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읍성에대해 (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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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읍성의 역사적 의의>

-우리나라의 읍성

<읍성의 풍수적 해석>

-해미읍성(사적 제116호)

-해미읍성 내ㆍ외의 전경

본문내용

. 읍성도 마찬가지로 이 양적 풍수에 가장큰 영향을 받았다.
조경 문화와 밀접한 연관을 가졌던 풍수는 양택(陽宅) 풍수로서 그 이론에 의하면 배산임수의 택지를 가장 좋은 집터로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풍수는 좁은 뜻으로 주거의 입지 선택이라 할 수 있고 넓은 뜻으로는 보면 인간과 환경의 관계 설정 방식을 설명하는 체제, 더 나아가서는 자연에 대한 해석 체계라 할 수 있다. 또한 풍수는 모든 지리적 요소에 인간적인 실존성을 부여한다.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공간을 구체적인 사람과 관련된 상호 유기적인 관계의 살아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땅에 대한 감정적, 정서적 상호 교감을 이룰 수 있도록 한다
해미읍성(사적 제116호)
▶ 위 치 : 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 면 적 : 61,457평(성내:57,122 성외:4,335)
▶ 내 용:
조선 성종22년(1491)에 완성된 평지에 쌓은 석성 으로 조선시대 읍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성곽같이 1,800m, 성곽높이 5m, 면적 20만 제곱미터의 규모이다.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선조 12년(1579) 10월에 이곳 병사영의 군관으로 부임하여 10개월간 근무하기도 했다. 또한 고종 3년(1866) 천주교를 탄압하면서 1천여명의 천주교신자를 처형했던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순교성지로 기록된 곳이기도 하다.
외침을 막던 전형적인 성.
성벽 외곽에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울타리처럼 둘러쳐 " 탱자성 " 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것이 해미읍성의 정문위의 진남루의 모습이다. 지금은 오래되고 낡아서 볼품없는 모습이지만, 그래도 그 시절의 위엄은 그대로 살아 숨쉬는 것같다.
해미읍성은 또한 종교와 관련해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천주교 박해의 정점에 해미읍성이 있다.
특히 1866년의 병인박해에서는 1,000명이 넘는 신자가 이 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살아있는 사람의 머리채를 묶어 감옥밖의 호야나무에 매달거나, 성 밖의 큰 돌에 올려놓고 몽둥이로 마구 때려 목숨을 빼앗았다.
그 호야나무는 아직 푸른 잎을 피우고 있는데 천주교 순교목으로 지정돼 있다. 당시 순교한 신자들의 유해는 1975년 이규남 신부에 의해 읍성에서 1㎞ 쯤 떨어진 순교기념탑에 안치됐다.
해미읍성 내ㆍ외의 전경
해미읍성 내ㆍ외의 전경
석 구
마을 동쪽의 멸악산은 지나치게 준급하고 구험한 까닭에 산세의 모양이 좋지 않아 이에 대응하기 위해 동문 밖에 석구 한 쌍을 배열해서 엽승하였다.
  • 가격1,500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02.11.21
  • 저작시기2002.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12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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