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무교의 인생관
Ⅲ. 무교의 영혼관
Ⅳ. 무교의 세계관
Ⅴ. 무교의 내세관
Ⅵ. 무교의 죽음관
Ⅶ. 사령제를 통해 본 죽음
A. 사령제의 의미
B. 진오기굿에 나타난 죽음의 이해
Ⅷ. 결론
Ⅱ. 무교의 인생관
Ⅲ. 무교의 영혼관
Ⅳ. 무교의 세계관
Ⅴ. 무교의 내세관
Ⅵ. 무교의 죽음관
Ⅶ. 사령제를 통해 본 죽음
A. 사령제의 의미
B. 진오기굿에 나타난 죽음의 이해
Ⅷ. 결론
본문내용
지옥 해서, 육도 윤회의 세계에서 살기 마련이다. 이것이 제 3의 세계이다. 이러한 운명에 떨어지기 전에 중음계에 있는 동안칠칠재를 비롯한 각종 재를 올려 심판자들의 자비를 빌기도 하고, 목련경에서 보듯이 이미 지옥에 떨어진 망령을 천상으로까지 이끌어 올리기도 한다. 불교와 무속은 저승을 비슷하게 이해한 것 같다. 그리고 죽은 영을 위한 오구굿과 재를 올리는 일도 같은 듯 보인다.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오는 동안 무속과 불교는 서로 영향을 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적어도 그 외형상의 구조나 기능에 있어서는 극히 가까운 것을 발견하게 된다. 시왕이니 불사니 하는 용어마저 함께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서 살펴보면 거기엔 근본적으로 다른 이해와 관념들이 지배하고 있다.
첫째, 심판 사상의 문제이다. 불교는 철두철미 인과 응보 사상에 지배되어 있다. 살아 있을 때에 삼보를 믿지 아니하고 적악을 일삼던 나복의 어머니는 지옥에 떨어져야만 했다. 중생들이 방아 속에서 몸뚱이가 천 토막으로 끊겨 고생하는 방아 지옥을 본 목련이 그 이유를 옥주 에게 물었더니, "이들은 생전에 모두 중생들을 잘라 죽이고 남녀들이 둘러앉아 함께 음식을 먹으면서 그 맛이 좋다고 떠들던 자들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굿의 경우에는 이러한 인과 응보 사상이 없다. 불교의 영향을 받아 선한 사람은 천당에 가고 악한 사람은 죽어서 지옥 간다고는 하지만, 실제 오구굿에서는 이러한 사상을 볼 수가 없다. 죽은 영은 생전에 지은 죄 때문에 방황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심판하는 시왕이 있을 필요가 없다. 다만, 한을 풀어 주고 살문을 씻어 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황천을 건너 하나의 저승이 있을 뿐이다. 거기엔 선인이 가는 극락이 있고, 악인이 가는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원한 없이 저승에 편안히 가서 새로운 형태의 삶은 산다는 것이 그 전부이다.
둘째로, 윤회 사상 문제이다. 불교의 기본을 이루고 있는 사상은 연기요 윤회이다. 어떡하면 육도 윤회를 벗어나서 열반의 세계로 해탈할 것이냐가 근본 사상이다. 이것이 민중의 저승 관념과 칠칠재나 여수재의 의식을 자아냈다. 그러나 굿의 세계에는 이러한 윤회 사상이 없다. 민간에서 때로는 죽은 사람을 위해 키에다 밀가루 뿌려 놓고 거기에 생기는 동물의 발자국으로 점친다고 하지마는 이것은 완전히 불교적인 관념의 창작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저승은 완전한 죽음의 세계일 뿐이다.
셋째로, 명복과 명조의 관념이다. 이 두 관념의 관계를 분명히 구별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체로 불교가 죽은 이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고 명복을 비는 것에 치중하고 있는데 비해 굿의 세계에서는 살아남은 후손들의 제재 초복에 중요한 관심을 가지고 굿을 통해 죽은 영의 명조를 비는 데 치중하고 있다.
Ⅷ. 결론
한국 무속의 죽음이해 속에 삶의 이해가 반영되어 있다.
) 유동식, "진오기 굿을 통해 본 이승과 저승" (엠파스 검색어 「무속」)
첫째는, 이승에서 충만한 삶을 추구한다는 의미의 현실주의적이다. 우리들에게 바람직한 삶은 철두철미하게 이 세상에서의 장수요, 풍성한 삶이다. 죽음이란 언제나 억울한 것이요 한스러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억울한 것이며, 그 한을 풀어 주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저승으로 보냄으로써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복이 오도록 하자는 데 근본 관심이 있다. 한국을 휩쓸어 오던 풍수 지리에 대한 신앙 역시 같은 관념의 소산이다. 죽은 조상을 좋은 곳에 묻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후손들에게 행운이 온다는 현실주의에서 나온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심판 사상이 없다는 뜻에서 낙관주의의 인생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굿에서는 윤리적인 선과 악이 문제되는 일이 없다. 저승에 못 가는 것은 악업 때문이 아니다. 다만 죽음을 가져오는 살기, 더러운 마력 때문이요, 원한 때문이다. 원칙적으로는 저승에 극락과 지옥이란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이런 것은 모두 불교나 도교의 영향에서 후대의 관념에 불과하다. 한국적 가치 기준은 질적인 개념이 아니라, 양적인 개념이다. 다다 익선이야말로 한국적 가치 개념이다. 오래 사는 것이 복이고 많이 소유하는 것이 복이다. 제 명에 죽지 못하는 횡사나 제대로 못 먹는 가난이야말로 죄에 해당한다. 옥황 상제가 벼락을 친 대상은 도둑질해서 배불리 먹던 놈이 아니라 뱃속에서 쪼르륵 소리가 나던 선비였다는 것이다. 무슨 짓을 하든 오래 살고 많이 갖는 것이 축복이 된다고 믿는다. 여기에 한국적 부정 부패의 근본 철학이 있고,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는 윤리적 건망증의 한국적 기질이 있다. 셋째는, 윤회가 아닌 내세 재생관이다. 변증법적인 인생관이라 해도 좋다. 죽고 다시 죽음으로써 저승에서 살게 된다는 관념이다. 죽은 영을 불러 넋두리를 하게 한 다음 다시 지부와의 사자들이 와서 넋을 데려가게 한다. 말하자면 두 번 죽음으로써 저승으로 가게 된다는 관념이다. 이것은 바리 공주의 설화 구성에도 반영되어 있었다. 곧, 바리 공주는 두 번 저승을 왕래함으로써 죽은 부모를 다시 살리게 할 약수를 구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일찍이 우리들의 신화 속에서도 이중 탄생의 형식으로 나타나 있다. 특히 난생 설화가 그러하다. 대체로 우리의 시조들은 알에서 나온 것으로 되어 있다. 주몽이 그러했고 혁거세가 그러했다. 알이란 일단 모체에서 탄생한 것인데 그 알에서 또다시 태어난 것이 옛 시조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 탄생을 통해 질적인 승화가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마찬가지로 이중의 사망을 통해 죽음에서 삶으로의 승화가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여기에 한국적인 종교 의식의 바탕이 있다. 그리고 모든 역경 속에서도 절망하지 아니 하고 또다시 새로운 세계를 꿈꾸며 살아가는 한국적인 저력의 근거가 있다.
참고문헌
유동식. 「한국무교의 역사와 구조」. 서울: 연세대출판부, 1985.
_____ . 「한국종교와 기독교」.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6.
우중근. "한국 무교와 그리스도교의 죽음관 비교." 석사학위논문. 카톨릭대학교 대학원, 1999.
최봉기. "기독교와 한국 무속에서의 죽음 이해." 석사학위논문. 침신대학교 대학원, 1995.
첫째, 심판 사상의 문제이다. 불교는 철두철미 인과 응보 사상에 지배되어 있다. 살아 있을 때에 삼보를 믿지 아니하고 적악을 일삼던 나복의 어머니는 지옥에 떨어져야만 했다. 중생들이 방아 속에서 몸뚱이가 천 토막으로 끊겨 고생하는 방아 지옥을 본 목련이 그 이유를 옥주 에게 물었더니, "이들은 생전에 모두 중생들을 잘라 죽이고 남녀들이 둘러앉아 함께 음식을 먹으면서 그 맛이 좋다고 떠들던 자들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굿의 경우에는 이러한 인과 응보 사상이 없다. 불교의 영향을 받아 선한 사람은 천당에 가고 악한 사람은 죽어서 지옥 간다고는 하지만, 실제 오구굿에서는 이러한 사상을 볼 수가 없다. 죽은 영은 생전에 지은 죄 때문에 방황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심판하는 시왕이 있을 필요가 없다. 다만, 한을 풀어 주고 살문을 씻어 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황천을 건너 하나의 저승이 있을 뿐이다. 거기엔 선인이 가는 극락이 있고, 악인이 가는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원한 없이 저승에 편안히 가서 새로운 형태의 삶은 산다는 것이 그 전부이다.
둘째로, 윤회 사상 문제이다. 불교의 기본을 이루고 있는 사상은 연기요 윤회이다. 어떡하면 육도 윤회를 벗어나서 열반의 세계로 해탈할 것이냐가 근본 사상이다. 이것이 민중의 저승 관념과 칠칠재나 여수재의 의식을 자아냈다. 그러나 굿의 세계에는 이러한 윤회 사상이 없다. 민간에서 때로는 죽은 사람을 위해 키에다 밀가루 뿌려 놓고 거기에 생기는 동물의 발자국으로 점친다고 하지마는 이것은 완전히 불교적인 관념의 창작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저승은 완전한 죽음의 세계일 뿐이다.
셋째로, 명복과 명조의 관념이다. 이 두 관념의 관계를 분명히 구별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체로 불교가 죽은 이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고 명복을 비는 것에 치중하고 있는데 비해 굿의 세계에서는 살아남은 후손들의 제재 초복에 중요한 관심을 가지고 굿을 통해 죽은 영의 명조를 비는 데 치중하고 있다.
Ⅷ. 결론
한국 무속의 죽음이해 속에 삶의 이해가 반영되어 있다.
) 유동식, "진오기 굿을 통해 본 이승과 저승" (엠파스 검색어 「무속」)
첫째는, 이승에서 충만한 삶을 추구한다는 의미의 현실주의적이다. 우리들에게 바람직한 삶은 철두철미하게 이 세상에서의 장수요, 풍성한 삶이다. 죽음이란 언제나 억울한 것이요 한스러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억울한 것이며, 그 한을 풀어 주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저승으로 보냄으로써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복이 오도록 하자는 데 근본 관심이 있다. 한국을 휩쓸어 오던 풍수 지리에 대한 신앙 역시 같은 관념의 소산이다. 죽은 조상을 좋은 곳에 묻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후손들에게 행운이 온다는 현실주의에서 나온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심판 사상이 없다는 뜻에서 낙관주의의 인생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굿에서는 윤리적인 선과 악이 문제되는 일이 없다. 저승에 못 가는 것은 악업 때문이 아니다. 다만 죽음을 가져오는 살기, 더러운 마력 때문이요, 원한 때문이다. 원칙적으로는 저승에 극락과 지옥이란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이런 것은 모두 불교나 도교의 영향에서 후대의 관념에 불과하다. 한국적 가치 기준은 질적인 개념이 아니라, 양적인 개념이다. 다다 익선이야말로 한국적 가치 개념이다. 오래 사는 것이 복이고 많이 소유하는 것이 복이다. 제 명에 죽지 못하는 횡사나 제대로 못 먹는 가난이야말로 죄에 해당한다. 옥황 상제가 벼락을 친 대상은 도둑질해서 배불리 먹던 놈이 아니라 뱃속에서 쪼르륵 소리가 나던 선비였다는 것이다. 무슨 짓을 하든 오래 살고 많이 갖는 것이 축복이 된다고 믿는다. 여기에 한국적 부정 부패의 근본 철학이 있고,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는 윤리적 건망증의 한국적 기질이 있다. 셋째는, 윤회가 아닌 내세 재생관이다. 변증법적인 인생관이라 해도 좋다. 죽고 다시 죽음으로써 저승에서 살게 된다는 관념이다. 죽은 영을 불러 넋두리를 하게 한 다음 다시 지부와의 사자들이 와서 넋을 데려가게 한다. 말하자면 두 번 죽음으로써 저승으로 가게 된다는 관념이다. 이것은 바리 공주의 설화 구성에도 반영되어 있었다. 곧, 바리 공주는 두 번 저승을 왕래함으로써 죽은 부모를 다시 살리게 할 약수를 구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일찍이 우리들의 신화 속에서도 이중 탄생의 형식으로 나타나 있다. 특히 난생 설화가 그러하다. 대체로 우리의 시조들은 알에서 나온 것으로 되어 있다. 주몽이 그러했고 혁거세가 그러했다. 알이란 일단 모체에서 탄생한 것인데 그 알에서 또다시 태어난 것이 옛 시조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 탄생을 통해 질적인 승화가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마찬가지로 이중의 사망을 통해 죽음에서 삶으로의 승화가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여기에 한국적인 종교 의식의 바탕이 있다. 그리고 모든 역경 속에서도 절망하지 아니 하고 또다시 새로운 세계를 꿈꾸며 살아가는 한국적인 저력의 근거가 있다.
참고문헌
유동식. 「한국무교의 역사와 구조」. 서울: 연세대출판부, 1985.
_____ . 「한국종교와 기독교」.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6.
우중근. "한국 무교와 그리스도교의 죽음관 비교." 석사학위논문. 카톨릭대학교 대학원, 1999.
최봉기. "기독교와 한국 무속에서의 죽음 이해." 석사학위논문. 침신대학교 대학원,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