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현대신학의 집안싸움
1. 서론
2. 본론
1) 불트만
2) 판넨베르그와 몰트만
3) 집안싸움
3. 결론
Ⅱ. 성경을 해부하는 현대신학
1. 집도하는 불트만
2. 차원 신학자들
1) 바르트
2) 부른너
3) 틸리히
3. 성경과 두개의 차원개념
Ⅲ. 정통신학을 위협하는 삼대 신신학과 총신인의 결의
Ⅳ. 미국신학의 근황
1. 서론
2. 구 프린스톤 신학의 몰락과 자유주의의 팽배
3. 거물신학자시대 - 바르트, 불트만 틸리히시대
4. 사신신학시대 - 미국신학의 소아병적 발작
5. 미국신학의 새로운 문제아들
6. 결론
Ⅴ. 유럽신학의 근황
1. 자유주의 삼총사의 몰락과 칼바르트의 등장
2. 칼발트의 실각
3. 불트만의 붕괴
4. 어지러운 신학의 판도
5. 유럽신학의 새 주역들
6. 신학적 축의 변동
7. 유럽신학은 산간벽지 신학인가?
* 총결론 - 종말이 가까운 현대신학
1. 서론
2. 본론
1) 불트만
2) 판넨베르그와 몰트만
3) 집안싸움
3. 결론
Ⅱ. 성경을 해부하는 현대신학
1. 집도하는 불트만
2. 차원 신학자들
1) 바르트
2) 부른너
3) 틸리히
3. 성경과 두개의 차원개념
Ⅲ. 정통신학을 위협하는 삼대 신신학과 총신인의 결의
Ⅳ. 미국신학의 근황
1. 서론
2. 구 프린스톤 신학의 몰락과 자유주의의 팽배
3. 거물신학자시대 - 바르트, 불트만 틸리히시대
4. 사신신학시대 - 미국신학의 소아병적 발작
5. 미국신학의 새로운 문제아들
6. 결론
Ⅴ. 유럽신학의 근황
1. 자유주의 삼총사의 몰락과 칼바르트의 등장
2. 칼발트의 실각
3. 불트만의 붕괴
4. 어지러운 신학의 판도
5. 유럽신학의 새 주역들
6. 신학적 축의 변동
7. 유럽신학은 산간벽지 신학인가?
* 총결론 - 종말이 가까운 현대신학
본문내용
대한 "침묵"을 주장하기에 이르렀음
으로 "무신론적 복통"을 강하게 느끼고 있는 줄 안다.
이렇게 무신론의 "음침한 골짜기"(시23:4)를 헤메고 있는 구미신학은
이미 [신학](Theology)이 아니라 "新學"의 지경에 도달했다. 오늘날 구
미신학은 그 "무신론적 전락"의 결과로서 신학의 殘骸를 여기저기 남기
고 있다.
그것은 에스겔이 본 [마른뼈의 골짜기](겔37:1,2)의 광경과 흡사하다.
오늘날 현대신학을 대표하는 [구미신학]은 무신론의 지경에 도달했을
뿐 아니라 [脫基督敎]의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다.
일찌기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말하기를 "기독교의 위대
함"은 "기독교가 유일종교가 아님을 과감하게 시인"하는데 있다고 하였
다. 아놀드 토인비(Anold Toynbee)도 합세하여 부르짖기를 기독교는 절
대적 진리성을 포기하고 "세계적 종교화합의 시대"의 장을열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현대신학의 영향을 받은 [현대기독교]는 기독교의 옷을 벗기
에 바쁘다.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벗어 버리기에 바쁘다. [그리스도의
선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이름 아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 대신에 교회의 "사회적 혁명적 행동성"을 강조한다.
오늘날 [구미신학]으로 대표되는 현대신학은 분명히 "탈기독교의 활주
로"에 와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역사적 기독교신학 또는 [정통 신학]의
[유일종교 사상]을 그 잔재도 남지 않도록 완전히 불태워 버리고 (요
14:6, 롬1:16,행4:12) "무신론적 인본주의" 또는 "에큐메니칼 종교혼합
주의"의 "허무한 공간"으로 영구히 사라져 버리는 순간이 도래하는 것
뿐이다.
끝으로 오늘날 [현대신학]을 대표하는 [구미신학]은 그 "사회주의적
급진성"의 발휘로 인하여[공산주의]또는 [미르크스주의]와의 "대화를 통
한 일치 내지는 화합"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정치와 혁명을 통한
[정의사회구현]에 신학이 앞장 설 것을 부르짖고 있는 위르겐 몰트만
(Jugen Moltmann)과 하비 콕스(Harvy Cox)와 같은 신학자들은 [공산주
의]또는 [마르크스주의]와의 대화를 강조하면서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공
존보다는 한걸음 나아가서 "상부상조적인 협력관계의 수립"을 제의한다.
공산주의 측에서도 기독교에 대하여 대화를 통한 "일치"를 모색하자고
추파를 던져보내고 있다.
다년간 공산국 체코의 푸라하 신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다가 스위스에
있는 바젤대학으로 옮겨와서 신학을 가르치면서 WCC 중앙위원이 되었던
쟉 록흐만(Jan M.Lochmann)은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와의 대화가 양자의
사상적 혼합과 절충보다는 [세계사회의 인간화]을 위하여 함께 일하는
협력적 관계를 가져올 것이라고 내다 보았다.
그러나 [해방신학]의 출현은 이와같은 록흐만의 "예언"을 "휴지화"하
고 말았다.
위르겐 몰트만과 요하네스 멧즈의 [희망의 신학]의 연장선상에 있으면
서 최근 유럽신학계를 휩쓸고 있는 [신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
은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자들은 칼 마르크스의 [정치혁명 사상]과
[경제이론]을 신학적 해석학의 내용으로 삼아 세계의 가난하고 억눌림을
받는 인민들의 해방을 쟁취하는 신학을 구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티에레즈(Gustavo Gutiemez)와 같은 해방신학자는 공공연하게 성경
을 가난한 자의 편에 서서 칼, 마르크스의 시각을 갖고서 읽고 해석할
것을 부르짖고 있는데 이는 기독교와 마르크스즈의의 대화나 [인간화]의
목적을 위한 협력관계 운운이 아니라 "기독교의 마르크스주의화"요 "유
물론적 사회주의 혁명의 신학"(Materialistis Socialist Theology of
Revolution)의 출범을 의미한다.
역사적 기독교신학 즉 [개혁주의 정통신학]의 입장에서 볼때에 이 얼
마나 어처구니 없고 한심스러운 [현대신학]의 "추태"또는 "탈선행각"인
가(눅12:16-21,롬1:25,시1:1,2,고후6:14-16).
1960년대에 헤르만 도이빌드교수(Herman Dooyeweerd)의 저술 {서구 사
상의 황혼}(In the Twilight of Western Thought)이 출간되어 서구사상
의 반기독교적 급진성을 지적하고 경고한 적이 있다.
그리고 1971년에는 죤 몽고메리(John Warwick Montgomery)교수가 {기
독교신학의 자살}이라는 제목의 저술을 펴냈는데 [현대신학]은 그"급진
적 사상성" 때문에 자살적인 총격을 여러번에 걸쳐서 받은 결과로서 지
금은 그 운명의 순간이 시시 각각으로 다가오고 있다고 하는 풍자적이면
서 매우 심각한 표현을 하였다.
저자는 두 학자의 서구사상과 현대신학 전반에 걸친 비관적인 평가와
"종말적인 표현"에 대하여 아낌없는 찬동과 지지를 보내는 바이다.
앞서 묘사하고 설명한 바와 같은 [현대신학]의 급진주의 일변도의 진
행 때문에 [현대신학]은 현재 "종말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음이 분명하
다. 아니, "종말의 시기"라는 표현보다도 "종말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
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는지 모른다.
이와 같이 [기독교 무신론]과 [마르크스주의]로 뒤범벅이 된 현대신학
의 [종말적인 모습]을 지켜보면서 우리 한국의 [개혁주의 정통신학]은
"기독교신앙과 신학의 보존"이라는 지상 명령적인 목적론을 재확인하고
그것을 수행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이려 할 것이다.
[현대신학]의 "불신앙의 결론들"때문에 기독교의 존속이 "일대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오직 기독교를 보존해야 한다는 [절대
명제]가 있을 뿐이다. 한국과 세계에서 기독교를 보존하고 보존한 기독
교를 전파하는 이 큰 목적을 위하여 우리 교회는 분발하여 노도와 같이
밀려오는 현대신학의 급진적 사조에 대항하여 '일사각오의 믿음'을 갖고
서 용감하게 싸워야 할 것이다(사40:8, 딤전6:12, 딤후3:14-17, 사
6:13).
박아론 박사 (총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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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무신론적 복통"을 강하게 느끼고 있는 줄 안다.
이렇게 무신론의 "음침한 골짜기"(시23:4)를 헤메고 있는 구미신학은
이미 [신학](Theology)이 아니라 "新學"의 지경에 도달했다. 오늘날 구
미신학은 그 "무신론적 전락"의 결과로서 신학의 殘骸를 여기저기 남기
고 있다.
그것은 에스겔이 본 [마른뼈의 골짜기](겔37:1,2)의 광경과 흡사하다.
오늘날 현대신학을 대표하는 [구미신학]은 무신론의 지경에 도달했을
뿐 아니라 [脫基督敎]의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다.
일찌기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말하기를 "기독교의 위대
함"은 "기독교가 유일종교가 아님을 과감하게 시인"하는데 있다고 하였
다. 아놀드 토인비(Anold Toynbee)도 합세하여 부르짖기를 기독교는 절
대적 진리성을 포기하고 "세계적 종교화합의 시대"의 장을열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현대신학의 영향을 받은 [현대기독교]는 기독교의 옷을 벗기
에 바쁘다.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벗어 버리기에 바쁘다. [그리스도의
선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이름 아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 대신에 교회의 "사회적 혁명적 행동성"을 강조한다.
오늘날 [구미신학]으로 대표되는 현대신학은 분명히 "탈기독교의 활주
로"에 와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역사적 기독교신학 또는 [정통 신학]의
[유일종교 사상]을 그 잔재도 남지 않도록 완전히 불태워 버리고 (요
14:6, 롬1:16,행4:12) "무신론적 인본주의" 또는 "에큐메니칼 종교혼합
주의"의 "허무한 공간"으로 영구히 사라져 버리는 순간이 도래하는 것
뿐이다.
끝으로 오늘날 [현대신학]을 대표하는 [구미신학]은 그 "사회주의적
급진성"의 발휘로 인하여[공산주의]또는 [미르크스주의]와의 "대화를 통
한 일치 내지는 화합"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정치와 혁명을 통한
[정의사회구현]에 신학이 앞장 설 것을 부르짖고 있는 위르겐 몰트만
(Jugen Moltmann)과 하비 콕스(Harvy Cox)와 같은 신학자들은 [공산주
의]또는 [마르크스주의]와의 대화를 강조하면서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공
존보다는 한걸음 나아가서 "상부상조적인 협력관계의 수립"을 제의한다.
공산주의 측에서도 기독교에 대하여 대화를 통한 "일치"를 모색하자고
추파를 던져보내고 있다.
다년간 공산국 체코의 푸라하 신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다가 스위스에
있는 바젤대학으로 옮겨와서 신학을 가르치면서 WCC 중앙위원이 되었던
쟉 록흐만(Jan M.Lochmann)은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와의 대화가 양자의
사상적 혼합과 절충보다는 [세계사회의 인간화]을 위하여 함께 일하는
협력적 관계를 가져올 것이라고 내다 보았다.
그러나 [해방신학]의 출현은 이와같은 록흐만의 "예언"을 "휴지화"하
고 말았다.
위르겐 몰트만과 요하네스 멧즈의 [희망의 신학]의 연장선상에 있으면
서 최근 유럽신학계를 휩쓸고 있는 [신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
은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자들은 칼 마르크스의 [정치혁명 사상]과
[경제이론]을 신학적 해석학의 내용으로 삼아 세계의 가난하고 억눌림을
받는 인민들의 해방을 쟁취하는 신학을 구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티에레즈(Gustavo Gutiemez)와 같은 해방신학자는 공공연하게 성경
을 가난한 자의 편에 서서 칼, 마르크스의 시각을 갖고서 읽고 해석할
것을 부르짖고 있는데 이는 기독교와 마르크스즈의의 대화나 [인간화]의
목적을 위한 협력관계 운운이 아니라 "기독교의 마르크스주의화"요 "유
물론적 사회주의 혁명의 신학"(Materialistis Socialist Theology of
Revolution)의 출범을 의미한다.
역사적 기독교신학 즉 [개혁주의 정통신학]의 입장에서 볼때에 이 얼
마나 어처구니 없고 한심스러운 [현대신학]의 "추태"또는 "탈선행각"인
가(눅12:16-21,롬1:25,시1:1,2,고후6:14-16).
1960년대에 헤르만 도이빌드교수(Herman Dooyeweerd)의 저술 {서구 사
상의 황혼}(In the Twilight of Western Thought)이 출간되어 서구사상
의 반기독교적 급진성을 지적하고 경고한 적이 있다.
그리고 1971년에는 죤 몽고메리(John Warwick Montgomery)교수가 {기
독교신학의 자살}이라는 제목의 저술을 펴냈는데 [현대신학]은 그"급진
적 사상성" 때문에 자살적인 총격을 여러번에 걸쳐서 받은 결과로서 지
금은 그 운명의 순간이 시시 각각으로 다가오고 있다고 하는 풍자적이면
서 매우 심각한 표현을 하였다.
저자는 두 학자의 서구사상과 현대신학 전반에 걸친 비관적인 평가와
"종말적인 표현"에 대하여 아낌없는 찬동과 지지를 보내는 바이다.
앞서 묘사하고 설명한 바와 같은 [현대신학]의 급진주의 일변도의 진
행 때문에 [현대신학]은 현재 "종말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음이 분명하
다. 아니, "종말의 시기"라는 표현보다도 "종말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
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는지 모른다.
이와 같이 [기독교 무신론]과 [마르크스주의]로 뒤범벅이 된 현대신학
의 [종말적인 모습]을 지켜보면서 우리 한국의 [개혁주의 정통신학]은
"기독교신앙과 신학의 보존"이라는 지상 명령적인 목적론을 재확인하고
그것을 수행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이려 할 것이다.
[현대신학]의 "불신앙의 결론들"때문에 기독교의 존속이 "일대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오직 기독교를 보존해야 한다는 [절대
명제]가 있을 뿐이다. 한국과 세계에서 기독교를 보존하고 보존한 기독
교를 전파하는 이 큰 목적을 위하여 우리 교회는 분발하여 노도와 같이
밀려오는 현대신학의 급진적 사조에 대항하여 '일사각오의 믿음'을 갖고
서 용감하게 싸워야 할 것이다(사40:8, 딤전6:12, 딤후3:14-17, 사
6:13).
박아론 박사 (총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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