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 언
Ⅱ. [서원십영]
Ⅲ. 중국의 서원에 관한 퇴계의 견해
Ⅳ. 창설기의 조선 서원의 실체와
그에 대한 퇴계의 견해
Ⅴ. 서원 교학의 내용에 관한
퇴계의 견해
Ⅵ. 서원 안의 묘사에 관한
퇴계의 견해
Ⅶ. 퇴계의 독지원학정신
Ⅱ. [서원십영]
Ⅲ. 중국의 서원에 관한 퇴계의 견해
Ⅳ. 창설기의 조선 서원의 실체와
그에 대한 퇴계의 견해
Ⅴ. 서원 교학의 내용에 관한
퇴계의 견해
Ⅵ. 서원 안의 묘사에 관한
퇴계의 견해
Ⅶ. 퇴계의 독지원학정신
본문내용
고, 「迎鳳書院記」에서 「篤志願學」이란 一句에 의탁하여 나타내려고 했던 의미도, 바로 이러한 정신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伊尹이 經世濟民의 道에 뜻을 두고 천하를 경륜하는, 유가의 이른바 治人의 모범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顔淵은 하늘로부터 받은 明德을 밝혀 수신하여 도의를 체득하였으나, 난세에 태어나 그 도의를 실현할 수 없음을 알고,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조용히 숨어 韜晦의 일생을 보낸 사람을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태평성대에 태어나 훌륭한 임금을 만났더라면 마땅히 伊尹과 같이 천하를 경륜하는 것이 유가의 이상이나, 난세에는 물러나 후세에 성인의 蘊蓄을 발명하여 이룰 萬世無窮에 전해야 하는 것
) 通書 聖蘊 제29
역시 유가의 이상이라는 것이다. 자기가 모시는 임금이 요순과 같이 되도록 깨우쳐 주고, 백성들에게도 堯舜之道의 혜택을 입게 하여 제 살길을 찾도록 도와주지 못하면 그것이 마치 자신의 잘못인 양 부끄럽게 생각했던 伊尹이 가졌던 그러한 정치에의 원대한 포부를 돈독히 가지고, 陋巷에 살면서도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도 남을 원망하는 일 없이 안빈낙도의 생활을 즐기며 산 顔回의 爲學정신을 희구하며 살라는 퇴계의 이 「篤志願學」이란 간곡한 염원에서, 서당을 지어 제자들을 가르치고, 서원을 설립하여 「尊賢講道」를 강조해 온 유자 이퇴계의 이상을 읽을 수 있다.
-561-
오래 계속된 사화의 여진과 간신배들이 들끓는 혼탁한 세태하에서 도의의 실현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깊이 통찰한 퇴계는, 자신이 신봉하는 聖人의 道를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부득이 관계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와 도산서당을 지어 제자들 교육에 전념했던 것이다. 퇴계가 1565년 65세 때 지은 「書院十詠」 가운데 9개소의 서원의 설립에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관여하고 또한 그 의례제정에 깊이 관여한 것도 결단코 연고 없는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퇴계를 오로지 隱逸의 생활을 희구했던 인물로 이해하는 것은 옳다고 할 수 없다. 퇴계에게는 張載의 이른바 「生民을 위하여 道를 세우고 往聖을 위하여 絶學을 잇는다」
) 張子全書 卷14 性理拾遺: 爲天地立心, 爲生民立道, 爲去聖繼絶學, 爲萬世開太平.
고 하는, 儒者로서의 원대한 꿈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퇴계는 맹자의 이른바 대장부였다고 할 수 있다.
퇴계가 서원교학의 기본으로 삼은 것은 「尊賢講道」, 「尊賢養士」의 정신이다. 「尊賢」에 대해서 말할 것 같으면, 하나는 지도자의 자격을 갖춘 사람을 얻는 일의 중요성, 즉 師道의 확립이며, 다른 하나는 후배에게 모범이 되는 향토의 선현을 顯彰하는 일이며, 무엇보다도 道統의 傳에 관계가 있는 선현에 대한 존숭의 념을 잊어버리지 않는 일의 중요성이다. 「講道」라고 하는 면에 대해서 말하면, 決科利祿을 성취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또한 언어문사의 세련됨을 습득하기 위해서도 아닌, 오로지 오륜이라고 하는 인륜의 도를 강습하는 곳에 서원교학의 기본이 있다고 하는 주장이다. 「養士」라고 하는 면에 대해서 말하면, 서원교학에 의해서만이 「篤志願學」의 士, 환언하면 언젠가 참으로 국가사회를 위해 공헌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할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이며, 이것이 후일 서원 출신자가 정계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던 것이다.
창설기의 서원에는 上述한 바와 같은 서원 본래의 정신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적어도 퇴계의 의식 가운데에서는 서원교학의 본래정신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562-
이처럼 서원은 처음 설립 당시에는 유가의 기본사상인 「修己治人」,「崇德廣業」
) 周易 繫辭傳上
의 정신에 의해, 뜻을 얻지 못한 선비들이 경치좋은 조용한 산림에 은거하여 성인의 도를 닦으면서 「篤志願學」의 웅지를 기르던 유학 본래의 긍정적인 私學 연구단체였으나, 학문한 사람이 과거를 통하여 정치가가 된다고 하는 유학의 특성 때문에, 서원 출신자가 과거에 합격해서 정게에 진출하는 자가 많아짐에 따라, 점차 서원의 성격에도 변화가 생기고, 후세에 이르면 퇴계의 뜻에 반해서, 서원은 지방 양반들의 정치세력 기반의 온상으로 악용된 것도 또한 사실이다. 특히 유학의 이러한 특성이 중국의 원·명왕조 교체기와 麗·鮮왕조 교체기와 서로 맞물리고, 또한 17세기 명·청왕조 교체기에 있어서 이러한 대외 정치현실의 변화에 당면하여, 현실인식에 대한 견해가 서로 달랐던 학자들의 학문과 사상의 차이가, 정치적 인식차이로 확대되어 일어난 것이 이른바 사화와 당쟁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동인·서인의 분당, 남·북의 분당, 노론·소론의 분당, 그리고 남인과 노론 사이에 있었던 치열한 정권투쟁도 실은 이는 단순한 정권다툼이 아니라, 조선왕조의 존립과 기강을 위태롭게 하는 위기사태에 직면하여,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는 사대부들 사이에서 三綱五常論, 天理人欲論, 聖學論, 華夷論 등에 입각한 출처진퇴관 등에 견해차이가 생기게 된 결과, 이것이 정권과 연계됨으로써 초래된 결과인 것이다. 따라서 서원에 대하여 당쟁의 온상이라 비난해 온 식민지사관의 잔재도 용인하기 힘들거니와, 양반들의 기득권 유지 및 신분상승을 위한 본거지라는 서원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 대해서도 동조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하여 그간에 있었던 서원이 저질은 막심한 폐해에 대하여 부정하려는 것도 물론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서원에 대한 마이너스면만을 보고, 서원의 존재를 부정적으로만 본다면 그것 역시 잘못된 것이다.
-563-
조선의 서원은 중국서원의 典範을 본받아 성립되고 발전했다. 그러나 현재 중국에서는 지난날의 서원이란 단순한 過去의 遺物일 뿐이다. 그러나 조선의 서원은 옛날처럼 융성하지는 못하지만 오늘날도 역시 신성한 장소로 정중하게 보호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존숭받고 있다. 이러한 일은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전, 퇴계에 의해서 확립된 「尊賢講道」란 네 글자에 의하여 대표되는 서원의 건학정신이, 조선조 사림파 학자들의 마음에 連綿하게 계승되어, 현대 한국인의 정신생활의 주춧돌로서 지금도 强固하게 계승되어 살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서원이 지닌 프러스면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여야함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여기서 伊尹이 經世濟民의 道에 뜻을 두고 천하를 경륜하는, 유가의 이른바 治人의 모범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顔淵은 하늘로부터 받은 明德을 밝혀 수신하여 도의를 체득하였으나, 난세에 태어나 그 도의를 실현할 수 없음을 알고,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조용히 숨어 韜晦의 일생을 보낸 사람을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태평성대에 태어나 훌륭한 임금을 만났더라면 마땅히 伊尹과 같이 천하를 경륜하는 것이 유가의 이상이나, 난세에는 물러나 후세에 성인의 蘊蓄을 발명하여 이룰 萬世無窮에 전해야 하는 것
) 通書 聖蘊 제29
역시 유가의 이상이라는 것이다. 자기가 모시는 임금이 요순과 같이 되도록 깨우쳐 주고, 백성들에게도 堯舜之道의 혜택을 입게 하여 제 살길을 찾도록 도와주지 못하면 그것이 마치 자신의 잘못인 양 부끄럽게 생각했던 伊尹이 가졌던 그러한 정치에의 원대한 포부를 돈독히 가지고, 陋巷에 살면서도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도 남을 원망하는 일 없이 안빈낙도의 생활을 즐기며 산 顔回의 爲學정신을 희구하며 살라는 퇴계의 이 「篤志願學」이란 간곡한 염원에서, 서당을 지어 제자들을 가르치고, 서원을 설립하여 「尊賢講道」를 강조해 온 유자 이퇴계의 이상을 읽을 수 있다.
-561-
오래 계속된 사화의 여진과 간신배들이 들끓는 혼탁한 세태하에서 도의의 실현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깊이 통찰한 퇴계는, 자신이 신봉하는 聖人의 道를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부득이 관계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와 도산서당을 지어 제자들 교육에 전념했던 것이다. 퇴계가 1565년 65세 때 지은 「書院十詠」 가운데 9개소의 서원의 설립에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관여하고 또한 그 의례제정에 깊이 관여한 것도 결단코 연고 없는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퇴계를 오로지 隱逸의 생활을 희구했던 인물로 이해하는 것은 옳다고 할 수 없다. 퇴계에게는 張載의 이른바 「生民을 위하여 道를 세우고 往聖을 위하여 絶學을 잇는다」
) 張子全書 卷14 性理拾遺: 爲天地立心, 爲生民立道, 爲去聖繼絶學, 爲萬世開太平.
고 하는, 儒者로서의 원대한 꿈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퇴계는 맹자의 이른바 대장부였다고 할 수 있다.
퇴계가 서원교학의 기본으로 삼은 것은 「尊賢講道」, 「尊賢養士」의 정신이다. 「尊賢」에 대해서 말할 것 같으면, 하나는 지도자의 자격을 갖춘 사람을 얻는 일의 중요성, 즉 師道의 확립이며, 다른 하나는 후배에게 모범이 되는 향토의 선현을 顯彰하는 일이며, 무엇보다도 道統의 傳에 관계가 있는 선현에 대한 존숭의 념을 잊어버리지 않는 일의 중요성이다. 「講道」라고 하는 면에 대해서 말하면, 決科利祿을 성취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또한 언어문사의 세련됨을 습득하기 위해서도 아닌, 오로지 오륜이라고 하는 인륜의 도를 강습하는 곳에 서원교학의 기본이 있다고 하는 주장이다. 「養士」라고 하는 면에 대해서 말하면, 서원교학에 의해서만이 「篤志願學」의 士, 환언하면 언젠가 참으로 국가사회를 위해 공헌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할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이며, 이것이 후일 서원 출신자가 정계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던 것이다.
창설기의 서원에는 上述한 바와 같은 서원 본래의 정신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적어도 퇴계의 의식 가운데에서는 서원교학의 본래정신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562-
이처럼 서원은 처음 설립 당시에는 유가의 기본사상인 「修己治人」,「崇德廣業」
) 周易 繫辭傳上
의 정신에 의해, 뜻을 얻지 못한 선비들이 경치좋은 조용한 산림에 은거하여 성인의 도를 닦으면서 「篤志願學」의 웅지를 기르던 유학 본래의 긍정적인 私學 연구단체였으나, 학문한 사람이 과거를 통하여 정치가가 된다고 하는 유학의 특성 때문에, 서원 출신자가 과거에 합격해서 정게에 진출하는 자가 많아짐에 따라, 점차 서원의 성격에도 변화가 생기고, 후세에 이르면 퇴계의 뜻에 반해서, 서원은 지방 양반들의 정치세력 기반의 온상으로 악용된 것도 또한 사실이다. 특히 유학의 이러한 특성이 중국의 원·명왕조 교체기와 麗·鮮왕조 교체기와 서로 맞물리고, 또한 17세기 명·청왕조 교체기에 있어서 이러한 대외 정치현실의 변화에 당면하여, 현실인식에 대한 견해가 서로 달랐던 학자들의 학문과 사상의 차이가, 정치적 인식차이로 확대되어 일어난 것이 이른바 사화와 당쟁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동인·서인의 분당, 남·북의 분당, 노론·소론의 분당, 그리고 남인과 노론 사이에 있었던 치열한 정권투쟁도 실은 이는 단순한 정권다툼이 아니라, 조선왕조의 존립과 기강을 위태롭게 하는 위기사태에 직면하여,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는 사대부들 사이에서 三綱五常論, 天理人欲論, 聖學論, 華夷論 등에 입각한 출처진퇴관 등에 견해차이가 생기게 된 결과, 이것이 정권과 연계됨으로써 초래된 결과인 것이다. 따라서 서원에 대하여 당쟁의 온상이라 비난해 온 식민지사관의 잔재도 용인하기 힘들거니와, 양반들의 기득권 유지 및 신분상승을 위한 본거지라는 서원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 대해서도 동조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하여 그간에 있었던 서원이 저질은 막심한 폐해에 대하여 부정하려는 것도 물론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서원에 대한 마이너스면만을 보고, 서원의 존재를 부정적으로만 본다면 그것 역시 잘못된 것이다.
-563-
조선의 서원은 중국서원의 典範을 본받아 성립되고 발전했다. 그러나 현재 중국에서는 지난날의 서원이란 단순한 過去의 遺物일 뿐이다. 그러나 조선의 서원은 옛날처럼 융성하지는 못하지만 오늘날도 역시 신성한 장소로 정중하게 보호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존숭받고 있다. 이러한 일은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전, 퇴계에 의해서 확립된 「尊賢講道」란 네 글자에 의하여 대표되는 서원의 건학정신이, 조선조 사림파 학자들의 마음에 連綿하게 계승되어, 현대 한국인의 정신생활의 주춧돌로서 지금도 强固하게 계승되어 살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서원이 지닌 프러스면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여야함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