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로마공화국 [ Roman Republic ]
2 분류
· 사회과학 > 정치 > 정치일반
· 역사와 지리 > 역사 > 서양사 > 근세 > 유럽
· 지역 > 유럽 > 이탈리아 > 라치오
3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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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요약
본문내용
게우스도 왕이었다고 한다. 아테네의 원시적인 왕제(王制)는 점차 귀족(Eupatridae)의 지배로 바뀌었으며, 귀족 중에서 복수(複數)의 장관(아르콘)이 나와 정치를 하였다. ‘아르콘’은 처음에는 종신관(終身官)이었으나, 나중에 10년 임기로 되었다가 1년 임기로 바뀌었다. 이 아르콘 전임자(前任者)들은 ‘아레오파고스 회의’의 종신의원이 되었다. BC 7세기경부터 상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하고 화폐의 유통도 개시되었는데, 농민 중에는 토지와 자유를 상실하여 노예로 전락하는 사람이 급증하였다.
그리하여 대토지를 소유하는 귀족에 대해 불만이 많아졌으며, 귀족과 평민간의 불화가 심해졌다. 그러나 드라콘의 성문법 제정(BC 621), 솔론의 개혁(BC 594),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권 수립(BC 561),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BC 508) 등으로 양자간의 조정이 꾀해지고 아테네의 민주화가 진행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아테네의 상공업과 문화가 많이 발달하였으며, 도기 제조업에서 그리스의 중심지가 되었고, 뛰어난 조각작품이 만들어졌다. BC 5세기 초에 페르시아의 침략을 여러 차례 받았는데, BC 490년의 침공 때에는 아테네군이 혼자 힘으로 마라톤에서 싸워 이를 물리칠 수 있었다. 또 BC 480∼BC 470년의 침공 때에는 스파르타도 잘 싸웠으나, 승패의 결정점이 된 살라미스해전에서 BC 482년부터 급조(急造)된 아테네의 해군이 주력이 되어 싸웠다. 이 두 차례의 승리로 아테네는 자국의 민주정치에 자신을 가지게 되었으며, 또 살라미스해전에서 활약한 일반대중의 정치적 발언권이 커진 끝에 그들에게까지 참정권이 확대되어 민주정치가 철저해졌다.
살라미스해전 후에 아테네는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를 설득하여 ‘델로스동맹’을 체결하고 그 맹주(盟主)가 되었다. 델로스동맹의 체결(BC 478)부터 펠로폰네소스전쟁의 개시(BC 431)까지가 아테네의 황금시대였으며, 민주정치가 철저해지고 경제적 번영은 절정에 이르렀다. 문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그리스의 학문·예술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여러 나라로부터 학자와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아테네인 중에서도 소크라테스·플라톤 등의 학자와 아이스킬로스·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아리스토파네스 등의 극시인(劇詩人)이 배출되었다. 또 파르테논·에레크테이온 등의 신전 건조가 성행하고 조각·회화 등의 미술도 꽃을 피워 페이디아스 등의 예술가가 등장하였다. 아테네는 그리스 제1의 해군국으로서 델로스동맹 도시들 사이에 정치적·경제적·군사적으로 강력히 군림하였기 때문에 이 시대를 ‘아테네제국시대’라고도 부른다.
또 이때에 아테네에서 독재적인 권력을 가졌던 사람은 페리클레스였기 때문에 이 시대를 ‘페리클레스시대’라고도 한다. 아테네의 횡포한 지배에 대한 여러 도시국가의 불만과, 스파르타의 질시·불안 등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것이 ‘펠로폰네소스전쟁’이다. 델로스동맹을 거느리는 아테네와 펠로폰네소스동맹의 맹주 스파르타 사이에 벌어진 이 전쟁은 27년 동안 계속되었으며, 일시적인 화평이 이루어진 때도 있고 아테네가 우세한 때도 있었으나 결국 스파르타가 승리하였다(BC 404). 전쟁 말기 및 전후에는 한동안 민주정체 체제가 중단되고 과두정체(寡頭政體)가 수립되었으나, 이는 오래가지 못하고 민주정치로 되돌아갔으며 오히려 제도적으로는 전후에 더욱 철저해졌다. 델로스동맹은 해산되고 함선은 몰수되었으며, 페이라이에우스와 아테네를 둘러싼 장성(長城)은 파괴되었다. 아테네는 그리스의 지배자 지위에서 물러나고 경제적으로도 한동안 곤궁하였으나 여전히 그리스의 유력한 폴리스의 하나였다.
따라서 스파르타의 강압적인 지배에 불만을 품은 테베·코린토스 등의 폴리스들이 아테네를 앞세워 ‘코린토스전쟁(BC 395∼BC 386)’을 일으켰다. 이 전쟁에서 스파르타는 패배하였으며, 그 결과로 장성도 재건되고 아테네는 에게해의 여러 폴리스와 제2회 해상동맹을 체결하였다. 아테네는 ‘델로스동맹’에서 실패한 경험을 살려 여러 시책을 취하였으나, 역시 동맹 도시들의 불만을 사서 ‘동맹시전쟁(同盟市戰爭)’을 겪어야 했다. 이 무렵 북방에 마케도니아가 등장하여, 필요한 곡물의 태반을 흑해 연안에서 들여오던 아테네로서는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데모스테네스 등의 반(反)마케도니아파(派)는 민회(民會)를 움직여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에게 선전포고하였으며, 아테네·테베 등의 그리스 연합군은 BC 338년에 카이로네아에서 분전하였으나 패배하였다.
아테네는 패전 후에도 자치와 독립이 용인되었으며, ‘헬라스 연맹’에도 참가하였다. 그러나 완전한 자주독립을 누리는 폴리스로서의 아테네의 역사는 여기서 끝났다. 아테네는 마케도니아 왕 알렉산드로스가 죽자 한때 마케도니아에 대해 반기를 들었으나 실패하였다. 그뒤 로마가 동방을 향해 세력을 뻗치기 시작하였는데, 아테네는 로마에 대해 비교적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로마도 아테네의 역사와 문화를 존중하여 비록 명목적인 것이기는 하였으나 독립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BC 146년에는 그리스의 다른 도시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로마의 속주(屬州)의 하나가 되었다. 이 시대에도 문화적으로 아테네는 그리스 및 지중해 세계의 학문·예술의 중심지로서 계속 그 지위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그리스도교화와 더불어 차츰 그 문화적 번영은 빛을 잃게 되었다. 서(西)로마의 몰락 후에는 동(東)로마제국(비잔틴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13세기에는 프랑크 공국의 하나가 되었다. 15세기 중엽에는 오마르가 거느리는 투르크인에게 점령당했으며, 그로부터 400년 동안 유럽사 밖으로 밀려났다. 이 기간 중에 그리스도교회로 사용되던 여러 신전은 이슬람교의 사원이 되었으며, 고대건축의 파괴가 진행되었다. 1687년에는 베네치아군(軍)이 아테네시를 공격하여 화약고로 쓰이던 파르테논신전을 포격하였기 때문에 큰 피해를 입었다. 그리스독립전쟁(1822∼1829) 때에는 독립군과 투르크군이 시의 쟁탈을 되풀이하였는데, 그리스의 독립이 인정된 뒤 수도가 되었다(1834). 고대의 유적으로 유명한 아테네에는 동로마시대의 여러 교회와, 투르크시대의 유물을 진열한 박물관 등이 있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그리하여 대토지를 소유하는 귀족에 대해 불만이 많아졌으며, 귀족과 평민간의 불화가 심해졌다. 그러나 드라콘의 성문법 제정(BC 621), 솔론의 개혁(BC 594),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권 수립(BC 561),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BC 508) 등으로 양자간의 조정이 꾀해지고 아테네의 민주화가 진행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아테네의 상공업과 문화가 많이 발달하였으며, 도기 제조업에서 그리스의 중심지가 되었고, 뛰어난 조각작품이 만들어졌다. BC 5세기 초에 페르시아의 침략을 여러 차례 받았는데, BC 490년의 침공 때에는 아테네군이 혼자 힘으로 마라톤에서 싸워 이를 물리칠 수 있었다. 또 BC 480∼BC 470년의 침공 때에는 스파르타도 잘 싸웠으나, 승패의 결정점이 된 살라미스해전에서 BC 482년부터 급조(急造)된 아테네의 해군이 주력이 되어 싸웠다. 이 두 차례의 승리로 아테네는 자국의 민주정치에 자신을 가지게 되었으며, 또 살라미스해전에서 활약한 일반대중의 정치적 발언권이 커진 끝에 그들에게까지 참정권이 확대되어 민주정치가 철저해졌다.
살라미스해전 후에 아테네는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를 설득하여 ‘델로스동맹’을 체결하고 그 맹주(盟主)가 되었다. 델로스동맹의 체결(BC 478)부터 펠로폰네소스전쟁의 개시(BC 431)까지가 아테네의 황금시대였으며, 민주정치가 철저해지고 경제적 번영은 절정에 이르렀다. 문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그리스의 학문·예술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여러 나라로부터 학자와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아테네인 중에서도 소크라테스·플라톤 등의 학자와 아이스킬로스·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아리스토파네스 등의 극시인(劇詩人)이 배출되었다. 또 파르테논·에레크테이온 등의 신전 건조가 성행하고 조각·회화 등의 미술도 꽃을 피워 페이디아스 등의 예술가가 등장하였다. 아테네는 그리스 제1의 해군국으로서 델로스동맹 도시들 사이에 정치적·경제적·군사적으로 강력히 군림하였기 때문에 이 시대를 ‘아테네제국시대’라고도 부른다.
또 이때에 아테네에서 독재적인 권력을 가졌던 사람은 페리클레스였기 때문에 이 시대를 ‘페리클레스시대’라고도 한다. 아테네의 횡포한 지배에 대한 여러 도시국가의 불만과, 스파르타의 질시·불안 등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것이 ‘펠로폰네소스전쟁’이다. 델로스동맹을 거느리는 아테네와 펠로폰네소스동맹의 맹주 스파르타 사이에 벌어진 이 전쟁은 27년 동안 계속되었으며, 일시적인 화평이 이루어진 때도 있고 아테네가 우세한 때도 있었으나 결국 스파르타가 승리하였다(BC 404). 전쟁 말기 및 전후에는 한동안 민주정체 체제가 중단되고 과두정체(寡頭政體)가 수립되었으나, 이는 오래가지 못하고 민주정치로 되돌아갔으며 오히려 제도적으로는 전후에 더욱 철저해졌다. 델로스동맹은 해산되고 함선은 몰수되었으며, 페이라이에우스와 아테네를 둘러싼 장성(長城)은 파괴되었다. 아테네는 그리스의 지배자 지위에서 물러나고 경제적으로도 한동안 곤궁하였으나 여전히 그리스의 유력한 폴리스의 하나였다.
따라서 스파르타의 강압적인 지배에 불만을 품은 테베·코린토스 등의 폴리스들이 아테네를 앞세워 ‘코린토스전쟁(BC 395∼BC 386)’을 일으켰다. 이 전쟁에서 스파르타는 패배하였으며, 그 결과로 장성도 재건되고 아테네는 에게해의 여러 폴리스와 제2회 해상동맹을 체결하였다. 아테네는 ‘델로스동맹’에서 실패한 경험을 살려 여러 시책을 취하였으나, 역시 동맹 도시들의 불만을 사서 ‘동맹시전쟁(同盟市戰爭)’을 겪어야 했다. 이 무렵 북방에 마케도니아가 등장하여, 필요한 곡물의 태반을 흑해 연안에서 들여오던 아테네로서는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데모스테네스 등의 반(反)마케도니아파(派)는 민회(民會)를 움직여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에게 선전포고하였으며, 아테네·테베 등의 그리스 연합군은 BC 338년에 카이로네아에서 분전하였으나 패배하였다.
아테네는 패전 후에도 자치와 독립이 용인되었으며, ‘헬라스 연맹’에도 참가하였다. 그러나 완전한 자주독립을 누리는 폴리스로서의 아테네의 역사는 여기서 끝났다. 아테네는 마케도니아 왕 알렉산드로스가 죽자 한때 마케도니아에 대해 반기를 들었으나 실패하였다. 그뒤 로마가 동방을 향해 세력을 뻗치기 시작하였는데, 아테네는 로마에 대해 비교적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로마도 아테네의 역사와 문화를 존중하여 비록 명목적인 것이기는 하였으나 독립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BC 146년에는 그리스의 다른 도시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로마의 속주(屬州)의 하나가 되었다. 이 시대에도 문화적으로 아테네는 그리스 및 지중해 세계의 학문·예술의 중심지로서 계속 그 지위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그리스도교화와 더불어 차츰 그 문화적 번영은 빛을 잃게 되었다. 서(西)로마의 몰락 후에는 동(東)로마제국(비잔틴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13세기에는 프랑크 공국의 하나가 되었다. 15세기 중엽에는 오마르가 거느리는 투르크인에게 점령당했으며, 그로부터 400년 동안 유럽사 밖으로 밀려났다. 이 기간 중에 그리스도교회로 사용되던 여러 신전은 이슬람교의 사원이 되었으며, 고대건축의 파괴가 진행되었다. 1687년에는 베네치아군(軍)이 아테네시를 공격하여 화약고로 쓰이던 파르테논신전을 포격하였기 때문에 큰 피해를 입었다. 그리스독립전쟁(1822∼1829) 때에는 독립군과 투르크군이 시의 쟁탈을 되풀이하였는데, 그리스의 독립이 인정된 뒤 수도가 되었다(1834). 고대의 유적으로 유명한 아테네에는 동로마시대의 여러 교회와, 투르크시대의 유물을 진열한 박물관 등이 있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