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론
2. 생애
1) 초기 수학 활동
2) 교육 활동과 독립운동
3. 해방 이후 주요 활동
1) 해방 이후 국내정치 조직화와 반탁운동
2) 신익희의 정치활동과 우익 사상
3) 정부 수립 이후의 활동
4. 기존의 평가
1) 현실적 민족주의자
2) 의회민주주의 기반의 실용정치
5. 재해석과 결론
6. 참고문헌 및 출처
2. 생애
1) 초기 수학 활동
2) 교육 활동과 독립운동
3. 해방 이후 주요 활동
1) 해방 이후 국내정치 조직화와 반탁운동
2) 신익희의 정치활동과 우익 사상
3) 정부 수립 이후의 활동
4. 기존의 평가
1) 현실적 민족주의자
2) 의회민주주의 기반의 실용정치
5. 재해석과 결론
6. 참고문헌 및 출처
본문내용
실적인 상황을 우선으로 고려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통합되지 못하고 기능이 모호해지자, 신익희는 고민 없이 새로운 독립의 방법을 강구했다. 신익희는 좌우 이념에 개의치 않고 독립을 위하여 필요한 조직을 직접 구성했다. 신익희는 한국혁명당과 신한독립당을 직접 조직하였으며, 때로는 민족혁명당이나 조선민족전선연맹 등에 참여하는 등 독립을 위한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다. 그의 목표는 일관되게 독립을 향해 있었으며, 그렇기에 이념과 명분에 사로잡혀 특정 조직에 집착하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신익희는 정당통합운동, 민족협동전선운동 등의 좌우 통합운동을 전개하였다. 건국 이후 상당한 자유민주주의적 철학을 보여준 그가 독립운동기에는 좌파무장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의 현실주의적 면모를 명확히 엿볼 수 있다. 신익희가 추구한 민족의 통합전선은 민족의 통합이라는 이념적 목표보다는 일제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수단이었던 것이다. 이강수, 위 문헌, 194쪽 참고
해방 이후 신익희의 행적에도 현실주의적 모습은 자주 보인다. 이러한 모습 덕에 신익희는 국가 건설의 실무적 측면에서 뛰어난 실적을 보여준다. 신익희는 정치공작대를 조직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법률 등 구체적인 건국 방안을 제시하였다. 나아가 그의 활동은 단순히 임시정부의 승인 문제를 떠나, 새로운 국가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영역별 시스템 구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였다. 이강수, 위 문헌, 194~195쪽 참고
정부 수립 이후의 그의 행적은 현실적 민족주의자의 모습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이승만과 함께 단독정부수립을 추구했던 신익희는 부산정치파동과 사사오입 개헌 등의 사건 이후로 이승만 독재에 반대하는 행적을 보여주었다. 앞서 서술하였듯이, 신익희는 조봉암 등을 설득하여 이승만과 자유당에 반대하는 정당을 형성하기 위해 범야권통합운동을 전개했다. 나아가 신익희는 민주당을 결성하여 대권 후보로 나서기도 하였다. 주목할 것은 신익희가 이미 이승만 세력에게 제거 대상으로 낙인이 찍혀 있었다는 것이다. 신익희가 ‘반민특위요원암살음모사건’의 암살대상자였으며, 대표적인 공안사건에 연루되기도 하였다는 사실이 이것을 반증한다. 이강수, 위 문헌, 196~197쪽 참고
2) 의회민주주의 기반의 실용정치
신익희의 현실주의적 성격은 곧 정부 수립 이후의 실용주의로 이어진다. 그의 실용성을 추구한 정치 활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의회민주주의’의 확립이었다. 이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신익희는 입법부의 독립성과 행정부의 실용적 역할을 중시했다. 전자의 경우 신익희가 의원내각제를 더욱 선호했던 이유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익희는 대통령제의 한계를 지적하며 책임의식이 명확히 부여되는 의원내각제를 추구했다. 대통령제와 달리 의원내각제는 행정 실책이나 국정 실패의 책임소재가 분명하여 책임정치를 구현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엄격한 삼권분립의 의미하며, 신익희가 입법부 중심의 의회민주주의와 강력한 주체성을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남광규, 위 논문, 100~103쪽 참고
후자의 경우 신익희의 실용주의적 측면이 잘 드러난다. 신익희는 현대 국가에서 행정부의 역할이 점차 증대할 것으로 생각하였고, 이를 대비하기 위해 제도와 법의 완비 및 전문 공무원 관료의 양성을 시도했다. 신익희는 행정부가 국민의 일상생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기능에 찬성했으며, 그 목적은 자유방임주의 사회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국민의 일상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행정부의 역할 강화를 위해 신익희는 행정연구회를 조직하여 국가시험제도를 강력히 주장하기도 하였다. 신익희는 행정부의 역할과 행정 절차가 점점 복잡해질 것이기에 이를 대비하기 위한 교육과 시험제도를 강력히 주장한 것이다. 실제로 신익희는 국민대학교를 설립하면서 ‘국가건설의 참된 역군이 되게 할 것’을 건학목표로 삼기도 하였다. 이러한 신익희의 행정부 역할 강화 논리는 그의 실용적 면모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남광규, 위 논문, 100~103쪽 참고
5. 재해석과 결론
신익희의 행적과 삶에서 그의 현실주의자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분명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이념에 매몰되지 않고 가장 현실적인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러나 신익희의 행동은 단순히 현실주의자적 면모로 해석될 수는 없다. 우선 그의 현실주의는 기회주의가 아니었다. 즉, 그는 단순히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는 집단을 찾기 위해 여러 조직 활동에 참여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념과 집단의 통합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한 적극적인 태도의 인물이었다.
다음으로 특정 사상과 이념에 치우치지 않았을 뿐, 신익희가 추구하는 사상과 신념은 명확했다. 우선 해방 이전 신익희의 신념은 독립 국가의 건설이었다. 이는 와세다대학에서의 배움이나 신문화운동에서 근대 학문을 접했던 경험이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 신익희는 독립국의 개념을 명확히 알고 있었기에, 한반도에 근대적 의미의 독립국을 건설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 요소가 일제의 지배였고, 신익희는 일제강점기로부터의 해방을 가장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이를 위해 어떠한 이념을 활용해야 하는지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익희는 이념에 따라 독립운동 조직이 분열된 상황을 부정적으로 여기고 통합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그가 단순히 현실적인 측면만 가진 인물이었다면 자신의 이익을 찾아 제국주의의 편에 섰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그가 오로지 실용적인 인물이었다면 건국 이후 이승만의 독재에 저항하지 않고 체제 내에서 시스템 강화에만 신경을 몰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내면의 지식과 신념이 명확했기에 그의 활동은 일관된 목표를 향했다. 그는 좌우 이념에 매몰되지 않고 독립운동에 임했으며, 의회민주주의라는 목표를 위해 독재에 저항했다. 따라서 신익희는 단순히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관료를 넘어, 일관된 대의를 지닌 민족주의 정치가라고 평가할 수 있다.
6. 참고문헌 및 출처
이강수, 좌우의 벽을 뛰어넘은 독립운동가 신익희, 역사공간, 2014.
남광규, 『해방 이후 신익희의 정치활동과 정치노선』, 「평화연구」, 제18권 2호, 2010.
해방 이후 신익희의 행적에도 현실주의적 모습은 자주 보인다. 이러한 모습 덕에 신익희는 국가 건설의 실무적 측면에서 뛰어난 실적을 보여준다. 신익희는 정치공작대를 조직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법률 등 구체적인 건국 방안을 제시하였다. 나아가 그의 활동은 단순히 임시정부의 승인 문제를 떠나, 새로운 국가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영역별 시스템 구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였다. 이강수, 위 문헌, 194~195쪽 참고
정부 수립 이후의 그의 행적은 현실적 민족주의자의 모습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이승만과 함께 단독정부수립을 추구했던 신익희는 부산정치파동과 사사오입 개헌 등의 사건 이후로 이승만 독재에 반대하는 행적을 보여주었다. 앞서 서술하였듯이, 신익희는 조봉암 등을 설득하여 이승만과 자유당에 반대하는 정당을 형성하기 위해 범야권통합운동을 전개했다. 나아가 신익희는 민주당을 결성하여 대권 후보로 나서기도 하였다. 주목할 것은 신익희가 이미 이승만 세력에게 제거 대상으로 낙인이 찍혀 있었다는 것이다. 신익희가 ‘반민특위요원암살음모사건’의 암살대상자였으며, 대표적인 공안사건에 연루되기도 하였다는 사실이 이것을 반증한다. 이강수, 위 문헌, 196~197쪽 참고
2) 의회민주주의 기반의 실용정치
신익희의 현실주의적 성격은 곧 정부 수립 이후의 실용주의로 이어진다. 그의 실용성을 추구한 정치 활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의회민주주의’의 확립이었다. 이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신익희는 입법부의 독립성과 행정부의 실용적 역할을 중시했다. 전자의 경우 신익희가 의원내각제를 더욱 선호했던 이유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익희는 대통령제의 한계를 지적하며 책임의식이 명확히 부여되는 의원내각제를 추구했다. 대통령제와 달리 의원내각제는 행정 실책이나 국정 실패의 책임소재가 분명하여 책임정치를 구현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엄격한 삼권분립의 의미하며, 신익희가 입법부 중심의 의회민주주의와 강력한 주체성을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남광규, 위 논문, 100~103쪽 참고
후자의 경우 신익희의 실용주의적 측면이 잘 드러난다. 신익희는 현대 국가에서 행정부의 역할이 점차 증대할 것으로 생각하였고, 이를 대비하기 위해 제도와 법의 완비 및 전문 공무원 관료의 양성을 시도했다. 신익희는 행정부가 국민의 일상생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기능에 찬성했으며, 그 목적은 자유방임주의 사회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국민의 일상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행정부의 역할 강화를 위해 신익희는 행정연구회를 조직하여 국가시험제도를 강력히 주장하기도 하였다. 신익희는 행정부의 역할과 행정 절차가 점점 복잡해질 것이기에 이를 대비하기 위한 교육과 시험제도를 강력히 주장한 것이다. 실제로 신익희는 국민대학교를 설립하면서 ‘국가건설의 참된 역군이 되게 할 것’을 건학목표로 삼기도 하였다. 이러한 신익희의 행정부 역할 강화 논리는 그의 실용적 면모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남광규, 위 논문, 100~103쪽 참고
5. 재해석과 결론
신익희의 행적과 삶에서 그의 현실주의자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분명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이념에 매몰되지 않고 가장 현실적인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러나 신익희의 행동은 단순히 현실주의자적 면모로 해석될 수는 없다. 우선 그의 현실주의는 기회주의가 아니었다. 즉, 그는 단순히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는 집단을 찾기 위해 여러 조직 활동에 참여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념과 집단의 통합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한 적극적인 태도의 인물이었다.
다음으로 특정 사상과 이념에 치우치지 않았을 뿐, 신익희가 추구하는 사상과 신념은 명확했다. 우선 해방 이전 신익희의 신념은 독립 국가의 건설이었다. 이는 와세다대학에서의 배움이나 신문화운동에서 근대 학문을 접했던 경험이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 신익희는 독립국의 개념을 명확히 알고 있었기에, 한반도에 근대적 의미의 독립국을 건설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 요소가 일제의 지배였고, 신익희는 일제강점기로부터의 해방을 가장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이를 위해 어떠한 이념을 활용해야 하는지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익희는 이념에 따라 독립운동 조직이 분열된 상황을 부정적으로 여기고 통합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그가 단순히 현실적인 측면만 가진 인물이었다면 자신의 이익을 찾아 제국주의의 편에 섰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그가 오로지 실용적인 인물이었다면 건국 이후 이승만의 독재에 저항하지 않고 체제 내에서 시스템 강화에만 신경을 몰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내면의 지식과 신념이 명확했기에 그의 활동은 일관된 목표를 향했다. 그는 좌우 이념에 매몰되지 않고 독립운동에 임했으며, 의회민주주의라는 목표를 위해 독재에 저항했다. 따라서 신익희는 단순히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관료를 넘어, 일관된 대의를 지닌 민족주의 정치가라고 평가할 수 있다.
6. 참고문헌 및 출처
이강수, 좌우의 벽을 뛰어넘은 독립운동가 신익희, 역사공간, 2014.
남광규, 『해방 이후 신익희의 정치활동과 정치노선』, 「평화연구」, 제18권 2호, 2010.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