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양답사 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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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낙양답사 교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제1편 중국문화사 개관


Ⅰ. 중국의 역사
Ⅱ. 중국불교사
Ⅲ. 도교(道敎)

제2편 역사유적과 경승지

Ⅰ. 답사개관
Ⅱ. 운대산(雲臺山 Yun-t'ai) 지구
Ⅲ. 낙양(洛陽)지역
Ⅳ. 숭산((嵩山)과 소림사(少林寺, 샤오린샤)
Ⅴ. 정주·개봉지역
Ⅵ. 중국 건축사

본문내용

6년(1061), 인종은 포증을 매우 신임하고 중시하여 그를 추밀부사(樞密副使)로 승진시켰다. 그는 고관이 된 후에도 사생활은 일반 평민과 같이 소박하고 검소하였다. 그 이듬해 5월 그는 중병을 얻어 죽으면서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후대에 자손들이 벼슬을 하여 부정부패를 저지르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그들이 죽은 이후에도 우리 포씨(包氏) 집안의 선산에 묘를 쓰지 못하도록 하라.\"
포증은 살아서는 청백리로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죽은 이후에도 사람들은 그를 청백리의 전형적인 인물로 삼고 그를 추앙하여 \'포공(包公)\"이라 하였다. 민간에는 포공이 공평무사하게 일을 처리하고 부패한 권세가들을 과감하게 처단하는 이야기들과 포공의 재판을 다룬 희곡 · 소설 등이 많이 전해오고 있다. 비록 그것들 중에는 허구적인 이야기도 많지만 거기에는 청백리에 대한 사람들의 존경이 반영되어 있다. 탐관오리와 악덕 토호세력을 척결한 것은 증의 일생 중 가장 돋보이고 가장 칭송을 받는 부분이다.
역사적으로는 유명한 포공희(包公戱)가 많다. 희곡 속에서는 청백리 포증의 형상 뿐만 아니라 장룡(張龍) · 조호(趙虎) · 왕조(王朝) · 마한(馬漢) · 공손선생(公孫先生) · 남협전소(南俠展昭)의 형상도 소조하였다. 이들은 일치단결하여 뛰어난 기량으로 포증을 도우면서 부정을 저지른 황제의 친척이나 외척은 물론 모든 탐관오리들을 처벌하였다. 이때 포공은 항상 손에 상방보검(尙方寶劍)을 들고 있었는데 그것은 황제의 성지와도 맞설 수 있는 것이었다. 용작두, 호작두, 개작두, 음양경(陰陽境) 앞에서는 염라대왕도 물러나야 하고 어떠한 요괴들도 살아남지 못했다.
이러한 전설적인 이야기는 민중들이 창조해 낸 것으로 사실과는 다른 부분이 많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모두 근거 없이 날조된 것만은 아니다. 이러한 예술적 창조는 모두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포증은 30여년의 재임 시절에 관직을 박탈하거나 강등시키는 등 의법 처리한 고관대작이 무려 30여명 이상이나 되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보기 드문 경이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한 개인과 하나의 사건을 위해서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조사하여 공정한 판결을 내렸다. 포증에 의해 탄핵된 사람들은 모두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으며, 그들 중에는 포증보다 관직이 높은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강서전운사(江西轉運使) 왕규(王逵)와 송상(宋庠) · 장요좌(張堯佐)등의 탄핵은 모두 전국을 뒤흔든 대사건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장귀비(張貴妃)의 백부 장요좌를 탄핵한 것은 가장 전형적이면서도 대표적인 사건이다.
현재까지도 중국인들은 포공의 사당을 찾아가 그를 신으로 숭배하고 있다. 그의 공평무사한 판결과 청렴결백한 생활, 예리한 통찰력은 많은 대중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이로써 그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신적인 인물로 승화되었던 것이다. 그는 민간종교에서 숭배하는 신이지만 그것은 보통 사람들이 믿는 종교적인 \"하느님\"과는 다르다. 즉 그는 하늘에서 강림한 신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으로서 초인적인 신으로 변화된 \"인신(人神)\"인 것이다. 포공에 대한 숭배는 마카오에서 가장 성행한다. 지금도 마카오에서는 매일 포공의 사당을 찾아가서 복을 기원하는 사람들의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숭배는 포공이 선한 사람을 보호해주고 악한 사람을 징벌해 주며, 재앙을 없애주고 복을 내려줄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포공에 대한 숭배는 사회 정의와 바른 정치의 실현 숭배라고 할 수 있다.
3-2. 포공사(包公祠)
포공사는 중국 안후이성[安徽省] 허페이시[合肥市] 남쪽의 바오허공원[包河公園] 샹화둔[香花墩]에 있는 포증(包拯)의 사당이다. 포증은 송나라 인종(仁宗)이 넓은 소호(巢湖)를 하사하는 것을 사양하고 고향인 허페이 호성하(護城河;성을 보호하는 해자 역할의 하천)의 작은 구역을 받았다. 그의 후손들이 호성하 하류에서 연뿌리를 재배하고 고기잡이로 생계를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호성하를 바오허강[包河]이라고 부르고, 호성하 안에 있는 작은 섬은 바오섬[包島]이라고 불렀다. 샹화둔은 바오섬의 다른 명칭이다. 이곳에 있던 사당이 명나라 홍치제(弘治帝) 때 포공서원(包公書院)을 거쳐 가정제(嘉靖帝) 때 포공사로 명칭이 바뀌었다. 포공사는 밀폐식 삼합(三合) 정원으로, 조벽(照壁) · 대문(大門) · 이문(二門) · 정전(正殿) · 회난간(回欄杆) · 청심정(淸心亭) · 유방정(留芳亭) · 염천정(廉泉亭) · 직도방(直道坊) · 동간(東)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의 분포가 치밀하고 주위의 울창한 대나무와 아름다운
꽃들과 서로 어울려 강남 원림(園林)의 특징을 나타낸다. 대문 양쪽에는 \'충현장상(忠賢將相)\' \'도덕전가(道德傳家)\'라고 쓴 대련(對聯)이 눈길을 끈다. 주 건물인 정전은 정면 폭이 5칸이며, 안에는 포증의 좌상(坐像)이 있고 벽에 석각 초상화 1폭이 있다. 정전의 왼쪽 당(堂)에는 죄인을 처벌하던
1.67~2m 길이의 작두가 3개 보존되어 있다. 3개의 작두 가운데 용두찰(龍頭)은 왕공귀족을, 호두찰(虎頭)은 문무대신을, 구두찰(狗頭)은 서민을 참수하는 데 사용되었다고 전한다.염천정 안에는 염천(廉泉)이라 부르는 우물이 있는데, 옛 사람들은 그 물이 포증의 영기를 받아 권선징악의 효능이 있다고 믿었다. 이밖에 포공사에는 포공묘(包公廟)에서 출토된 문물과 포증의 아내 동씨(董氏), 맏며느리 최씨(崔氏), 둘째아들 포수(包綬), 둘째 며느리 문씨(文氏), 장손 포영년(包永年) 등의 묘지명(墓誌銘)이 진열되어 있다.
4. 송도어가(宋都御街)
송(宋)대 건축을 복원해 놓아 전통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송도어가는 궁성에서 외성으로 펼쳐지는 4개의 어가(御街)가 있다. 이들 어가는 술집, 말시장, 소시장, 쌀시장, 보석시장 등등의 상점이 들어서 있었고 번화했던 송나라 수도였던 개봉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옛 북송시대 그대로 복원할 정도로 공을 들인 거리로, 골동품 가게와 서화, 공예미술품 가게 그리고 은행까지 들어서 있는 아름다운 거리이다.
동경몽화록을 보면 북송이 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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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24.02.29
  • 저작시기202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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