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제 11 장 중세의 기독교
1. 중세 기독교의 형성
2. 중세기독교의 절정
3. 중세 기독교의 붕괴(중세의 후기)
제 12 장 문예부흥과 종교개혁
1. 문예 부흥
2. 종교개혁
1. 중세 기독교의 형성
2. 중세기독교의 절정
3. 중세 기독교의 붕괴(중세의 후기)
제 12 장 문예부흥과 종교개혁
1. 문예 부흥
2. 종교개혁
본문내용
스파이엘(Speier) 회의가 소집되었고, 1529년에는 2차 회의가 소집되어 신교도들을 Protestant 라고 규정하였다. 신성로마황제로 대관된 촬스 5세는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신교도들은 슈말캐트(Schmalkald)에서 서로 연합을 서약하여 투행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1555년에 이르러 비로소 정식으로 신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B. 쯔빙글리의 개혁운동
쯔빙글리히는 성서의 권위와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원만을 믿어 속죄권 매매를 거부하며 1522년부터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1523년 67개안을 내걸고 공중토론하여 바젤 시민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게 되었다. 그는 원시교회의 단순한 형식과 순수성을 회복하고자 노력하였다. 교권주의를 버리고 민주적인 입헙제도를 창설하였다.
루터와 쯔빙그리는 사상적으로 거의 같았으나 성격상 차이가 있었다. 성만찬에서 루터는 공제설을 주장한 반면, 쯔빙글리히는 상징적인 것으로 강조하였다.
그는 1531년 10월 11일 카펠(Kappel)에서 전사하였다.
C. 칼빈의 개혁운동
칼빈(1509~1564)은 냉철한 이성과 조직적 두뇌를 가지고, 혼잡한 개혁사상을 체계화 하여, 개혁신학의 기초를 확립시킨 사람이다. 그는 노이온(Noyon)에서 출생하였다. 파리대학에서 연구하던 중 1532년 쎄네카(Seneca)의 '관용론 주석'을 써서 학계에 주목을 받았다. 1533년 11월 파리대학장 취임연설에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말을 인용하여 개혁의 필요를 논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화근이 되어 칼빈은 바젤로 몸을 피하게 되었다. 칼빈은 신교도들의 정당성을 변호하기 위하여 1536년 '기독교 강요'를 써서 왕에게 바쳤다. 그 뒤 이 책은 거듭 개정되어 1559년에는 초판의 5배나 되는 완결판이 되었다.
인간은 신에게 의존하여 살며 그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러나 인간과 세대는 자기중심으로 되어 하나님 앞에서 모순된 존재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어주기 위하여 자기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렸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입고, 구원으로 예정함을 입은 사람은, 이제 그의 생활로 구원받은 사실을 증거해야 한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고, 우리는 바르게 사는것으로 그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
이 책이 출판되던 1536년 칼빈은 바젤에서 슈트라스베르그(Strassberg)로 가던 도중, 제네바에서 화렐(Farel)을 만나 그의 청원을 받고, 제네바를 장로교의 본거지로 만들었다. 제네바 대학을 새워 스코트랜드, 영국, 화란 등지의 청교도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온건한 입장을 취하여 루터와 쯔빙그리등 신교파의 2대세력을 규합하려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교리면에 있어서도 가장 난점인 성만찬에 있어서 칼빈은, 떡과 포도주는 물체 그대로 있으나 이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우리마음에 임재하신다고 하여 공재설과 기념설의 조화를 얻게 하였다. 그는 많은 저서와 서신을 통하여 개신교의 신앙을 규명하며 국제적인 조직을 구성하다가 1546년 55세를 일기를 그의 생을 마쳤다.
B. 쯔빙글리의 개혁운동
쯔빙글리히는 성서의 권위와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원만을 믿어 속죄권 매매를 거부하며 1522년부터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1523년 67개안을 내걸고 공중토론하여 바젤 시민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게 되었다. 그는 원시교회의 단순한 형식과 순수성을 회복하고자 노력하였다. 교권주의를 버리고 민주적인 입헙제도를 창설하였다.
루터와 쯔빙그리는 사상적으로 거의 같았으나 성격상 차이가 있었다. 성만찬에서 루터는 공제설을 주장한 반면, 쯔빙글리히는 상징적인 것으로 강조하였다.
그는 1531년 10월 11일 카펠(Kappel)에서 전사하였다.
C. 칼빈의 개혁운동
칼빈(1509~1564)은 냉철한 이성과 조직적 두뇌를 가지고, 혼잡한 개혁사상을 체계화 하여, 개혁신학의 기초를 확립시킨 사람이다. 그는 노이온(Noyon)에서 출생하였다. 파리대학에서 연구하던 중 1532년 쎄네카(Seneca)의 '관용론 주석'을 써서 학계에 주목을 받았다. 1533년 11월 파리대학장 취임연설에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말을 인용하여 개혁의 필요를 논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화근이 되어 칼빈은 바젤로 몸을 피하게 되었다. 칼빈은 신교도들의 정당성을 변호하기 위하여 1536년 '기독교 강요'를 써서 왕에게 바쳤다. 그 뒤 이 책은 거듭 개정되어 1559년에는 초판의 5배나 되는 완결판이 되었다.
인간은 신에게 의존하여 살며 그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러나 인간과 세대는 자기중심으로 되어 하나님 앞에서 모순된 존재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어주기 위하여 자기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렸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입고, 구원으로 예정함을 입은 사람은, 이제 그의 생활로 구원받은 사실을 증거해야 한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고, 우리는 바르게 사는것으로 그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
이 책이 출판되던 1536년 칼빈은 바젤에서 슈트라스베르그(Strassberg)로 가던 도중, 제네바에서 화렐(Farel)을 만나 그의 청원을 받고, 제네바를 장로교의 본거지로 만들었다. 제네바 대학을 새워 스코트랜드, 영국, 화란 등지의 청교도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온건한 입장을 취하여 루터와 쯔빙그리등 신교파의 2대세력을 규합하려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교리면에 있어서도 가장 난점인 성만찬에 있어서 칼빈은, 떡과 포도주는 물체 그대로 있으나 이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우리마음에 임재하신다고 하여 공재설과 기념설의 조화를 얻게 하였다. 그는 많은 저서와 서신을 통하여 개신교의 신앙을 규명하며 국제적인 조직을 구성하다가 1546년 55세를 일기를 그의 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