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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1. 중국 기득권의 변천
1-2. 한나라 이전의 기득권과 개혁
1-3. 춘추전국시대 개혁 : 기득권 억제로 부국강병 도모
1-4. 진시황의 통일과 기득권의 저항
1-5. 한나라에서 오대10국(BC220~AD920)의 기득권
1-6. 송나라(960~1279)새로운 기득권 세력 등장
1-7. 명나라의 멸망원인
1-8. 청나라의 기득권 : 팔기군(팔기자제)
1-2. 한나라 이전의 기득권과 개혁
1-3. 춘추전국시대 개혁 : 기득권 억제로 부국강병 도모
1-4. 진시황의 통일과 기득권의 저항
1-5. 한나라에서 오대10국(BC220~AD920)의 기득권
1-6. 송나라(960~1279)새로운 기득권 세력 등장
1-7. 명나라의 멸망원인
1-8. 청나라의 기득권 : 팔기군(팔기자제)
본문내용
중국
한나라, 동진, 오호16국, 당나라, 오대10국 : BC220~AD920)
기득권자 : 외척, 환관, 무인(절도사), 세습적 문벌귀족
* 당나라 절도사에 의한 통치 : 세습적 귀족세력 몰락
기득권 몰살 : 후량(907~923)의 주전충이 살육
- 당을 멸하고 당을 지배한 무인, 환관 살육, 문벌귀족 황하강 수장
송나라-원나라-명나라 : 920~1644
신진사대부 등장 : 중소지주계층(양자강 이남지역 개발로 경제권력)
- 하급관리로 등장→유학적 지식습득으로 고위관료→기득권 형성
- 원나라 지배세력 : 일시적인 기득권
1-1. 중국 기득권의 변천
한나라 이전 : BC2000~BC220)
기득권자 : 왕족, 제후, 군자(군주의 자식)
춘추전국시대 개혁 : 기득권과의 전쟁 : 기득권 혁파시 나라 보전
진시황제가 세운 진나라 멸망원인 : 기득권자(항우)의 저항
청나라 : 1644~1912
만주족의 팔기군, 고위관료 계층
중화인민공화국 : 1949~→공산당 고위층
1-2. 한나라 이전의 기득권과 개혁
1) 기득권 : 천자, 군자(군주의 자식→제후, 경대부, 사)
2) 춘추전국시대 기득권 변화
1-3. 춘추전국시대 개혁 : 기득권 억제로 부국강병 도모
1) 개관
주나라 초기의 제후국들은 1800여 개에 달했다. 사기에 기록된 주요 제후국들만 해도 170여 개였다. 그러나 기원전 771년 웃지 않는 여인 포사에 의해 서주는 멸망하고 동주시대가 되면서 주나라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제후국들은 주나라를 받들지 않고 주나라를 대신하여 천하를 통치하고자 했는데, 이 시대를 춘추시대라고 한다.
춘추전국시대(기원전 770년~기원전 221년)의 제후국들은 천하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힘을 길러야 했다. 즉 부국강병정책을 펴야 했던 것이다. 부국강병의 요체는 첫째 특권세력의 특권을 박탈하는 것이다. 둘째는 그 당시 권력과 부를 독점했던 왕족과 귀족들에게 세금을 부과하여 그 재원으로 서민을 위한 복지정책을 추진하는 것이다. 셋째는 그 당시 면제되었던 귀족들의 군대 징집이었다.
제후국들은 이러한 개혁정책을 앞 다투어 실시하였지만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다.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보수 기득권층의 반발이었다. 이들의 반발을 무마한 제후국들만 성공할 수 있었다. 만약 개혁이 실패하면 예외 없이 그 나라는 개혁을 성공한 제후국들에게 멸망당했다. 주나라 초기의 1800여개의 제후국들이 전국시대에 들면 7개의 나라들로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그 원인은 말할 것도 없이 개혁에 실패한 나라들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제후국들의 부국강병 정책을 펴기 위해서는 그것을 뒷받침 하는 이론이 필요하였다. 그래서인지 춘추전국시대에 중국역사상 거의 대부분의 사상가들이 이때 나타난다. 공자, 맹자, 노자, 장자, 한비자, 묵자, 순자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등장하는 사상가들은 저마다 부국강병책을 들고 나왔다. 그래서 이 시대를 백가쟁명(百家爭鳴) 시대라고 한다. 또 이러한 사상가들은 자기의 부국강병책이 제후국들에게 적용될 수 있게 유세하였다. 또 맹상군이나 춘신군 등이 식객 3천명을 거느린 이유도 그들의 사상을 적용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결국 부국강병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재등용이었다. 그 당시의 특권층인 왕족과 귀족들은 인맥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개혁의 걸림돌이었다. 결국 제후국들은 외국의 인재를 등용할 수밖에 없었다. 제환공을 패자로 만든 관중, 위나라를 패자로 만든 오기, 개혁의 대명사인 진나라의 상앙, 이사 등은 모두 그 나라 사람들이 아니다. 공자가 14년 동안 천하를 주유한 것도 그 일환이었고 맹자가 양혜왕 앞에서 유세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분위기 때문이었다. 제나라에서는 직하학당이라는 학문연구기관이 있어서 이곳에서는 많은 학자들이 학문연구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진나라는 국가적 차원으로 인재확보에 큰 힘을 기우렸다. 서쪽 변방에 위치해 학문의 수준이 높지 않았던 것도 진나라 왕들이 외국 인재 우대정책을 편 이유의 하나였다. 위나라 사람 상앙이 혜공에게 와서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었고 장의는 연횡책으로 천하 패권의 흐름을 바꿔놓을 수 있었다. 또한 위나라 공손연은 진나라의 대사가 되어 제나라와 위나라를 설득하여 조나라를 공격하도록 흐름을 바꾸었다.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은 이사였다. 그는 본래 초나라 사람으로 말단 관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초나라에 와 있던 순자를 스승으로 모셨다. 공부를 마친 후 진나라로 가서 나중에 진시황이 되는 진왕 정 아래에서 벼슬자리를 얻었다. 이후 6국을 소멸하고 중국을 통일하는데 다양한 계책을 제시하는 인물이 되었다. 또한 그는 통일 이후 진나라의 국가체제를 만드는데 크게 기여했다. 진나라 특유의 군현제를 전 국토에 실현하는 일을 맡았고 전국의 잡다한 사상을 없애기 위한 분서갱유 등도 그가 시행한 방안들이었다. 한때 진시황이 외국인재를
한나라, 동진, 오호16국, 당나라, 오대10국 : BC220~AD920)
기득권자 : 외척, 환관, 무인(절도사), 세습적 문벌귀족
* 당나라 절도사에 의한 통치 : 세습적 귀족세력 몰락
기득권 몰살 : 후량(907~923)의 주전충이 살육
- 당을 멸하고 당을 지배한 무인, 환관 살육, 문벌귀족 황하강 수장
송나라-원나라-명나라 : 920~1644
신진사대부 등장 : 중소지주계층(양자강 이남지역 개발로 경제권력)
- 하급관리로 등장→유학적 지식습득으로 고위관료→기득권 형성
- 원나라 지배세력 : 일시적인 기득권
1-1. 중국 기득권의 변천
한나라 이전 : BC2000~BC220)
기득권자 : 왕족, 제후, 군자(군주의 자식)
춘추전국시대 개혁 : 기득권과의 전쟁 : 기득권 혁파시 나라 보전
진시황제가 세운 진나라 멸망원인 : 기득권자(항우)의 저항
청나라 : 1644~1912
만주족의 팔기군, 고위관료 계층
중화인민공화국 : 1949~→공산당 고위층
1-2. 한나라 이전의 기득권과 개혁
1) 기득권 : 천자, 군자(군주의 자식→제후, 경대부, 사)
2) 춘추전국시대 기득권 변화
1-3. 춘추전국시대 개혁 : 기득권 억제로 부국강병 도모
1) 개관
주나라 초기의 제후국들은 1800여 개에 달했다. 사기에 기록된 주요 제후국들만 해도 170여 개였다. 그러나 기원전 771년 웃지 않는 여인 포사에 의해 서주는 멸망하고 동주시대가 되면서 주나라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제후국들은 주나라를 받들지 않고 주나라를 대신하여 천하를 통치하고자 했는데, 이 시대를 춘추시대라고 한다.
춘추전국시대(기원전 770년~기원전 221년)의 제후국들은 천하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힘을 길러야 했다. 즉 부국강병정책을 펴야 했던 것이다. 부국강병의 요체는 첫째 특권세력의 특권을 박탈하는 것이다. 둘째는 그 당시 권력과 부를 독점했던 왕족과 귀족들에게 세금을 부과하여 그 재원으로 서민을 위한 복지정책을 추진하는 것이다. 셋째는 그 당시 면제되었던 귀족들의 군대 징집이었다.
제후국들은 이러한 개혁정책을 앞 다투어 실시하였지만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다.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보수 기득권층의 반발이었다. 이들의 반발을 무마한 제후국들만 성공할 수 있었다. 만약 개혁이 실패하면 예외 없이 그 나라는 개혁을 성공한 제후국들에게 멸망당했다. 주나라 초기의 1800여개의 제후국들이 전국시대에 들면 7개의 나라들로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그 원인은 말할 것도 없이 개혁에 실패한 나라들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제후국들의 부국강병 정책을 펴기 위해서는 그것을 뒷받침 하는 이론이 필요하였다. 그래서인지 춘추전국시대에 중국역사상 거의 대부분의 사상가들이 이때 나타난다. 공자, 맹자, 노자, 장자, 한비자, 묵자, 순자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등장하는 사상가들은 저마다 부국강병책을 들고 나왔다. 그래서 이 시대를 백가쟁명(百家爭鳴) 시대라고 한다. 또 이러한 사상가들은 자기의 부국강병책이 제후국들에게 적용될 수 있게 유세하였다. 또 맹상군이나 춘신군 등이 식객 3천명을 거느린 이유도 그들의 사상을 적용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결국 부국강병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재등용이었다. 그 당시의 특권층인 왕족과 귀족들은 인맥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개혁의 걸림돌이었다. 결국 제후국들은 외국의 인재를 등용할 수밖에 없었다. 제환공을 패자로 만든 관중, 위나라를 패자로 만든 오기, 개혁의 대명사인 진나라의 상앙, 이사 등은 모두 그 나라 사람들이 아니다. 공자가 14년 동안 천하를 주유한 것도 그 일환이었고 맹자가 양혜왕 앞에서 유세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분위기 때문이었다. 제나라에서는 직하학당이라는 학문연구기관이 있어서 이곳에서는 많은 학자들이 학문연구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진나라는 국가적 차원으로 인재확보에 큰 힘을 기우렸다. 서쪽 변방에 위치해 학문의 수준이 높지 않았던 것도 진나라 왕들이 외국 인재 우대정책을 편 이유의 하나였다. 위나라 사람 상앙이 혜공에게 와서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었고 장의는 연횡책으로 천하 패권의 흐름을 바꿔놓을 수 있었다. 또한 위나라 공손연은 진나라의 대사가 되어 제나라와 위나라를 설득하여 조나라를 공격하도록 흐름을 바꾸었다.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은 이사였다. 그는 본래 초나라 사람으로 말단 관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초나라에 와 있던 순자를 스승으로 모셨다. 공부를 마친 후 진나라로 가서 나중에 진시황이 되는 진왕 정 아래에서 벼슬자리를 얻었다. 이후 6국을 소멸하고 중국을 통일하는데 다양한 계책을 제시하는 인물이 되었다. 또한 그는 통일 이후 진나라의 국가체제를 만드는데 크게 기여했다. 진나라 특유의 군현제를 전 국토에 실현하는 일을 맡았고 전국의 잡다한 사상을 없애기 위한 분서갱유 등도 그가 시행한 방안들이었다. 한때 진시황이 외국인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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