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제 목 : 동양화 초상화 대한 레포트 입니다.
□ 총 페이지수 : 조선시대 선비의 초상화 레포트
□ 목 차:
저번엔 그림삼입을 안한 실수로 인해 그림이 업로드 되지 못함을 사과드립니다.
아무쪼록 작지만 많은 도움 됐으면 좋겠습니다.
□ 총 페이지수 : 조선시대 선비의 초상화 레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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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쪼록 작지만 많은 도움 됐으면 좋겠습니다.
본문내용
대한 존경이 높아지게 되고, 17세기에는 과거시험을 보지 않고도 덕망있는 학자를 곧바로 높은 벼슬에 임용하는 제도까지 있었다. 이런 이유로 대신의 초상과 학자의 초상은 조선시대 사대부 초상의 두 축이 되었다.
조선시대 사대부의 초상화가 많이 제작된 것은 가묘와 서원의 발달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문벌을 중시하는 사회적 풍조 때문에 이름있는 집안에서는 그 집안의 상징적인 영당에 위폐와 또는 초상화로 모셔놓았다. 이는 대개 1592년 임진왜란 이후의 일이었지만 그 집안의 상징적인 인물은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초상화로 그려 모시기도 하였다. 이렇게 집안의 영당에 모셔진 조선시대 초상화들은 지금도 각 문중에서 제사 때만 꺼내 걸고 제사드리고 있다. 그 수효는 아직까지 정확히 조사된 것이 없다.
조선시대 서원은 1543 ( 중종 38년 )풍기군수 주세붕(1495~1554)이 풍기 백운동에 세운 백운동서원, 훗날 소수서원이 처음 세워진 것이었다. 이는 국가의 교육관이 과거시험 공부를 위주로 하는 것에서 벗어나 진정한 학문을 연마하는 곳으로 서원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사립대학이다. 그리고 소수서원에서는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들여온 안향을 제사로 모셨다.
이후 16세기에 전국에 서원이 속속 창건되었는데 각 서원마다 그 서원의 설립자 또는 옛 선현중 인연이 있는 분을 한 분 또는 3명씩 모셨다. 그리고 서원에는 그 분들의 사당을 만들어 위폐 또는 초상화를 모셨다.
예를 들어 예안의 도산서원은 이황, 안동의 병산서원은 유성룡, 달성의 필암서원은 김인후, 황주의 백록동서원은 이이 등을 모셨다. 그러나 이 초창기 서원들은 초상화를 제작하지 않고 대개 위패를 모셨기 때문에 초상화가 없었다. 17세기 이후의 서원은 초상화를 만든 경우가 많아 괴산 화양동 서원의 송시열, 논산 노강서원의 윤증 등은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전국의 가묘와 서원의 영당에 모셔진 초상화의 숫자는 무수히 많은데 1843년부터 1849년 사이에 조사된 통계자료에 의하면 전국에 1012점 이었다고 한다.
서원은 이후 학문의 연구보다도 당파의 형성에 근거지 역할도 하여 많은 사회적 병폐를 일으켰는데 1817년 흥성 대원군이 전국에 47개 서원과 사우만 남기고 철폐령을 내렸다. 그리고 1920년 서원은 문중들이 다시 중건하기 시작했고 그런 재건 작업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바로 아래에 있는 그림은 주세붕의 영정이다.
주세붕영정 (周世鵬影幀)
종 목 보물 제717호
분 류 초상화
시 대 조선중종 37년 (1543)
소 재 지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151
재료,재질 견
주세붕은 조선시대< 朝鮮時代 >의 문신< 文臣 >으로 자는 경유< 景游 >, 호는 신재< 愼齋 >, 시호< 諡號 >는 문민공< 文敏公 >이다. 그는 중종< 中宗 > 17년(1522)에 문과< 文科 >에 급제하고, 중종 36년(1541) 풍기군수< 豊基郡守 >로 부임해간 이듬해 백운동에 회헌< 晦軒 > 안향< 安珦 >의 사당인 회헌사< 晦軒祠 >를 세우고, 이어 중종 38년(1543) 주자< 朱子 >의 백록동학규< 白鹿洞學規 >를 본받아서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 白雲洞書院 >(후에 소수서원< 紹修書院 >)을 창설했다.
그후 직제학< 直提學 >, 도승지< 都承旨 >, 중추부사< 同知中樞府事 >가 된 다음, 예조판서< 禮曹判書 >에 추증< 追贈 >되었으며, 인조< 仁祖 > 11년(1633)에는 소수서원에 배향되었다.
이 영정이 이곳에 봉안된 것은 이와 같은 서원 창설과 안향에의 숭모< 崇慕 >라는 배경하에서 이해될 수 있으며, 좌안8분면< 左顔八分面 >의 반신상< 半身像 >인 이 초상화는 복식상< 服飾上 >의 특징이나 안면을 형용하는 필법에서 16세기 초상화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초상화는 현재 주씨문중< 周氏門中 >에 전래되는 전신교의좌상< 全身交椅坐像 >의 저본< 底本 >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유성룡의 초상화
]
박정의 푸른색 관복상 가로 153㎝, 세로 82㎝)
이 작품은 좌안칠분면(左顔七分面)으로 낮은 사모에 백한(白閑)이 그려진 흉배의 푸른색 관복을 입은 인물을 묘사하였다.
인물의 묘사법을 보면 조선중기 초상화의 기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흉배의 양식은 1623년 박정이 인조반정의 참여로 정사공신(靖社功臣)에 책록될 당시의 정3품 품계에 해당되는 백한(白閑)이 그려져 있어 공신책록과 연관하여 그려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화면의 하단부에는 잘려나간 듯 하지만 점묘법을 연상하게 하는 필치로 채전(彩氈)이 그려져 있어 조선중기의 초상화의 형식을 반영한다.
이 영정은 안면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후대에 그려진 것으로 흉배와 바닥의 채전을 그린 형식을 제외하고는 조선중기의 회화적 양식을 찾아 보기는 어려우나, 안면부분은 조선중기의 안면묘사법을 잘 전해 주는상으로 다른 이모본의 원본이 될 수 있다는 점에 가치가 있다.
박정의 녹색 관복상(가로 169㎝, 세로 90㎝)
이 상은 조사모(鳥沙帽)에 백한의 흉배가 있는 짙은 녹색의 구름문단령에 서대를 한 인물이 발은 "八"자로 가지런히 족좌대에 올려놓고 표피를 깐 의자에 앉은 모습을 묘사하였다.
이와 같은 낮은 사모는 조선중기의 사모양식을 반영하며 백한의 흉배는 정3품의 품계에 해당하는 것으로 조선중기의 형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표피를 깐 의자와 단령사이로 보이는 첩리, 원근법에 의해 그려진 족좌대, 공수한 옷소매 사이로 흰 옷이 보이지 않는 점들은 조선 후기의 초상화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인물의 묘사법을 보면 안면은 엷은 갈색으로 윤곽을 그린 뒤 오악(五岳) 부분을 선염하고 눈썹, 머리카락 등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등 조선 중기의 양식을 보이나 거의 정면으로 보이는 신체, 원근법에 의한 족좌대의 표현등은 조선후기의 초상화 양식을 보여준다.
이 영정의 안면부분은 조선중기의 작품을 本으로 한 듯 조선중기의 안면 표현방식을 반영하나 단령과 표피, 족좌대는 조선후기 초상화의 전형적인 양식으로 볼 수 있으며 그 묘사수법도 우수하여 조선후기 초상화 연구에 가치 있는 작품이다.
※ 이 두 점의 영정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기탁되어 관리되고 있다
조선시대 사대부의 초상화가 많이 제작된 것은 가묘와 서원의 발달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문벌을 중시하는 사회적 풍조 때문에 이름있는 집안에서는 그 집안의 상징적인 영당에 위폐와 또는 초상화로 모셔놓았다. 이는 대개 1592년 임진왜란 이후의 일이었지만 그 집안의 상징적인 인물은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초상화로 그려 모시기도 하였다. 이렇게 집안의 영당에 모셔진 조선시대 초상화들은 지금도 각 문중에서 제사 때만 꺼내 걸고 제사드리고 있다. 그 수효는 아직까지 정확히 조사된 것이 없다.
조선시대 서원은 1543 ( 중종 38년 )풍기군수 주세붕(1495~1554)이 풍기 백운동에 세운 백운동서원, 훗날 소수서원이 처음 세워진 것이었다. 이는 국가의 교육관이 과거시험 공부를 위주로 하는 것에서 벗어나 진정한 학문을 연마하는 곳으로 서원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사립대학이다. 그리고 소수서원에서는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들여온 안향을 제사로 모셨다.
이후 16세기에 전국에 서원이 속속 창건되었는데 각 서원마다 그 서원의 설립자 또는 옛 선현중 인연이 있는 분을 한 분 또는 3명씩 모셨다. 그리고 서원에는 그 분들의 사당을 만들어 위폐 또는 초상화를 모셨다.
예를 들어 예안의 도산서원은 이황, 안동의 병산서원은 유성룡, 달성의 필암서원은 김인후, 황주의 백록동서원은 이이 등을 모셨다. 그러나 이 초창기 서원들은 초상화를 제작하지 않고 대개 위패를 모셨기 때문에 초상화가 없었다. 17세기 이후의 서원은 초상화를 만든 경우가 많아 괴산 화양동 서원의 송시열, 논산 노강서원의 윤증 등은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전국의 가묘와 서원의 영당에 모셔진 초상화의 숫자는 무수히 많은데 1843년부터 1849년 사이에 조사된 통계자료에 의하면 전국에 1012점 이었다고 한다.
서원은 이후 학문의 연구보다도 당파의 형성에 근거지 역할도 하여 많은 사회적 병폐를 일으켰는데 1817년 흥성 대원군이 전국에 47개 서원과 사우만 남기고 철폐령을 내렸다. 그리고 1920년 서원은 문중들이 다시 중건하기 시작했고 그런 재건 작업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바로 아래에 있는 그림은 주세붕의 영정이다.
주세붕영정 (周世鵬影幀)
종 목 보물 제717호
분 류 초상화
시 대 조선중종 37년 (1543)
소 재 지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151
재료,재질 견
주세붕은 조선시대< 朝鮮時代 >의 문신< 文臣 >으로 자는 경유< 景游 >, 호는 신재< 愼齋 >, 시호< 諡號 >는 문민공< 文敏公 >이다. 그는 중종< 中宗 > 17년(1522)에 문과< 文科 >에 급제하고, 중종 36년(1541) 풍기군수< 豊基郡守 >로 부임해간 이듬해 백운동에 회헌< 晦軒 > 안향< 安珦 >의 사당인 회헌사< 晦軒祠 >를 세우고, 이어 중종 38년(1543) 주자< 朱子 >의 백록동학규< 白鹿洞學規 >를 본받아서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 白雲洞書院 >(후에 소수서원< 紹修書院 >)을 창설했다.
그후 직제학< 直提學 >, 도승지< 都承旨 >, 중추부사< 同知中樞府事 >가 된 다음, 예조판서< 禮曹判書 >에 추증< 追贈 >되었으며, 인조< 仁祖 > 11년(1633)에는 소수서원에 배향되었다.
이 영정이 이곳에 봉안된 것은 이와 같은 서원 창설과 안향에의 숭모< 崇慕 >라는 배경하에서 이해될 수 있으며, 좌안8분면< 左顔八分面 >의 반신상< 半身像 >인 이 초상화는 복식상< 服飾上 >의 특징이나 안면을 형용하는 필법에서 16세기 초상화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초상화는 현재 주씨문중< 周氏門中 >에 전래되는 전신교의좌상< 全身交椅坐像 >의 저본< 底本 >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유성룡의 초상화
]
박정의 푸른색 관복상 가로 153㎝, 세로 82㎝)
이 작품은 좌안칠분면(左顔七分面)으로 낮은 사모에 백한(白閑)이 그려진 흉배의 푸른색 관복을 입은 인물을 묘사하였다.
인물의 묘사법을 보면 조선중기 초상화의 기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흉배의 양식은 1623년 박정이 인조반정의 참여로 정사공신(靖社功臣)에 책록될 당시의 정3품 품계에 해당되는 백한(白閑)이 그려져 있어 공신책록과 연관하여 그려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화면의 하단부에는 잘려나간 듯 하지만 점묘법을 연상하게 하는 필치로 채전(彩氈)이 그려져 있어 조선중기의 초상화의 형식을 반영한다.
이 영정은 안면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후대에 그려진 것으로 흉배와 바닥의 채전을 그린 형식을 제외하고는 조선중기의 회화적 양식을 찾아 보기는 어려우나, 안면부분은 조선중기의 안면묘사법을 잘 전해 주는상으로 다른 이모본의 원본이 될 수 있다는 점에 가치가 있다.
박정의 녹색 관복상(가로 169㎝, 세로 90㎝)
이 상은 조사모(鳥沙帽)에 백한의 흉배가 있는 짙은 녹색의 구름문단령에 서대를 한 인물이 발은 "八"자로 가지런히 족좌대에 올려놓고 표피를 깐 의자에 앉은 모습을 묘사하였다.
이와 같은 낮은 사모는 조선중기의 사모양식을 반영하며 백한의 흉배는 정3품의 품계에 해당하는 것으로 조선중기의 형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표피를 깐 의자와 단령사이로 보이는 첩리, 원근법에 의해 그려진 족좌대, 공수한 옷소매 사이로 흰 옷이 보이지 않는 점들은 조선 후기의 초상화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인물의 묘사법을 보면 안면은 엷은 갈색으로 윤곽을 그린 뒤 오악(五岳) 부분을 선염하고 눈썹, 머리카락 등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등 조선 중기의 양식을 보이나 거의 정면으로 보이는 신체, 원근법에 의한 족좌대의 표현등은 조선후기의 초상화 양식을 보여준다.
이 영정의 안면부분은 조선중기의 작품을 本으로 한 듯 조선중기의 안면 표현방식을 반영하나 단령과 표피, 족좌대는 조선후기 초상화의 전형적인 양식으로 볼 수 있으며 그 묘사수법도 우수하여 조선후기 초상화 연구에 가치 있는 작품이다.
※ 이 두 점의 영정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기탁되어 관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