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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오어사(吾魚寺)
2. 포은 정몽주 유허비
3. 일월지와 일월사당
4. 장기읍성
5. 고석사(古石寺)
6. 광남서원(廣南書院)
2. 포은 정몽주 유허비
3. 일월지와 일월사당
4. 장기읍성
5. 고석사(古石寺)
6. 광남서원(廣南書院)
본문내용
해안 지역의 어촌 가운데 포항과 방어진 다음으로 많은 일본인이 거주하는 곳이 되었다. 당시 200여 가구에 800여 명의 일본인들은 어업과 관련된 업종을 비롯하여 상업과 서비스업에 종사하면서 조선인과는 구분되는 주거공간을 형성하였다.
식민지의 행정과 제도상의 혜택을 받으며, 일본으로부터의 자본과 기술의 뒷받침으로 식민지에 발을 디딘 일본인 어민과 상인은 위계서열의 하위에 처한 식민지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포섭을 반복하면서 자신들만의 사회를 형성하였다. 어업이 성황을 이루었던 1930년 무렵에 성어기 동안 구룡포항에 운집한 600여 척의 어선에 승선한 만 여 명의 선원 가운데 95%에 해당하는 조선인 선원은 대부분 일본인 선주에 고용된 사람들이다. 낮에는 바다에서 어로작업을 하고, 밤에는 항만에 정박한 채 선상생활을 하는 고된 노동의 결과는 식민 본국의 경제성장에 밑거름이 되었다.
1928년 구룡포어업조합에 등록된 조합원의 선박은 모두 278척이었으며, 이 가운데 조선인 소유의 선박은 129척으로 절반에 약간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선인이 보유한 선박은 대부분 소규모의 목선이었으며, 목선과는 비교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값나가는 발동기선은 모두 일본인이 소유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일본인 사이에서도 불균형이 있다. 선박을 보유한 일본인의 2/3가량은 보유한 선박만 고려할 때 조선인 선주와 차이가 별로 없었다. 일본에서 온 이주민 가운데 출향지의 행정기관이나 조합의 주도 아래 정착한 사람들과 비교적 나중에 이주해 온 사람들의 경우 큰 성공을 거둔 예는 드물었다. 오히려 일정한 자금을 가지고 사업을 기획한 초창기 이주민들에서 성공한 예가 많다. 비교적 나중에 이주해 온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다수를 이루었다. 이들은 초창기 이주민들이 거주했던 구릉의 비탈진 사면에 거처하면서 조선인 노동자와 유사한 처지에서 생활하였다.
이처럼 일본인 사이에서의 계층 분화는 지역사회의 제반 이해관계에 대한 접근과 대응의 차이를 반영하였다. 일본인 사회의 계층간 관계는 출향인 조직과 중첩되어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앞서 언급한 ‘가가와현민회’와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 사이의 충돌과 대립은 식민지에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우위를 점하려는 일본인들의 집합적 의사 표현이다. 이런 견지에서 식민지 시기 동안 구룡포에서 전개된 일본인 주거지역의 확산과정은 다양한 이해관계에 기초한 식민세력들 사이의 충돌과 절충의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이해관계의 충돌과 절충의 과정에 조선인도 제한적으로 관여하였다. 구룡포 축항공사의 위치 설정에서 조선인 곽주들의 이해관계가 관철된 것이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이는 식민지의 일상이 권력의 지원을 받는 식민자의 의도에 대한 피식민자의 일방적 수용으로 구성되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상황에 따라서 식민자의 피식민자에 대한 선택적 포섭과 제한적 공존의 전략이 어촌에서도 적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출향지 행정기관이나 조합의 지원을 받은 일본인 이주 어민은 폐풍교정과 같은 감독과 감시도 받아야 했다. 이러한 감시와 감독을 통해서 공존을 지향하는 일본의 노력을 보여줌으로써 일본의 경제적 침탈에 대한 조선인의 반감을 낮추는데 작용하였다. 또한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인만 입학한 심상고등소학교에 조선인 학생의 선별적인 입학을 허용한 것도 좋은 예가 된다. 이처럼 구룡포의 일본인 사회는 식민지 사람들에 대한 포섭과 차별을 동시에 구사하면서 자신들의 사회적, 정치적 우위를 지속하였다.
8-4. 구룡포 일본인가옥거리
8-5. 구룡포 근대역사관
포항시 구룡포 근대역사관이 2012년 7월31일 개관했다. 포항시는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 복원을 위해 지난 2010년부터 2013년까지 사업비 85억 원을 투입, 가옥 입면보수, 도로 보수, 진입로 개설 및 역사관 조성을 하였으며, 이 사업 중 테마거리 내 역사관 조성사업이 완료돼 7월 31일 구룡포 근대역사관을 개관했다.
‘구룡포 근대역사관’은 1층은 홀로그램 큐브와 그래픽 패널을 활용하여 ‘구룡포의 전설’을 소개하고, 100년 전 일본인들의 구룡포 정착 상황과 생활모습을 생생히 보여준다. 또 2층에는 패전 후 일본어부들의 귀향모습과 구룡포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전시된다.
이 역사관으로 사용하는 건물은 1920년대에 살림집으로 지은 2층 일본식 목조집. 당시 일본에서 직접 건축자재를 운반하여 건립되었으며 창살, 문, 복도와 벽장 등이 당시 일본식 건물의 구조적ㆍ의장적 특징을 잘 갖추고 있어 국내 및 일본 건축 관계자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대상 건축물로 가치가 있다.
역사관 인근에는 구룡포 공원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있다. 계단 양측에 작은 돌기둥이 세워져 있는데 앞면에는 한국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일본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모두 시멘트로 덧칠을 해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공원 내 우측에 ‘도가와야스브로’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도가와야스브로는 구룡포항을 축조한
<‘도가와야스브로’ 공덕비>
장본인으로 비석을 만든 규화목은 일본에서 가져와 1944년쯤 세워졌다고 하며 비 앞쪽에 새겨진 비면은 시멘트로 덧칠이 된 상태다.
또한, 일본가옥들이 산재해 있는 근대문화역사거리는 20여 년 전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여명의 눈동자’ 촬영장소로 알려져 있으며, 이 사업을 통해 100여 년 전 일본인들이 생활한 가옥들의 모습이 복원되어 당시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이 거리는 당시 음식점, 제과점, 어구류 판매점, 술집 등이 들어선 구룡포 지역 최대의 상업지구 역할을 한 곳. 거리를 걸으면서 100여 년 전 그 건물이 어떤 용도로 사용됐는지 살피면서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탈바꿈했는지를 같이 본다면 과거를 걷는 즐거움을 함께 느낄 수 있다.
포항시는 이번 사업을 통해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가 단순히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거주했던 건물을 복원하는 것이 아닌 구룡포의 과거 모습을 통해 현재 모습을 살피고 호미곶과 연계해 동해안 일대의 관광클러스터를 조성, 찾아오는 동해안 관광시대를 열고 국내외 새로운 관광명소로 탈바꿈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하고 있다.
<가가와현에서 구룡포로 이주한 일본 어부들>
식민지의 행정과 제도상의 혜택을 받으며, 일본으로부터의 자본과 기술의 뒷받침으로 식민지에 발을 디딘 일본인 어민과 상인은 위계서열의 하위에 처한 식민지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포섭을 반복하면서 자신들만의 사회를 형성하였다. 어업이 성황을 이루었던 1930년 무렵에 성어기 동안 구룡포항에 운집한 600여 척의 어선에 승선한 만 여 명의 선원 가운데 95%에 해당하는 조선인 선원은 대부분 일본인 선주에 고용된 사람들이다. 낮에는 바다에서 어로작업을 하고, 밤에는 항만에 정박한 채 선상생활을 하는 고된 노동의 결과는 식민 본국의 경제성장에 밑거름이 되었다.
1928년 구룡포어업조합에 등록된 조합원의 선박은 모두 278척이었으며, 이 가운데 조선인 소유의 선박은 129척으로 절반에 약간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선인이 보유한 선박은 대부분 소규모의 목선이었으며, 목선과는 비교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값나가는 발동기선은 모두 일본인이 소유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일본인 사이에서도 불균형이 있다. 선박을 보유한 일본인의 2/3가량은 보유한 선박만 고려할 때 조선인 선주와 차이가 별로 없었다. 일본에서 온 이주민 가운데 출향지의 행정기관이나 조합의 주도 아래 정착한 사람들과 비교적 나중에 이주해 온 사람들의 경우 큰 성공을 거둔 예는 드물었다. 오히려 일정한 자금을 가지고 사업을 기획한 초창기 이주민들에서 성공한 예가 많다. 비교적 나중에 이주해 온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다수를 이루었다. 이들은 초창기 이주민들이 거주했던 구릉의 비탈진 사면에 거처하면서 조선인 노동자와 유사한 처지에서 생활하였다.
이처럼 일본인 사이에서의 계층 분화는 지역사회의 제반 이해관계에 대한 접근과 대응의 차이를 반영하였다. 일본인 사회의 계층간 관계는 출향인 조직과 중첩되어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앞서 언급한 ‘가가와현민회’와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 사이의 충돌과 대립은 식민지에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우위를 점하려는 일본인들의 집합적 의사 표현이다. 이런 견지에서 식민지 시기 동안 구룡포에서 전개된 일본인 주거지역의 확산과정은 다양한 이해관계에 기초한 식민세력들 사이의 충돌과 절충의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이해관계의 충돌과 절충의 과정에 조선인도 제한적으로 관여하였다. 구룡포 축항공사의 위치 설정에서 조선인 곽주들의 이해관계가 관철된 것이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이는 식민지의 일상이 권력의 지원을 받는 식민자의 의도에 대한 피식민자의 일방적 수용으로 구성되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상황에 따라서 식민자의 피식민자에 대한 선택적 포섭과 제한적 공존의 전략이 어촌에서도 적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출향지 행정기관이나 조합의 지원을 받은 일본인 이주 어민은 폐풍교정과 같은 감독과 감시도 받아야 했다. 이러한 감시와 감독을 통해서 공존을 지향하는 일본의 노력을 보여줌으로써 일본의 경제적 침탈에 대한 조선인의 반감을 낮추는데 작용하였다. 또한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인만 입학한 심상고등소학교에 조선인 학생의 선별적인 입학을 허용한 것도 좋은 예가 된다. 이처럼 구룡포의 일본인 사회는 식민지 사람들에 대한 포섭과 차별을 동시에 구사하면서 자신들의 사회적, 정치적 우위를 지속하였다.
8-4. 구룡포 일본인가옥거리
8-5. 구룡포 근대역사관
포항시 구룡포 근대역사관이 2012년 7월31일 개관했다. 포항시는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 복원을 위해 지난 2010년부터 2013년까지 사업비 85억 원을 투입, 가옥 입면보수, 도로 보수, 진입로 개설 및 역사관 조성을 하였으며, 이 사업 중 테마거리 내 역사관 조성사업이 완료돼 7월 31일 구룡포 근대역사관을 개관했다.
‘구룡포 근대역사관’은 1층은 홀로그램 큐브와 그래픽 패널을 활용하여 ‘구룡포의 전설’을 소개하고, 100년 전 일본인들의 구룡포 정착 상황과 생활모습을 생생히 보여준다. 또 2층에는 패전 후 일본어부들의 귀향모습과 구룡포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전시된다.
이 역사관으로 사용하는 건물은 1920년대에 살림집으로 지은 2층 일본식 목조집. 당시 일본에서 직접 건축자재를 운반하여 건립되었으며 창살, 문, 복도와 벽장 등이 당시 일본식 건물의 구조적ㆍ의장적 특징을 잘 갖추고 있어 국내 및 일본 건축 관계자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대상 건축물로 가치가 있다.
역사관 인근에는 구룡포 공원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있다. 계단 양측에 작은 돌기둥이 세워져 있는데 앞면에는 한국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일본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모두 시멘트로 덧칠을 해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공원 내 우측에 ‘도가와야스브로’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도가와야스브로는 구룡포항을 축조한
<‘도가와야스브로’ 공덕비>
장본인으로 비석을 만든 규화목은 일본에서 가져와 1944년쯤 세워졌다고 하며 비 앞쪽에 새겨진 비면은 시멘트로 덧칠이 된 상태다.
또한, 일본가옥들이 산재해 있는 근대문화역사거리는 20여 년 전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여명의 눈동자’ 촬영장소로 알려져 있으며, 이 사업을 통해 100여 년 전 일본인들이 생활한 가옥들의 모습이 복원되어 당시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이 거리는 당시 음식점, 제과점, 어구류 판매점, 술집 등이 들어선 구룡포 지역 최대의 상업지구 역할을 한 곳. 거리를 걸으면서 100여 년 전 그 건물이 어떤 용도로 사용됐는지 살피면서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탈바꿈했는지를 같이 본다면 과거를 걷는 즐거움을 함께 느낄 수 있다.
포항시는 이번 사업을 통해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가 단순히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거주했던 건물을 복원하는 것이 아닌 구룡포의 과거 모습을 통해 현재 모습을 살피고 호미곶과 연계해 동해안 일대의 관광클러스터를 조성, 찾아오는 동해안 관광시대를 열고 국내외 새로운 관광명소로 탈바꿈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하고 있다.
<가가와현에서 구룡포로 이주한 일본 어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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