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제1편 복음과 개화
제2편 소망의 복음
제2편 소망의 복음
본문내용
교 이해도 도덕적 인격주의에 기초하고 있고 이것이 그의 사회변혁을 목적하는 사회복음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2)그의 신학방법론 : 그는 "신앙에 있어서 보수주의요 신학에 있어서 자유주의"를 표방한다. 그러면서도 그의 체계는 갇힌 체계가 아니라 열린 체계임을 말한다. 이것은 독선과 배타성을 베제한다는 말이다. 남의 것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태도이다.
그의 신학의 대상과 그 방법론을 정리하면 그는 기독교신학은 어떤 추상적 개념이나 원칙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그리스도 경험과 역사적 경험에서 출발하여 이 역사적 경험을 종교적인 내적 반성을 통하여 외적 이론형식으로 실생활의 행동의 원칙과 표준을 만들어서 이것을 동력화하는 방향으로 주력하는 학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3) 기독교의 절대성문제와 그의 성서관
기독교가 절대의 종교인가하는 문제에 대하여 그는 두 방향으로 자답한다. 첫째는 기독교는 그 자체 안에 본질적 절대성이 있다. 둘째는 다른 종교와의 관계에 있어서 대외적 절대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의 성서관은 성서축자영감설과 무오설을 부인하고 성서의 고등비평학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그는 성서에 대한 기계적 영감설이나 무오설에 대하여 이해하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11. 조선신학교의 설립
평양에서는 장로회신학교를 대신하여 평양신학교가 한국인의 손으로 개교되던 때에 서울에서는 거의 동시에 조선신학원의 설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결국 서울에서 1939년 3월 27일에 "조선신학교설립기성회"가 조직되어 기금을 모았다. 실로 한국인의 손으로 또 그 돈으로 세워진 최초의 신학교로 조선신학교 설립의 의의는 클 뿐 아니라 이 신학원의 교육노선이 지금까지의 선교사 주도하의 장로교 신학교육노선과는 아주 상반되는 교육의 혁명을 초래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결과적으로 조선신학원의 설립으로 선교사들에 의한 한국 장로교의 신학교육 독점시대는 이미 끝났음을 의미한다.
12. 신사참배강요와 그 반대운동
이 심사참배강요는 일제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발악이었다. 이 마지막 박해에서 교회가 분열되었다. 또 선교사와 한국교회도 대립되었다.
1)신사, 일선동근동조론의 표상 : 일제는 일선동근동조론을 식민주의사관에서 언급한다. 이렇게 신사를 종교와 정치의 혼합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종교적 또는 정치적 이유로도 이를 거부하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2)참배강요와 반대운동 : 일제는 먼저 기독교계 학교부터 강요하였다. 장.감 선교부는 신사에 대한 태도에 따라 학교를 패쇄하기도 하고 또는 이를 받아들이고 학교를 계속 운영하였다. 결국 나중에는 제일 큰 교단인 장로회도 강압적으로 1938년 제28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게 되었으나 교단내에서 이 결의에 순복할 수 없다는 신앙의 수호자들이 나타나 조직적으로 반대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먼저 개인적인 합법적인 반대운동은 박관준 장로가 벌인 진정서 투척사건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그후 조직적인 반대투쟁은 1939년 초부터 시작되었다. 반대운동의 중심지는 주기철 목사가 시무하던 평양 산정현교회였다. 북쪽에서 활발한 반대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때 남쪽 경남에서는 부산의 초량교회 한상동 목사가 강력한 대응을 하였다.
이 글을 읽고...
저자는 서문에서 한국 미족이 없는 한국 기독교를 생각할 수 없고 또한 한국 근대민족사와 유리된 한국 기독교사를 서술할 수 없음을 말하면서 특히 한국 기독교회의 신앙운동은 민족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전개되었고 그 결과로 우리 민족의 마음 속에 큰 흔적을 남겼음을 서술한다. 따라서 이 책은 포괄적 민족사관으로 서술하였음을 볼 수 있다.
저자의 이러한 민족사관은 선교사들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에서 잘 나타나 있다. 반선교사적인 민족운동과 시간이 흐른 뒤에 교회의 지도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서 탈선교자의 신앙과 신학에서 나타난다.
이 책에서는 민족구원신앙과 이에 대응되는 개인구원의 신앙형태를 구분하여 보여주고 있다. 이 개인구원의 신앙유형은 선교사들의 한국 교회의 비정치황와 정책의 후광을 받으면서 1907년부터 내세적 탈사회적 성격이 강한 개인구원 신앙이 마치 정통신앙인 양 강조하게 되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고 본다. 이리하여 한국 기독교회에는 반봉건적 사회개혁 의지를 강하게 나타내는 민족구원 신앙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고 주장한다.
대표적인 교단으로 장로교와 감리교를 중심으로해서 다루고 있다. 장로교는 선교사의 영향을 받은 보수주의적 신학을, 이에 반하여 감리교는 자유주의적 신학을 표방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감리교 입장에서 이 글을 쓰고 있으며 개인구원의 신앙보다는 민족구원의 신앙이 바른 것으로 또한 보수주의 보다는 자유주의의 신학이 더 낫다는 것이 여러부분에서 의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길선주 목사에 대해서는 편파적으로 이해하고 있음도 발견할 수 있다. 길선주 목사를 개인구원의 신앙의 대표자로 보고 있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 길선주 목사에게 개인구원의 신앙만이 있었고 민족구원의 신앙이 없었다면 어찌 수많은 시절 옥고를 치르며 모진 고문을 받았어야 했는가? 길선주 목사는 무엇보다도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며 위험과 어려움 속에서도 목숨을 아끼지 않고 이 민족을 복음으로 구하려 하였다.
그리고 이용도에 대해서도 변호적인 모습이 의도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오늘날이 시각으로 볼 때 신비주의의 주창자인 이용도의 실패와 악영향보다는 긍적적 평가와 개혁의 목적성을 더 드러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장로교회의 역사에 비하여 장로교회의 역사에 있어서는 훨씬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으며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초기와 중기의 한국 신학의 흐름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좋은 공부는 되었으나 개인구원의 신앙과 민족구원의 신앙은 기독교 지도자들에게서 동시적으로 또한 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으나 이 책에서는 극단적으로 이 둘을 구분시킴으로서 편협한 시각을 제공하고 있으며,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혹은 장로교와 감리교의 편견과 선입관으로 인해 독자로 하여금 보편적인 지식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2)그의 신학방법론 : 그는 "신앙에 있어서 보수주의요 신학에 있어서 자유주의"를 표방한다. 그러면서도 그의 체계는 갇힌 체계가 아니라 열린 체계임을 말한다. 이것은 독선과 배타성을 베제한다는 말이다. 남의 것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태도이다.
그의 신학의 대상과 그 방법론을 정리하면 그는 기독교신학은 어떤 추상적 개념이나 원칙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그리스도 경험과 역사적 경험에서 출발하여 이 역사적 경험을 종교적인 내적 반성을 통하여 외적 이론형식으로 실생활의 행동의 원칙과 표준을 만들어서 이것을 동력화하는 방향으로 주력하는 학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3) 기독교의 절대성문제와 그의 성서관
기독교가 절대의 종교인가하는 문제에 대하여 그는 두 방향으로 자답한다. 첫째는 기독교는 그 자체 안에 본질적 절대성이 있다. 둘째는 다른 종교와의 관계에 있어서 대외적 절대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의 성서관은 성서축자영감설과 무오설을 부인하고 성서의 고등비평학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그는 성서에 대한 기계적 영감설이나 무오설에 대하여 이해하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11. 조선신학교의 설립
평양에서는 장로회신학교를 대신하여 평양신학교가 한국인의 손으로 개교되던 때에 서울에서는 거의 동시에 조선신학원의 설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결국 서울에서 1939년 3월 27일에 "조선신학교설립기성회"가 조직되어 기금을 모았다. 실로 한국인의 손으로 또 그 돈으로 세워진 최초의 신학교로 조선신학교 설립의 의의는 클 뿐 아니라 이 신학원의 교육노선이 지금까지의 선교사 주도하의 장로교 신학교육노선과는 아주 상반되는 교육의 혁명을 초래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결과적으로 조선신학원의 설립으로 선교사들에 의한 한국 장로교의 신학교육 독점시대는 이미 끝났음을 의미한다.
12. 신사참배강요와 그 반대운동
이 심사참배강요는 일제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발악이었다. 이 마지막 박해에서 교회가 분열되었다. 또 선교사와 한국교회도 대립되었다.
1)신사, 일선동근동조론의 표상 : 일제는 일선동근동조론을 식민주의사관에서 언급한다. 이렇게 신사를 종교와 정치의 혼합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종교적 또는 정치적 이유로도 이를 거부하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2)참배강요와 반대운동 : 일제는 먼저 기독교계 학교부터 강요하였다. 장.감 선교부는 신사에 대한 태도에 따라 학교를 패쇄하기도 하고 또는 이를 받아들이고 학교를 계속 운영하였다. 결국 나중에는 제일 큰 교단인 장로회도 강압적으로 1938년 제28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게 되었으나 교단내에서 이 결의에 순복할 수 없다는 신앙의 수호자들이 나타나 조직적으로 반대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먼저 개인적인 합법적인 반대운동은 박관준 장로가 벌인 진정서 투척사건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그후 조직적인 반대투쟁은 1939년 초부터 시작되었다. 반대운동의 중심지는 주기철 목사가 시무하던 평양 산정현교회였다. 북쪽에서 활발한 반대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때 남쪽 경남에서는 부산의 초량교회 한상동 목사가 강력한 대응을 하였다.
이 글을 읽고...
저자는 서문에서 한국 미족이 없는 한국 기독교를 생각할 수 없고 또한 한국 근대민족사와 유리된 한국 기독교사를 서술할 수 없음을 말하면서 특히 한국 기독교회의 신앙운동은 민족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전개되었고 그 결과로 우리 민족의 마음 속에 큰 흔적을 남겼음을 서술한다. 따라서 이 책은 포괄적 민족사관으로 서술하였음을 볼 수 있다.
저자의 이러한 민족사관은 선교사들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에서 잘 나타나 있다. 반선교사적인 민족운동과 시간이 흐른 뒤에 교회의 지도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서 탈선교자의 신앙과 신학에서 나타난다.
이 책에서는 민족구원신앙과 이에 대응되는 개인구원의 신앙형태를 구분하여 보여주고 있다. 이 개인구원의 신앙유형은 선교사들의 한국 교회의 비정치황와 정책의 후광을 받으면서 1907년부터 내세적 탈사회적 성격이 강한 개인구원 신앙이 마치 정통신앙인 양 강조하게 되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고 본다. 이리하여 한국 기독교회에는 반봉건적 사회개혁 의지를 강하게 나타내는 민족구원 신앙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고 주장한다.
대표적인 교단으로 장로교와 감리교를 중심으로해서 다루고 있다. 장로교는 선교사의 영향을 받은 보수주의적 신학을, 이에 반하여 감리교는 자유주의적 신학을 표방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감리교 입장에서 이 글을 쓰고 있으며 개인구원의 신앙보다는 민족구원의 신앙이 바른 것으로 또한 보수주의 보다는 자유주의의 신학이 더 낫다는 것이 여러부분에서 의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길선주 목사에 대해서는 편파적으로 이해하고 있음도 발견할 수 있다. 길선주 목사를 개인구원의 신앙의 대표자로 보고 있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 길선주 목사에게 개인구원의 신앙만이 있었고 민족구원의 신앙이 없었다면 어찌 수많은 시절 옥고를 치르며 모진 고문을 받았어야 했는가? 길선주 목사는 무엇보다도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며 위험과 어려움 속에서도 목숨을 아끼지 않고 이 민족을 복음으로 구하려 하였다.
그리고 이용도에 대해서도 변호적인 모습이 의도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오늘날이 시각으로 볼 때 신비주의의 주창자인 이용도의 실패와 악영향보다는 긍적적 평가와 개혁의 목적성을 더 드러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장로교회의 역사에 비하여 장로교회의 역사에 있어서는 훨씬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으며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초기와 중기의 한국 신학의 흐름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좋은 공부는 되었으나 개인구원의 신앙과 민족구원의 신앙은 기독교 지도자들에게서 동시적으로 또한 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으나 이 책에서는 극단적으로 이 둘을 구분시킴으로서 편협한 시각을 제공하고 있으며,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혹은 장로교와 감리교의 편견과 선입관으로 인해 독자로 하여금 보편적인 지식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