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보려는 욕망을, 즉 단절, 불연속성 그리고 틈새 없는 세계를 보려는 욕망을 재현한다.
반면 이와 반대방향으로 작동하는 것이 몽타주이다. 몽타주의 귀재 에이젠쉬타인은 서로 충돌하는 장면을 대립시켜 극적 효과와 나래티브 상의 질적 비약을 낳는 몽타주 편집법을 변증법에 기초시키려 하였다. 하지만 싱어에 따르면 몽타주는 사물간의 연결이 서사적 인과적 혹은 자연적 의미를 상실하고 그의 진부한 맥락을 벗어나 병치에 의해 새로운 고유의 맥락을 생성하는 계열로 대치되는 봄의 방식이다. 몽타주는 영화적 의미화가 함축하고 있는 돌발적 성격이 선명하게 보여지는 경우이다. 몽타주는 분명한 맥락에 위치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타나는 것들을 결합시킴으로써 관계를 형성한다. 이점에서 몽타주는 연속성 편집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연속성 편집의 전략은, 서사와 사물들과의 관계를 추론할 수 있게 하는 맥락을 설정할 수 있게 하는 영화의 다른 형태, 예컨대 등장인물 등에 의해 지원된다. 반면 몽타주 시퀀스의 계기들을 연결시키는 맥락은 행위에서 그의 실현을 전제하지 않는다. 몽타주는 나타남의 흐름과 계열만을 통해 사물간에 관계를 의도적으로 부여함으로써 의미의 과잉을 생산한다. 이 순간 관객에게 일어나는 희열은, 세계를 조직하는 유일한 지배적인 힘으로서 세계를 그 자신의 요구에 따라 완전히 자유롭게 조직하려는 봄의 욕망으로부터 비롯된다.
이상의 논의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영화의 체험은 나의 활동적 지향성이 여러 가지 조작으로 통해 탈중심화되어 지금 만들어지고 있다. 때문에 영화의 희열은 내가 기대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서로 연결되고 사물과 대면하여 경이와 매혹의 가능성으로 나를 끌어들이는 탈중심화된 지각이 자연적 지각과 구별되는 그 차이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결국 싱어에 따르면 영화의 희열은 나를 나 자신의 외부로 끌어내는 나타남을 제공하여 나를 내가 결코 있어본 적이 없는, 내가 결코 알 수 없는 - 왜냐하면 그러한 장소는 영화적 사건이 그것을 존재하게 하기 전에는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에 - 곳으로 나를 옮겨 놓는 데 있다.
4. 맺음 말
우리는 지금까지 메를로-뽕띠의 신체 현상학이 어떻게 영화 현상학이 될 수 있는지를 소브책과 싱어에 의해 발전된 영화 현상학을 통해 고찰해 보았다. 소브책의 경우는 메를로-뽕띠의 충실한 계승자로 메를로-뽕띠의 신체 현상학을 거의 원형 그대로 영화 내면 깊숙이 침투시켜 우리의 봄의 구조를 상호주관적으로 드러내는 운동이 바로 영화임을 밝혀내었다. 하지만 싱어와 메를로-뽕띠의 관계는 불안하다. 싱어의 영화 현상학은 자연적 경험에 대한 메를로-뽕띠의 현상적 분석에 동의하면서도 동시에 상당한 긴장관계를 가지고 있다. 싱어와 메를로-뽕띠의 관계는 싱어가 메를로-뽕띠를 다음과 같이 비판할 때 분명해진다.
메를로-뽕띠는 현상학이 영화 표현의 의미 능력을 평가하기에 특히 적합한 입장이라고 시사한바 있다. 왜냐하면 세계를 바라보는 현상학적 입장은 우리의 영화적 경험에서 확증되는 것 같고 또 영화는 현상학에서 확증되는 것 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정신과 육체, 정신과 세계의 통일성과 양자가 서로에게서 표현되는 것을 분명히 해준다고 메를로-뽕띠는 말한다. 메를로-뽕띠와 마찬가지로 싱어는 영화가 몇 가지 의미에서 현상학적 이론을 확증해 준다는 점을 인정한다. 영화 제작의 과정은 그 제작의 단계에서건 감상의 단계에서건 지향적이고 동기 유발적인 지각적 삶을 요구한다. 우리의 몸으로 이루어지는 지각이 시간을 넘어 항상 의미를 향해 가는 움직임이 아니라면, 영화는 단절된 요소들로 흩어져 일련의 정지된 사진 이미지 이상을 의미할 수 없을 것이다. 나타남의 흐름을 시간을 넘어서 종합할 수 있는 지향적 경험의 장소로서 신체적 비젼이 없다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미지를 연결시키는 방식에 의해 발생하는 의미의 여분은 실종될 것이다. 그리고 영화제작은 봄의 상호주관적 의미를 전제하는데, 거기서 봄은 자신의 대상인식 양식이 아니라 타자에게 열려있고 대화할 수 있는 존재양식이다.
하지만 싱어는 영화에서 이러한 자연적 봄의 현상학적 구조가 그대로 재생되는 것(reproduce)이 아님을 강조한다. 바로 여기서 싱어는 메를로-뽕띠나 소브책과 거리를 취할 수밖에 없다. 영화적 봄의 가치는 자연적 봄으로부터의 거리와 차이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영화는 봄이 봄의 구조를 인식하여 그 봄의 결핍을 파악하고 그 결핍을 충족시키려는 봄의 욕망이 현실화되는 것이다. 영화는 그냥 눈이 보는 것이 아니다. 자연적 봄의 결핍을 채우려는 욕망으로 가득 찬 비젼이 움직여 가는 것, 바로 그것이 영화이다. 메를로-뽕띠와 소브책은 바로 이 점을 간과했다. 그들은 영화가 우리의 자연적 경험에 대한 반성적 운동으로 자연적 경험이 반복되는 것으로 봄으로써 영화를 영화로 만드는 핵심 요소, 즉 영화는 자연적 경험 구조를 변조 왜곡하여 자연적 경험의 결핍을 충족시키는 욕망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놓쳐버렸다. 영화에서 봄은 그 자신을 성찰하여 봄의 동기와 욕망을 재발견할 수 있는 봄의 양식을 생산하는 것이다. 요컨대, 부재하는 것, 결핍된 것을 현전화하고 충족시키려하는 욕망이란 기관차의 운동, 바로 그것에 반응하는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 영화이다.
따라서 영화는 싱어가 표현하듯 "우리 지각의 호흡, 범위, 깊이 그리고 그와 함께 지각에 의존하는 모든 삶을 증폭하고 고양하는 담론"이다. 영화의 희열은, 특히 영화의 시각적 희열은 영화가 우리의 봄의 과정과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기에 또 우리의 봄의 한계를 벗어나며 우리의 봄의 법칙을 위반하기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싱어에 있어서 영화에 대한 철학으로서의 현상학이 갖는 의미와 역할에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매우 역설적이게도 싱어에 따르면 우리의 봄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은 봄의 구조를 어떻게 벗어나고, 위반해야할지를 시사하기에 영화 현상학이 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영화는 철저히 반성의 산물이며 그러한 한 그것은 의식의 차원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영화에 대한 현상학적 접근은 몸의 현상학이 아니라 의식의 현상학에서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이와 반대방향으로 작동하는 것이 몽타주이다. 몽타주의 귀재 에이젠쉬타인은 서로 충돌하는 장면을 대립시켜 극적 효과와 나래티브 상의 질적 비약을 낳는 몽타주 편집법을 변증법에 기초시키려 하였다. 하지만 싱어에 따르면 몽타주는 사물간의 연결이 서사적 인과적 혹은 자연적 의미를 상실하고 그의 진부한 맥락을 벗어나 병치에 의해 새로운 고유의 맥락을 생성하는 계열로 대치되는 봄의 방식이다. 몽타주는 영화적 의미화가 함축하고 있는 돌발적 성격이 선명하게 보여지는 경우이다. 몽타주는 분명한 맥락에 위치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타나는 것들을 결합시킴으로써 관계를 형성한다. 이점에서 몽타주는 연속성 편집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연속성 편집의 전략은, 서사와 사물들과의 관계를 추론할 수 있게 하는 맥락을 설정할 수 있게 하는 영화의 다른 형태, 예컨대 등장인물 등에 의해 지원된다. 반면 몽타주 시퀀스의 계기들을 연결시키는 맥락은 행위에서 그의 실현을 전제하지 않는다. 몽타주는 나타남의 흐름과 계열만을 통해 사물간에 관계를 의도적으로 부여함으로써 의미의 과잉을 생산한다. 이 순간 관객에게 일어나는 희열은, 세계를 조직하는 유일한 지배적인 힘으로서 세계를 그 자신의 요구에 따라 완전히 자유롭게 조직하려는 봄의 욕망으로부터 비롯된다.
이상의 논의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영화의 체험은 나의 활동적 지향성이 여러 가지 조작으로 통해 탈중심화되어 지금 만들어지고 있다. 때문에 영화의 희열은 내가 기대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서로 연결되고 사물과 대면하여 경이와 매혹의 가능성으로 나를 끌어들이는 탈중심화된 지각이 자연적 지각과 구별되는 그 차이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결국 싱어에 따르면 영화의 희열은 나를 나 자신의 외부로 끌어내는 나타남을 제공하여 나를 내가 결코 있어본 적이 없는, 내가 결코 알 수 없는 - 왜냐하면 그러한 장소는 영화적 사건이 그것을 존재하게 하기 전에는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에 - 곳으로 나를 옮겨 놓는 데 있다.
4. 맺음 말
우리는 지금까지 메를로-뽕띠의 신체 현상학이 어떻게 영화 현상학이 될 수 있는지를 소브책과 싱어에 의해 발전된 영화 현상학을 통해 고찰해 보았다. 소브책의 경우는 메를로-뽕띠의 충실한 계승자로 메를로-뽕띠의 신체 현상학을 거의 원형 그대로 영화 내면 깊숙이 침투시켜 우리의 봄의 구조를 상호주관적으로 드러내는 운동이 바로 영화임을 밝혀내었다. 하지만 싱어와 메를로-뽕띠의 관계는 불안하다. 싱어의 영화 현상학은 자연적 경험에 대한 메를로-뽕띠의 현상적 분석에 동의하면서도 동시에 상당한 긴장관계를 가지고 있다. 싱어와 메를로-뽕띠의 관계는 싱어가 메를로-뽕띠를 다음과 같이 비판할 때 분명해진다.
메를로-뽕띠는 현상학이 영화 표현의 의미 능력을 평가하기에 특히 적합한 입장이라고 시사한바 있다. 왜냐하면 세계를 바라보는 현상학적 입장은 우리의 영화적 경험에서 확증되는 것 같고 또 영화는 현상학에서 확증되는 것 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정신과 육체, 정신과 세계의 통일성과 양자가 서로에게서 표현되는 것을 분명히 해준다고 메를로-뽕띠는 말한다. 메를로-뽕띠와 마찬가지로 싱어는 영화가 몇 가지 의미에서 현상학적 이론을 확증해 준다는 점을 인정한다. 영화 제작의 과정은 그 제작의 단계에서건 감상의 단계에서건 지향적이고 동기 유발적인 지각적 삶을 요구한다. 우리의 몸으로 이루어지는 지각이 시간을 넘어 항상 의미를 향해 가는 움직임이 아니라면, 영화는 단절된 요소들로 흩어져 일련의 정지된 사진 이미지 이상을 의미할 수 없을 것이다. 나타남의 흐름을 시간을 넘어서 종합할 수 있는 지향적 경험의 장소로서 신체적 비젼이 없다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미지를 연결시키는 방식에 의해 발생하는 의미의 여분은 실종될 것이다. 그리고 영화제작은 봄의 상호주관적 의미를 전제하는데, 거기서 봄은 자신의 대상인식 양식이 아니라 타자에게 열려있고 대화할 수 있는 존재양식이다.
하지만 싱어는 영화에서 이러한 자연적 봄의 현상학적 구조가 그대로 재생되는 것(reproduce)이 아님을 강조한다. 바로 여기서 싱어는 메를로-뽕띠나 소브책과 거리를 취할 수밖에 없다. 영화적 봄의 가치는 자연적 봄으로부터의 거리와 차이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영화는 봄이 봄의 구조를 인식하여 그 봄의 결핍을 파악하고 그 결핍을 충족시키려는 봄의 욕망이 현실화되는 것이다. 영화는 그냥 눈이 보는 것이 아니다. 자연적 봄의 결핍을 채우려는 욕망으로 가득 찬 비젼이 움직여 가는 것, 바로 그것이 영화이다. 메를로-뽕띠와 소브책은 바로 이 점을 간과했다. 그들은 영화가 우리의 자연적 경험에 대한 반성적 운동으로 자연적 경험이 반복되는 것으로 봄으로써 영화를 영화로 만드는 핵심 요소, 즉 영화는 자연적 경험 구조를 변조 왜곡하여 자연적 경험의 결핍을 충족시키는 욕망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놓쳐버렸다. 영화에서 봄은 그 자신을 성찰하여 봄의 동기와 욕망을 재발견할 수 있는 봄의 양식을 생산하는 것이다. 요컨대, 부재하는 것, 결핍된 것을 현전화하고 충족시키려하는 욕망이란 기관차의 운동, 바로 그것에 반응하는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 영화이다.
따라서 영화는 싱어가 표현하듯 "우리 지각의 호흡, 범위, 깊이 그리고 그와 함께 지각에 의존하는 모든 삶을 증폭하고 고양하는 담론"이다. 영화의 희열은, 특히 영화의 시각적 희열은 영화가 우리의 봄의 과정과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기에 또 우리의 봄의 한계를 벗어나며 우리의 봄의 법칙을 위반하기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싱어에 있어서 영화에 대한 철학으로서의 현상학이 갖는 의미와 역할에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매우 역설적이게도 싱어에 따르면 우리의 봄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은 봄의 구조를 어떻게 벗어나고, 위반해야할지를 시사하기에 영화 현상학이 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영화는 철저히 반성의 산물이며 그러한 한 그것은 의식의 차원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영화에 대한 현상학적 접근은 몸의 현상학이 아니라 의식의 현상학에서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