는 프랑스를 위한 것이 아닌 나폴레옹 개인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한다.
출처 및 참고문헌
-세계의 역사, 2019, 박구병 외,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나폴레옹 1세, 두산백과
1793년 영국군의 툴롱 함락 소식에 자극받은 민중들이 국민공회를 재차 습격했고 곧이어 공포정치가 시작되었다. 로베스피에르는 공화국의 단결을 주장했으나 국민공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와 그의 지지자는 1793년 말 혁명전쟁의 전세가 호전되자, 민중들을 견제해야 할 상대로 판단했다. 그러나 같은 시기 비기독교화의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민중이 과격한 투쟁을 시작했다. 로베스피에르와 국민공회는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최고 존재를 숭배하기 위한 제전을 거행하면서 비기독교화에 반대했다.
1794년 초 식량 위기에는 민중과 극좌파가 결합하고, 로베스피에르와 관용파가 연합하면서 민중에 대한 엄격한 규율이 느슨해졌다. 그러나 민중은 혁명정부에 깊은 불신을 갖게 되었고, 민중과 혁명정부 간 결속은 사라지고 말았다. 공포정치가 종식되고, 1795년 총재정부가 수립되었다. 총재정부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군대에 의존했다. 당시 혁명군의 지휘자였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이하 나폴레옹)는 1799년의 쿠데타로 무능한 총재정부를 쓰러뜨리고 통령정부를 수립했다. 유럽 대륙을 제패한 나폴레옹은 혁명의 계승자보다는 군사적 정복자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에 시민계급과 재산권, 행정제도를 확립함으로써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이후에 국가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제1제정을 건설하였다. 군사와 정치에 다양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던 그는 1784년 파리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임관 뒤, 군인으로 살아왔다. 1795년 말, 파리에 반란이 일어나 국민공회가 다시 한번 위기에 봉착했을 때, 나폴레옹은 바라스의 요청으로 반란을 잠재우고 폭도들을 물리치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행보를 보이면서 바라스의 정부(情婦)인 조제핀과 혼인하고 이탈리아의 원정군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캄포포르미오 조약을 체결하여 이탈리아 각지에 이상적인 공화국을 건설하였다. 이러한 성과로 인해 나폴레옹의 명성은 프랑스에서도 높아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집트를 원정하여 카이로에 입성한 후, 아부키르만에서 영국함대에 패배한 나폴레옹은 홀로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귀국 후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독재를 시작하였다. 그는 인간성을 무시하고 도덕성이 없는 행동을 일삼았다. 그는 그만의 정치방식인 보나파르티즘을 확립시켰고, 제1통령으로서 국정을 정비하고 법전을 편찬하였으며,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에도 여러 국가와 전쟁하고 조약을 맺으면서 그의 위상을 전 세계에 알렸다. 최후에는 1812년 러시아원정에 실패하면서 타국에 의해 파리를 빼앗겼고, 나폴레옹은 유배되는 결말을 맞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을 자신의 위세를 떨치는 수단으로 이용했다. 즉 그는 프랑스혁명의 이념을 자신이 이룩한 통령정부의 목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프랑스혁명은 단지 나폴레옹이 자신의 권력을 얻기 위한 하나의 도구, 장치에 불과했다. 그는 통령정부를 수립한 이후 여러 제도적 기반을 다지기는 했으나, 유럽 국가에 대한 정복을 멈추지 않았다. 물론 과거의 나라들이 영토를 얻고 재정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 전쟁을 일삼았다고 할 수 있지만, 나폴레옹의 정복 전쟁은 그것과는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바라스의 요청으로 국민공회의 습격을 지원할 때도 자신이 위상을 떨칠 수 있는 발판을 찾던 인물이다. 이후 조제핀과 혼인한 것 역시 본인의 위상, 평판을 위한 것이었으며,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로 귀국하여 쿠데타를 일으킨 것 역시 프랑스에서는 소문으로만 무성하던 나폴레옹의 강력함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봤을 때, 나폴레옹이 프랑스혁명 정신을 진심으로 지지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오히려 그런 정신을 갖고 있는 세력을 이용해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고 했을 뿐이다.
프랑스 혁명의 본질은 민중들의 봉기로 구체제인 봉건 체제를 붕괴하고 새로운 체제를 들어서게 한 사건이었다. 혁명을 일으키기 전 프랑스는 제1신분인 고위성직자와 제2신분인 귀족이 나라의 모든 부와 권력을 소유하고 특혜를 누리고 있었다. 한 나라의 부와 권력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제3신분에 있는 민중의 삶은 절망적이었다. 프랑스의 사회적 불평등에 대하여 지배층은 별다른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였고, 자본가들을 중심으로 한 부르주아 계급의 세력이 커지면서 기존의 정치를 반대하면서, 절대 왕정에서 공화정으로의 움직임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시기 프랑스혁명은 명분이 있는 투쟁이며 봉기였다. 그들은 혁명을 통해 자유와 평등을 얻어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집권한 이후에는 자유와 평등을 찾기 어려웠다. 오히려 나폴레옹은 정복 전쟁을 하는 과정에서 독재적인 면모를 보였으며, 전쟁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컸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침략과 전쟁을 일삼으며 프랑스 사회를 혼란스럽게 했다. 이는 프랑스혁명을 일으켰던 시민들의 이상적인 국가와 통치자의 모습은 전혀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통령으로서의 그의 업적도 존재한다. 시민계급과 재산권, 행정제도를 확립한 것, 정을 정비하고 법전을 편찬한 것, 전쟁을 통해 인근 국가들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면서 유럽 내 프랑스의 영향력을 높인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프랑스혁명에 기반을 둔 국가의 건설이었을까. 시간이 흐르고 역사를 배우는 입장에서는 나폴레옹의 쿠데타로 인한 강력한 통치는 프랑스를 위한 것이 아닌 나폴레옹 개인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한다.
출처 및 참고문헌
-세계의 역사, 2019, 박구병 외,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나폴레옹 1세,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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