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천문학의 발생 선조들이 남긴 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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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서론

2.본론

3.결론

본문내용

우리 역사에서도 일찍부터 천체관측을 위한 '천문대'를 설치하고 천체관측 및 연구를 수행하는 일련의 활동이 있어왔음이 옛 기록이나 유물의 형태로 발견된다.
우리 나라에서 천문관측을 했던 천문대는 삼국시대부터 있었다. 백제에는 일찍부터 점성대(占星臺)라는 천문대가 있었다고 하나 전하는 기록이 없어 자세한 내용은 알 수가 없다. 다만 백제의 이 점성대가 신라에 영향을 주어 경주에 있는 첨성대가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첨성대로 대표되는 삼국시대의 천문대의 전통은 고려시대로 이어졌다. 개성 만월대의 서쪽에 현존하는 첨성대가 그것을 말해주는데, 이 천문대는 전하는 기록이 없어 설립년대나 설립과정을 자세히 알 수 없다.
조선시대의 천문 관측대인 간의대(簡儀臺)는 1433년(세종 15년) 경복궁 경회루 북쪽에 세워졌고 이 간의대 외에도 소규모인 관천대(觀天臺)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또한 조선 후기에는 홍대용의 사설 천문대인 농수각(籠水閣)이 있어 민간 차원에서의 천문활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ㄱ . 신라경주첨성대
우리 나라에서 천문관측을 했던 천문대는 삼국시대부터 있었다. 백제에는 일찍부터 점성대(占星臺)라는 천문대가 있었다고 하나 전하는 기록이 없어 자세한 내용은 알 수가 없다. 다만 백제의 이 점성대가 신라에 영향을 주어 경주에 있는 첨성대가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5세기에 편찬된《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와 16세기에 편찬된《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평양성 내에 첨성대의 유적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어, 고구려에도 비슷한 천문대가 있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이러한 모든 사실로 미루어보아 백제에 세워졌던 많은 관측 기구들은 '주비의 법'에 의하여 세워졌을 것이며, 그것이 신라에 영향을 미쳐 첨성대가 되었고, 675년 백제 천문학자들이 일본에 건너가서 점성대(占星臺)가 되었으며, 백제와 신라의 천문대는 당(唐)에 자극을 주어 723년에 주공측경대(周公測景臺)의 재건을 보게 했다고 추정하는 이들도 있다.
신라의 첨성대는 고대천문대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것 중의 하나로서, 그 뛰어난 조형미와 견고한 축조기술은 모든 사람이 찬탄하는 바이다.
ㄴ. 고려개성천문대
첨성대로 대표되는 삼국시대의 천문대의 전통은 고려시대로 이어졌다. 개성 만월대의 서쪽에 현존하는 첨성대가 그것을 말해주는데, 이 천문대는 전하는 기록이 없어 설립년대나 설립과정을 자세히 알 수 없다. 이 고려의 첨성대는 기본적인 천문관측기기인 혼천의나 해시계 등을 대(臺)위에 설치하여 관측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ㄷ.조선의 천문대
조선시대의 천문 관측대인 간의대(簡儀臺)는 1433년(세종 15년) 경복궁 경회루 북쪽에 세워졌다. 이는 신라 첨성대와 고려 개성의 만월대(滿月臺) 서쪽에 세워진 첨성대처럼 천체 관측을 위해서 세워진 일종의 왕실 천문대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천문학자들을 서울의 삼각산, 금강산의 일출봉, 강화도의 마니산, 또는 백두산, 지리산, 한라산 등지에 파견하여 북극의 높이를 측정하고 일식과 월식을 관측하였는데 이러한 곳들에 임시 관측대를 설치하였다.
경복궁 간의대 외에도 소규모인 관천대(觀天臺)가 세워지기도 하였는데 광화방 관천대(1434년)와 창덕궁 금호문 밖의 관천대(1688년, 현재는 창경궁 안으로 이전)와 경희궁 개양문 밖의 관천대(1702년)가 있었는데 이곳에는 주로 소형의 간의인 소간의(小簡儀)를 높고 관측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조선 후기에는 홍대용의 사설 천문대인 농수각
) 농수각籠水閣조선 후기 실학자 홍대용(洪大容:1731~83)이 세운 사설 천문대.
봉건체제에서 개인적인 천문관측시설을 만들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평소 천문학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그는 1759년(영조 35) 나주에 있는 재야 과학자 나경적(羅景績)과 그 제자인 안처인(安處仁)에게 의뢰하여 3년간의 작업 끝에 혼천의(渾天儀)와 서양식 자명종[候...
(籠水閣)이 있어 민간 차원에서의 천문활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5. 천문도
(天文圖)
우리 나라는 일찍부터 중국의 영향을 받아 천문학이 발달하였는데, 이와 함께 관측기기의 발달과 천문도(天文圖)도 마찬가지였다.
고대에는 낙랑고분(樂浪古墳), 무용총(舞踊塚), 각저총(角抵塚)등에서 별그림이나 천문유물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주술적인 의미가 다분하나,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관찰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에는 천문도를 제작하였다는 기록은 있으나 모두 전하고 있지는 않다.
조선 태조 4년(1395년)에는 현전(現傳)하는 최고(最古)의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地圖)'를 제작하였고, 그 외에도 많은 천문도가 제작되었다. 명말이후 조선의 사신들은 선교사들을 통해서 서양 과학을 접하게 되었다.
숙종 34년(1708년) 탕약망의 '적도남북총성도(赤道南北總星圖)'를 모사(模寫)한 것을 제작하였다. 이는 서양 천문학의 영향을 받아 모사한 최초의 천문도라 추측되며, 이때부터 서양 영향을 받은 천문도가 제작되었다.
결론
과학화 시대네 살다보니 천문이란 것이 중요한 것인지, 얼마만큼의 발전이 있었는지
관심을 가진 경우가 없었던 것 같다. 신경을 썼다면 일기예보의 정확도에 대한 궁시렁거림정도였다 할까. 옛 선조들의 천문학발달을 찾아보면서 특히 그 기구의 사용이 참으로 놀라웠다. 그 시대에 관찰밖에 방법이 없었을 터인데 어떻게 그런 기구들을 만들어 사용했는지..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다. 작성의 과정에서 흥미도 많이 생겼고 앎도 많이 늘었다.
그런데 오랜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 천문학이 근래에 들어 그 분야에 대한 관심도가 별로 없었음을 알고 아쉬움도 많았다. 또 천문학에 관한 서적도 그리 많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유구한 천문학 역사를 가진 나라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많은 관심과 기여를 해야할 일이다. 보다 많은 천문학에 대한 공부를 해 볼 생각이다.
참고문헌
. 한국천문학사연구 /저자 : 한국천문학사편찬위원회편 /출판사:녹두;(도)
. 한국천문학사 /저자 : 나일성 / 출판사:서울대출판부
. 재미있는천문학여행 /저자 : 박석재 / 출판사:峨瓦+미학사
. 김남천문학 /저자 / 이재인 / 출판사:문학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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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10.26
  • 저작시기20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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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08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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