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한강유역 누정에 대해 상세히 조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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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시대 한강유역 누정에 대해 상세히 조사하였습니다.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들어가며
2. 누정이란?
3. 누정의 역사
4. 누정의 분류와 구조
5. 누정의 기능
6. 한강유역의 조선시대 누정
7. 나가며

본문내용

)의 별장터였는데 정조임금의 원행을 위해 행궁으로 여기에 용양봉저정을 꾸몄다. 임금께서 강을 건너면 한낮에 여기에서 잠시 쉬어가곤 하였으므로 일명 주정소(晝停所)라고 하였다. 이 정자는 수원 화산에 자리잡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륭원에 가는 도중에 심신을 가다듬기 위한 곳이지 풍류를 위한 곳이 아니라고 하였다. 김선화, 2014, 위의 논문, p.74~75
(2) 효사정
효사정은 조선 초기 세종 때 한성부윤과 우의정을 지낸 노한이 지은 정자다. 노한은 시묘살이를 한 후 어머니를 잊지 못하여 눌러 앉아 살았고 그곳에 정자를 세워 한강변 풍광을 보면서 어머니를 그리워했다고 하였다. 김선화, 2014, 위의 논문, p.77
“노량 나루터 남쪽 언덕에 있는데, 우의정 노한의 별장이다. 강희맹(姜希孟)이 지은 기문에, “삼성산(三聖山)은 곧 금천 진산이다. 거기에서 한 가닥이 꿈틀거리면서 북으로 뻗다가 한수와 만나는 곳에 한 지역을 이루었는데, 곧 의정(議政) 노(盧) 공숙공(恭肅公)의 선영(先塋)이 있다. 공숙이 모년(某年)에 그곳에다가 그의 모친을 장사하고 시려(侍廬)하였는데, 효성이 극진하였다. 복을 마치고는 서러워하던 그대로 그곳에서 살았다. 그 집 북쪽에 깎아지른 듯한 둔덕이 강에 임했다. 드디어 그 위에다가 정자 하나를 짓고, 때로 올라가 구경하며 오래도록 사모하는 정을 품고 자손에게 유언하여 자신도 그 곳에 묻혔다. …중략… 『新增東國輿地勝覽』, 第10, 京畿 在露梁渡南岸,右議政盧別墅. 姜希孟記“三聖山卽衿之鎭也. 其一支北,遇漢水而作區,卽議政盧恭肅公之世塋也. 恭肅於某甲,葬母於其地,居廬盡孝. 服,因廬爲家,家北有斷臨江,遂構亭其上. 時登眺以永慕之懷,戒子孫因卜葬焉. 恭肅之胤敦寧公與先君戴公爲友壻. 嘗同遊亭上,敦寧公請名若記.戴名以孝思而未有記.
” 하였다.
3) 서호 일대
조선시대 경강 서호(西湖)는 서강(西江)이라고 불렀는데 새우젓 배로 유명한 마포에서부터 양화나루 구간이었다. 서호는 황해전라충청경기의 세곡을 운반하는 조운선들로 붐볐고 곡식을 저장하는 큰 창고들이 있었다. 또한, 도성 시전을 왕래하는 경강상인들과 관련된 주막이나 여관을 비롯하여 촌락 또한 번성하였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김선화, 2014, 위의 논문, p.86
서호에 존재했던 누정은 망원정, 영복정, 담담정이 있다.
세종실록 7년(1425) 5월 13일조 『朝鮮王朝實錄』,世宗實錄 券28, 世宗 7年 5月是 13日 壬午. 是日, 上由洪濟、良哲兩院, 至迎曙驛 加乙頭之郊, 按馬徐行, 觀兩麥茂盛, 上欣然有喜色。 登亭上方設宴, 適時雨然, 須臾四野饒洽, 上喜甚, 乃命其亭曰喜雨.
에 보면, “임금 세종이 서교(西郊)에 거둥하였을 때에 밀보리가 무성한 것을 보고 흔연히 기쁜 빛을 띠고 정자위에 올라 막 잔치를 벌이는데, 마침 큰 비가 좍좍 내려서 잠깐 사이에 사방들에 물이 흡족하니, 임금이 매우 기뻐서 그 정자의 이름을 ‘희우정(喜雨亭)’이라고 지었다.” 고 기록되어 있었다.
이 정자는 처음에 효령 대군(孝寧大君)의 소유였으나 뒤에 월산 대군(月山大君)의 소유가 되어 이름이 ‘망원정(望遠亭)’으로 바뀌었다. 김선화, 2014, 위의 논문, p.96
4) 양천 일대
양천은 한양도성의 성저십리를 넘어서는 거리였고 한성부와는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서해에서 유입되는 물산과 군사적인 입지로 주요한 지역이었다. 김선화, 2014, 위의 논문, p.102
양천에 존재했던 누정은 소악루, 이수정이 있다.
이수정은 조선 중기의 정자다. 이곳에 치성단(致誠壇)이 생기면서 도당산이라고 불린다. 그 아래로 안양천이 흐르고 있다. 이수정이 있던 곳은 조선시대 경기 양천현이었다. 1899년 양천군수 박준우(朴準禹)가 편찬한 양천군읍지 누정조에 ‘염창탄 서쪽 깎아지른 절벽 위에 예전에 효령대군의 임정(林亭)이 있었다. 그 후에 한산군(韓山君) 이덕연(李德演)과 그의 아우 찬성(贊成) 이덕형(李德洞)이 늙어서 물러 나와 정자를 고쳐 짓고 이수정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산해(李山海, 1539-1609)는 이덕연이 지은 정자를 보고 기문을 써 주었다고 전하며 그의 문집 <아계유고(鵝溪遺稿> 제 6권에는 <이수정기(二水亭記))>가 실려 있다. 김선화, 2014, 위의 논문, p.108
7. 나가며
지금까지 과거 양반들의 친목장소이자 휴식장소였으며, 공부장소였던 누정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누정은 삼국시대에는 고위층이 모이는 장소였으며,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로 내려오면 다수의 양반들이 전국 각지에 누정을 지어 휴식을 취하거나 모임을 갖고 별장처럼 지내기도 한 곳이었다.
한강 유역 누정에서는 사신접대와 같은 국가 중대사도 이루어졌지만 이는 소수에 불과했고 대부분 권세와 재력이 있는 전·현직관리나 왕족들의 휴식(경치감상)이나 놀이터, 모임장소로 주로 사용되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여러 가지 기능들이 존재하지만, 아직도 조선시대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워낙 많아 누정이라는 것이 단순히 술먹고 노는 곳으로 인식되기 쉬운 것이 현실이다.
누정은 분명 경치를 감상하고 이를 통해 시로 표현하며, 음주가무를 즐긴 곳으로 많이 이용되기는 했다. 이를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선비들이 누정에서 자신들의 재주를 겨루며, 유교문화 발전에 이바지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 결과물로 관련된 수많은 그림과 한시가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사료
『三國遺事』
『三國史記』
『新增東國輿地勝覽』
『朝鮮王朝實錄』
저서
鄭勝謨, 2003,『누정(樓亭)의 역사와 경기 누정문화』.
논문
곽성기(2012), 「선비사상과 누정문화의 교육적 의미」,『교육종합연구』제10권 제2호.
김선화(2014),「조선시대 서울 한강 누정의 장소성에 관한 연구」,『상명대학교 일반대학원 환경자원학과 박사학위논문』.
이상민(2019),「충청북도 누정의 건축적 특성에 관한 연구」,『세명대학교 대학원 건설공학과 석사학위논문』.
이순임(2015),「조선시대 차문화와 누정문화의 친연성 고찰」,『차문화ㆍ산업학』제27호.
정원석(2022), 「조선 중기 누정의 건립 양상 및 유형에 관한 연구 : 16~17세기 누정 문화를 중심으로」,『한양대학교 대학원 건축학과 석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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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24.03.01
  • 저작시기20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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