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안학궁이 당나라 궁궐제도를 모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3점)
2. 고려시대 별궁을 모두 나열하시오? (3점)
3. 조선시대 왕의 침전은 기본적으로 어떤 형태를 하고 있는가? (3점)
4. 교태전의 가장 대표적인 건축적 특징은 무엇인가? (3점)
5. 경복궁의 4대 궁성문 이름을 기술하시오. (3점)
6. 공주, 옹주, 군주, 현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3점)
7. 경운궁의 정문 이름은 무엇인가? (3점)
8. 대한제국의 탄생을 상징하는 경운궁의 공간 두 곳은 어디인가? (3점)
9. 서양 건축양식에 전통 목조 건축양식을 가미하여 경운궁에 건설된 근대건축물로 고종이 외국인들과 외국문화를 경험했던 공간은 어디인가? (3점)
10. 고종의 집무실 또는 외국사절 알현실로 사용되었으며 을사조약이 체결되기도 했던 장소는 어디인가? (3점)
Ⅲ. 결론
참고문헌
Ⅱ. 본론
1. 안학궁이 당나라 궁궐제도를 모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3점)
2. 고려시대 별궁을 모두 나열하시오? (3점)
3. 조선시대 왕의 침전은 기본적으로 어떤 형태를 하고 있는가? (3점)
4. 교태전의 가장 대표적인 건축적 특징은 무엇인가? (3점)
5. 경복궁의 4대 궁성문 이름을 기술하시오. (3점)
6. 공주, 옹주, 군주, 현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3점)
7. 경운궁의 정문 이름은 무엇인가? (3점)
8. 대한제국의 탄생을 상징하는 경운궁의 공간 두 곳은 어디인가? (3점)
9. 서양 건축양식에 전통 목조 건축양식을 가미하여 경운궁에 건설된 근대건축물로 고종이 외국인들과 외국문화를 경험했던 공간은 어디인가? (3점)
10. 고종의 집무실 또는 외국사절 알현실로 사용되었으며 을사조약이 체결되기도 했던 장소는 어디인가? (3점)
Ⅲ.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가설하여 교통망을 확충하고 치도사업, 공원 조성 등을 통한 도시 경관 정비 등 일련의 개혁을 실시했다. 그리하여 서울은 근대도시로서의 면모를 빠르게 갖추어 나갔다. 고종은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경복궁대신 각국의 공사관이 밀집한정동의 경운궁(덕수궁)을 택했고 청과의 사대질서를 청산하고 새로운 만국공법적 질서를 받아들이고자 했다. 자주독립의 염원으로 스위스와 같은 영세중립국을시도하기도 했는데헤이그밀사파견은제국주의에대한적극적인저항의표현이었다.경운궁이 황궁으로 정해짐에 따라 궁역을 확장하면서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섰다. 덕수궁 내의 가장 큰 변화는 단연 전통적인 전각들 사이에 이채로운 서양식 건물들이 생겨난 점이었다. 구성헌, 정관헌을 비롯하여 돈덕전과 같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중 1900년에 착공된 석조전은 단연 그 규모와 형식에 있어 돋보인다. 이러한 개혁은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원칙으로 전통을 통해 근대로 나아가고자 하는 대한제국의 문명개화 정책의 일환이었다.7
9. 서양 건축양식에 전통 목조 건축양식을 가미하여 경운궁에 건설된 근대건축물로 고종이 외국인들과 외국문화를 경험했던 공간은 어디인가? (3점)
- 양이재
경운궁 양이재는 1904년 화재로 인해 1906년까지 중건한 경운궁의 중요한 전각의 하나이다. 「경운궁중건배치도」에서 양이재는 함희당과 ‘ㄱ’자 평면의 건물과 함께 수학원(修學院)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장역기철(匠役記綴)』에는 함희당과 양이재가 홍원(紅園)의 외당과 내당으로 표기되었고, 그 규모로 외당이 24칸이고 내당이 27칸으로 나와 있다. 『경운궁중건도감의궤』에는 함희당이 21칸이고, 양이재가 24칸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두 기록 간의 차이는 툇간이나 1/4칸을 어떻게 계산하는가에서 비롯하는 것 같다. 함희당과 양이재는 3칸의 복도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1920년 5월의 『매일신보』에서 이곳은 세자께서 수학하시던 곳이라고 적고 있어서, 영친왕 이은이 이 건물에서 수학했었다고 추정한다.
10. 고종의 집무실 또는 외국사절 알현실로 사용되었으며 을사조약이 체결되기도 했던 장소는 어디인가? (3점)
- 중명전
1906년 11월 14일부터 1907년 9월 13일까지 수옥헌과 중명전이라는 명칭은 신문, 실록 등 각종 자료에서 혼용되어 나타나고 있다.697) 이때 두 명칭 모두 외국 공사 접견, 대신 소견 등 같은 용도로 사용되고 있음을《일성록》과《승정원일기》,《대한매일신보》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로써 건립 이후부터 1906년 중반기까지 수옥헌이라는 명칭을 썼으며 중명전은 1906년 11월 언저리부터 수옥헌과 혼용되어 불리다가 1907년 9월 이후 중명전을 단일 건물의 명칭으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1906년 11월에 중명전이라는 새로운 명칭이 등장했을까? 이는 경운궁 대화재 이후 을사조약이라는 국가 최대 위기에 봉착한 고종이 국난을 극복하고자 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경운궁 대화재 이후 고종의 정무공간으로 이용되었던 수옥헌에서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체결되는 비극이 일어났다. 고종이 참석을 거부한 수옥헌 어전회의에서 ‘을사늑약’이 강제된 것이다. ‘을사늑약’ 체결 직후, 대한제국의 주권자인 고종은 이에 대해 끝까지 비준하지 않았으나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은 가속화되었다. 고종은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전각 명칭의 변화를 통해 보여주었다.
Ⅲ. 결론
지금까지 본론에서는 1. 안학궁, 2. 고려시대 별궁, 3. 조선시대 왕의 침전, 4. 교태전의 가장 대표적인 건축적 특징, 5. 경복궁의 4대 궁성문, 6. 공주, 옹주, 군주, 현주의 차이점, 7. 경운궁의 정문 이름, 8. 대한제국의 탄생을 상징하는 경운궁의 공간, 9. 서양 건축양식에 전통 목조 건축양식을 가미하여 경운궁에 건설된 근대건축물, 10. 고종의 집무실 또는 외국사절 알현실로 사용되었으며 을사조약이 체결되기도 했던 장소를 작성해 보았다. 조선시대 궁궐은 유교적 국가의례가 시행되는 중심공간이었다. 궁궐 안팎의 의례공간은 시기에 따라 변화했다. 숙종대 이후 궁궐 의례공간에 주목할 만한 변화 세 가지가 나타났다. 첫째, 궁궐 내 명 황제를 제향하기 위한 길례 공간인 대보단이 설치되었다. 성리학적 의식이 강화되면서 대명의리의 상징공간으로 설치된 대보단은 역설적이게도 기존의 천자국-제후국이라는 유교질서에 균열을 가하는 공간이었다. 조선의 국왕이 천자인 명나라 황제에게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선왕의 어진에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선원전이 건립되었다. 숙종대 이전의 선원전은 선왕의 어진을 봉안하는 공간이었을 뿐 제향공간은 아니었다. 숙종이 자신의 어진에 제향할 것을 유언으로 남기면서 선원전은 궁궐 내 새로운 제향공간이 되었다. 신주에 영혼이 깃든다는 정통 유교식 관념에 따르면 영정의 제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영정은 신주보다 훨씬 더 감각적이고 원초적인 기억장치였다. 이를 통해 국왕은 자신의 위상을 높일 수 있었다. 셋째, 현왕의 어진을 봉안한 전각이 등장했다. 숙종대 강화부에 장녕전이 건립된 후 영조는 숙종 뒤를 이어 강화부 만녕전과 경희궁 태녕전에 자신의 어진을 봉안하게 하였다. 정조는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을 세우고, 선왕의 유품과 함께 자신의 어진을 봉안했다. 이후 규장각은 정조의 친위기구로 성장했다. 현왕 어진 봉안 공간은 성리학적 의례에 부합하는 공간이 아니었으며, 현왕의 위상을 높이고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참고문헌
한국문화자원의이해1(2017),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문화원.
윤나영, 2011, 「고려와 조선의 마루장식기와」, 홍익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양정석, 2005, 「안학궁 남궁 정전곽의 구조를 통해 본 고구려 도성제」, 『고구려의 국제관계』, 고구려연구재단.
이호경, 2011, 「고려 시대 와당 제작기법의 일고찰」, 『제2회 한국기와학회 연구발표회 발표자료집』.
국은비, 조선 순조대 경희궁 침전영역 복원연구, 명지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3.
김정동, 2004《고종황제가 사랑한 정동과 덕수궁》, 발언.
이욱, 2015《조선 왕실의 제향 공간》,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9. 서양 건축양식에 전통 목조 건축양식을 가미하여 경운궁에 건설된 근대건축물로 고종이 외국인들과 외국문화를 경험했던 공간은 어디인가? (3점)
- 양이재
경운궁 양이재는 1904년 화재로 인해 1906년까지 중건한 경운궁의 중요한 전각의 하나이다. 「경운궁중건배치도」에서 양이재는 함희당과 ‘ㄱ’자 평면의 건물과 함께 수학원(修學院)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장역기철(匠役記綴)』에는 함희당과 양이재가 홍원(紅園)의 외당과 내당으로 표기되었고, 그 규모로 외당이 24칸이고 내당이 27칸으로 나와 있다. 『경운궁중건도감의궤』에는 함희당이 21칸이고, 양이재가 24칸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두 기록 간의 차이는 툇간이나 1/4칸을 어떻게 계산하는가에서 비롯하는 것 같다. 함희당과 양이재는 3칸의 복도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1920년 5월의 『매일신보』에서 이곳은 세자께서 수학하시던 곳이라고 적고 있어서, 영친왕 이은이 이 건물에서 수학했었다고 추정한다.
10. 고종의 집무실 또는 외국사절 알현실로 사용되었으며 을사조약이 체결되기도 했던 장소는 어디인가? (3점)
- 중명전
1906년 11월 14일부터 1907년 9월 13일까지 수옥헌과 중명전이라는 명칭은 신문, 실록 등 각종 자료에서 혼용되어 나타나고 있다.697) 이때 두 명칭 모두 외국 공사 접견, 대신 소견 등 같은 용도로 사용되고 있음을《일성록》과《승정원일기》,《대한매일신보》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로써 건립 이후부터 1906년 중반기까지 수옥헌이라는 명칭을 썼으며 중명전은 1906년 11월 언저리부터 수옥헌과 혼용되어 불리다가 1907년 9월 이후 중명전을 단일 건물의 명칭으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1906년 11월에 중명전이라는 새로운 명칭이 등장했을까? 이는 경운궁 대화재 이후 을사조약이라는 국가 최대 위기에 봉착한 고종이 국난을 극복하고자 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경운궁 대화재 이후 고종의 정무공간으로 이용되었던 수옥헌에서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체결되는 비극이 일어났다. 고종이 참석을 거부한 수옥헌 어전회의에서 ‘을사늑약’이 강제된 것이다. ‘을사늑약’ 체결 직후, 대한제국의 주권자인 고종은 이에 대해 끝까지 비준하지 않았으나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은 가속화되었다. 고종은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전각 명칭의 변화를 통해 보여주었다.
Ⅲ. 결론
지금까지 본론에서는 1. 안학궁, 2. 고려시대 별궁, 3. 조선시대 왕의 침전, 4. 교태전의 가장 대표적인 건축적 특징, 5. 경복궁의 4대 궁성문, 6. 공주, 옹주, 군주, 현주의 차이점, 7. 경운궁의 정문 이름, 8. 대한제국의 탄생을 상징하는 경운궁의 공간, 9. 서양 건축양식에 전통 목조 건축양식을 가미하여 경운궁에 건설된 근대건축물, 10. 고종의 집무실 또는 외국사절 알현실로 사용되었으며 을사조약이 체결되기도 했던 장소를 작성해 보았다. 조선시대 궁궐은 유교적 국가의례가 시행되는 중심공간이었다. 궁궐 안팎의 의례공간은 시기에 따라 변화했다. 숙종대 이후 궁궐 의례공간에 주목할 만한 변화 세 가지가 나타났다. 첫째, 궁궐 내 명 황제를 제향하기 위한 길례 공간인 대보단이 설치되었다. 성리학적 의식이 강화되면서 대명의리의 상징공간으로 설치된 대보단은 역설적이게도 기존의 천자국-제후국이라는 유교질서에 균열을 가하는 공간이었다. 조선의 국왕이 천자인 명나라 황제에게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선왕의 어진에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선원전이 건립되었다. 숙종대 이전의 선원전은 선왕의 어진을 봉안하는 공간이었을 뿐 제향공간은 아니었다. 숙종이 자신의 어진에 제향할 것을 유언으로 남기면서 선원전은 궁궐 내 새로운 제향공간이 되었다. 신주에 영혼이 깃든다는 정통 유교식 관념에 따르면 영정의 제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영정은 신주보다 훨씬 더 감각적이고 원초적인 기억장치였다. 이를 통해 국왕은 자신의 위상을 높일 수 있었다. 셋째, 현왕의 어진을 봉안한 전각이 등장했다. 숙종대 강화부에 장녕전이 건립된 후 영조는 숙종 뒤를 이어 강화부 만녕전과 경희궁 태녕전에 자신의 어진을 봉안하게 하였다. 정조는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을 세우고, 선왕의 유품과 함께 자신의 어진을 봉안했다. 이후 규장각은 정조의 친위기구로 성장했다. 현왕 어진 봉안 공간은 성리학적 의례에 부합하는 공간이 아니었으며, 현왕의 위상을 높이고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참고문헌
한국문화자원의이해1(2017),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문화원.
윤나영, 2011, 「고려와 조선의 마루장식기와」, 홍익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양정석, 2005, 「안학궁 남궁 정전곽의 구조를 통해 본 고구려 도성제」, 『고구려의 국제관계』, 고구려연구재단.
이호경, 2011, 「고려 시대 와당 제작기법의 일고찰」, 『제2회 한국기와학회 연구발표회 발표자료집』.
국은비, 조선 순조대 경희궁 침전영역 복원연구, 명지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3.
김정동, 2004《고종황제가 사랑한 정동과 덕수궁》, 발언.
이욱, 2015《조선 왕실의 제향 공간》,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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